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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주 작가 Jan 11. 2021

나는 이렇게 금연에 성공했다!

나는 어떻게 담배를 끊을 수 있었나

오늘은 ‘아무튼 방송작가’를 잠시 쉬어간다는 뜻에서 조금은 다른 얘기를 할까 한다. 1월에 딱 어울리는 아이템, 금연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담배를 꽤 늦게 시작한 편이다. 선행학습에 능한 적지 않은 지인들이 빠르면 중학생 때, 늦는 친구들이 고등학생 때부터 시작했다. 그에 비해 나는 대학교 4학년까지도 전혀 피우지 않았고 군에 들어가서야 흡연자의 대열에 섰으니 늦어도 한참 늦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본다는 말은 진리다. 재수를 하고 대학생이 된 1985년에서 4학년을 보낸 1988년까지의 대한민국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흡연민국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최루탄 연기에 버틸 수 있었던 힘도 거기에서 길러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담배는 널려 있었다. 집, 학교, 동기의 자취방은 물론 거리, 카페, 식당 등 모든 곳에 재떨이가 있었다. 근데도 난 전혀 피우지 않았던 거다. 그때 우리는 자취방에 옹기종기 모여 독서토론을 자주 했는데 그 좁은 방에서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담배들을 피워댔다. 나만 빼고. 무슨 담배랑 원한이 있어서도 체질에 맞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그저 관심이 없었고 담배가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랬던 내가 담배를 입에 물게 된 데에는 기후와 국가라는 두 요소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군대에서 가장 힘들 수밖에 없는 신병교육대를 한여름인 7월과 8월에 했고, 국가에서 담배를 지급한 것이다. 그 힘든 훈련을 50분 정도 하면 쉬는 시간이 주어지는데 군대에서의 쉬는 시간은 흡연 타임이었다. 흡연자들은 쉬는 시간이 시작됨과 동시에 일렬로 줄을 쫙 섰고 비흡연자는 우두커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몸과 마음은 힘들었고 담배는 주어졌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담배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난 흡연자의 세계에 입문했고 때는 1989년 여름, 경기도 포천이었다.

흡연자가 된 나는 그야말로 남 부럽지 않게 피워댔다. 매우 정성껏 폈다. 혹시라도 약이 되라고. 그렇게 2002년 1월 1일까지, 약 12년 동안 하루에 2~3갑 정도를 피웠다.

나는 많은 사람들처럼 끊었다 실패하고, 다시 굳은 결심을 하고 끊었다 며칠 못 가 또 피는 등 무던히도 금연을 하려고 애를 썼던 적은 없다.

오히려 이렇게 맛있는 담배를 왜 끊냐(아직도 이런 얼토당토않은 얘기는 종종 듣게 된다)며 틈만 나면 피워댔고, 직업이 방송작가라는 이유를 자기 합리화에 가져다 써서 어떻게 하면 담배를 멋있게 피울 것인가, 몸에 좋지 않은 건 확실하긴 한데 혹시 허준에 따르면 정성은 독도 약으로 만든다는 말도 있던데 담배도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쥐고 한 모금 한 모금을 정성껏 핀다면 혹시 약이 되진 않을까, 또는 건강에 좋은 담배를 분명히 어디서 누군가가 만들고 있을 거야! 그리고 이 세상에 백해무익한 게 어딨어! 최소한 구십구해일익은 있지 않겠어? 등등 지금 돌이켜 보면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피웠다.

내가 도저히 이해를 못했던 부류의 사람은 이른바 담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었다. 내 주변에 아주 극소수 있었는데 이들은 하루에 담배를 피워봤자 고작 서너 대 정도였던 것이고 술자리를 가서야 반 갑이나 겨우 필까 하는 외계인 같은 존재들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송창의 피디였다.

혹시 담배의 진정한 맛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며 유심히 피는 모습을 관찰하곤 했는데 그들도 연기를 목구멍 깊숙이 넣곤 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들과 연결해서 내가 또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담배를 끊으려면 끊지, 줄이는 건 또 뭐냐는 것이다. 피우려면 화끈하게 피고 안 피우려면 안 피우는 거지 애매한 회색지대는 싫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골초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에 나는 도대체 어느 정도로 담배를 피운 걸까. 잠시 그때를 떠올려본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하는 첫 담배는 정말 소중한 그 무엇이었다. 잠도 확실히 깨고, 오늘 할 일들을 차분하게 계획도 할 수 있는 아침 첫 담배라면 좋겠지만, 그저 깨자마자 약간은 몽롱한 상태에서 들이마시는 담배 연기는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청량제 그 자체였던 것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누운 그 자리에서 피웠다는 것이다.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현관문을 열고 잉크 냄새가 아련히 풍겨오는 아침 신문을 가지고 와서 화장실로 가는 것이다. 샤워를 하거나 양치질을 하면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사람은 정말 해외 토픽감이라는 생각을 하며 씻고 옷을 입으며 세 번째 담배를 문다. 오늘의 의상 콘셉트에 대한 깊은 생각이 요구되는 것이다.

될 수 있으면 일어나서 나갈 준비가 되면 바로 나가는 것이 원칙이다. 답답한 집구석에서 벗어나 드넓은 야외에서 만끽할 수 있는 흡연의 자유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엘리베이터에서는 피우지 않았다. 대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나타나는 내 입에는 어느새 담배가 물려 있다. 전철역으로 걸어가며, 오늘의 아침 풍경을 여유로이 감상하며 피우는 네 번째 담배 역시 내겐 소중한 것이었다.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중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곳은 지하철 안이었다. 나는 늘 1시간 정도의 시간을 전철에 투자했기 때문에, 전철역 안으로 들어가기 전엔 다섯 번째 담배를 피워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지하철에서의 무료함은 다행히 책이란 존재로 대체하곤 했다. 물론 도착지의 전철역 위로 나오는 나의 입엔 여섯 번째 담배가 물려 있었다.

일곱 번째 담배부터 최소한 한 갑을 넘어가 서른다섯 번째 정도의 담배까지는 일을 하면서 피웠던 것들이다. 이 안에는 회의를 하면서 한 대, 남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으면서 한 대, 나의 발언을 멋있게 보이기 위한 소품으로써 한 대, 뭔가 메모를 하면서 한 대, 회의가 끝나서 한 대, 자판기 커피를 마시면서 한 대, 혼자서 뭔가 골똘하게 생각을 하면서 한 대, 전화를 하면서 한 대, 대본을 쓰면서는 여러 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략 어둑어둑해진 집 근처 전철역 위로 등장하는 내 입에 물려 있던 담배는 서른여섯 번째 정도가 될 것이고(술자리라도 다녀온 날엔 마흔, 혹은 쉰여섯 번째가 되기도 했다) 집으로 걸어가면서 서른일곱 번째, 도착해서 서른여덟 번째, 씻고 나서 서른아홉 번째, 자기 전에 마흔 번째가 되곤 했다.

이다지도 슬기로운 담배 생활을 했던 내가 담배를 끊을 구체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생각지도 않게 내 몸에 이상을 느끼게 된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물론 매일매일이 피곤에 지친 날들이었지만, 어느 날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보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일이 발생했고, 더 결정적인 것은 또 다른 어느 날 피곤에 절은 몸을 심야 버스에 던졌을 때 갑자기 정신이 몽롱해지며 ‘아, 이러다 죽겠구나!’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을 때였다.

하지만 바로 금연을 실행한 건 아니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독할 수 있을까. 다만 그 느낌을 강하게 받았던 그때가 마침 12월이었기에 다가오는 새해부터 끊자는 결심을 어렵지 않게 한 것이었다.  디데이는 2002년 1월 1일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하루를 못 참고 2002년 1월 2일부터 담배를 안 피웠고 2021년 1월 12일 지금 이 순간까지 단 한 대의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그렇게도 담배를 사랑했던 내가 어떻게 해서 금연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다음에 말씀드리겠다. 너무 길어진 관계로. 읽느라 수고하신 여러분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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