그땐 그랬다(?)
피디가 개그맨을 때렸다. 잘 나가는 피디였고 스타급 개그맨이었다. 열 명 가까운 일행들이 모여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한 술집의 룸 안이었다. 한남대교 남단 근처의 술집이었고 1990년대 중반의 어느 날 밤이었다.
그때는 술을 꽤 자주 마셨다. 요즘은 팀 전체가 회식을 한다는 건 꿈도 못 꾸지만 당시에는 보통날은 물론이고 특히 녹화가 있는 날이면 끝나고 전체 팀원이 함께 술을 마시는 일이 꽤 됐다. 다 같이 고생했으니까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의 자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근데 그날따라 조금은 특별했었는지 개그맨들도 오랜만에 같이 회식을 했고 장소도 강남이었다. 몇 개의 룸으로 형성되어 있는 술집이었다. 우리는 룸 한 곳을 꽉 채우고 왁자지껄 술 주고받으며 그날 있었던 녹화 얘기며 사는 얘기들을 했다. 몇 명의 매니저들도 합류했고 점점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던 어느 순간, 다른 룸에 KBS 사람들도 술을 마시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왔고 잠시 후에 그쪽에서 한 피디가 우리가 있는 룸으로 들어왔다.
얼굴은 처음 봤지만 3, 4년 차 작가였던 나도 이름 석자를 들어본 꽤 유명한 피디였다. 한마디로 우리 쪽은 MBC의 난다 긴다 하는 피디와 작가, 개그맨이 있었고 KBS에서 한 실력 하는 피디가 우리 구역을 들어온 셈이었다. 나의 시선에서 왼쪽 끝에 그 개그맨이 앉아 있었고 우측 끝에 그 피디가 자리를 잡았다. 우리 모두 얼큰하게 마셨을 때였고 개그맨도 그 피디도 꽤 취했었다.
매니저였든 누구였든 우리 쪽에 있던 누군가가 그쪽에 우리의 존재를 알려줬을 거고 MBC의 실력자들을 직접 보고 싶어 넘어왔을 터였다. 당시만 해도 각 방송사간 개그맨들도 왕래가 거의 없었다. MBC만 하고 KBS만 하고 SBS만 했다. 그 개그맨 역시 KBS에서는 프로그램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K본부의 피디와 M본부의 개그맨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워낙 많은 세월이 흘러서인지 두 사람이 주고받았던 대사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추측하건대, 피디는 자신이 들어왔는데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개그맨이 고까왔던 것 같고, 개그맨은 왜 다른 방송사의 피디가 와서 허세를 부리는 건가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런데 갑자기 그 사태가 벌어진 거다.
나의 시선에서 우측에 있던 K본부 피디가 갑자기 일어나 테이블 위로 뛰어가더니 좌측에 있던 M본부 개그맨의 얼굴을 발로 가격한 거다. 워낙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다들 이게 뭔 일인가 했고 순식간에 두 사람을 뜯어말리는 등 아수라장이 됐다. 우리 모두 그랬지만 두 사람도 워낙 취했었다.
피디와 개그맨의 파워 게임이라고 할 것까지도 아니었다. 당시에는 피디의 파워가 당연히 위였다. 하지만 술이 만든 참사였음도 물론이다. 그 개그맨도 무척이나 분해했던 장면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렇다면, 그 사건은 그렇게 끝이 났을까. 아니면 술이 깬 다음 날이라도 폭행의 가해자인 피디가 피해자 개그맨에게 사과라도 했을까. 내가 본 건 아니고 전해 들었기에 팩트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 개그맨이 다음 날 K본부를 갔고 그 피디를 찾아 사과했다고 한다.
그때는 그런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