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의 <일밤>은 어떤 내용으로 꾸며졌을까. 요즘처럼 1시간, 1시간씩 크게 두 개의 코너가 2시간 정도를 하는 것처럼 대형화된 건 2010년대나 와서 그렇게 됐고, 90년대는 전체가 1시간 정도를 했다. 작가와 피디들도 몇 명 없었다.
팩트체크를 위해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당시의 <일밤> 대본들 중 한 권을 빼봤다. 1993년 11월 21일(일) 방송된 256회 분이다. 눈에 띄는 건, 스튜디오 녹화를 방송 이틀 전인 19일에 했다는 거다.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제작 일정이다. 내가 알기로 시의성이 요구되는 <썰전> 같은 시사 토크 프로그램도 녹화와 본방의 시차가 최소 3일은 있었다. 내가 2019년에 한 KBS <전국이장회의>도 스튜디오 녹화하고 2주 후에 방송했다. jtbc <김제동의 톡투유>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프로그램은 한 달 정도의 시차가 나기도 한다.
왜일까. 후반 작업에 들이는 물리적인 시간 때문이다. 60분 물의 경우 보통 스튜디오 녹화는 최소 3시간 하고 보통 4시간가량 한다. 240분을 50여 분으로 줄여가는 과정이 본방을 위한 후반 작업인데, 여기에 들어가는 물리적 시간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편집을 하는 데만 수 일이 소요된다. 게다가 요즘엔 자막도 좀 많은가. 작가 혹은 피디들이 분담을 해서 작업한다 해도 1~2일은 투자해야 한다. 이 과정만 해도 일주일이 후딱 가는 거다. 마지막 작업인 종합편집에 음악 넣고 성우가 있으면 더빙하고 최종 색 보정과 오디오 믹싱 등의 작업까지 하는데 적게 잡아도 열흘이다. 근데 90년대에는 후반 작업이 어떻게 이틀 만에 가능했을까. 정답은 마지막에 말씀드리겠다.
1993년 11월 26일 방영된 <일밤> 256회를 만든 제작진은 이렇다. (작가와 피디만 언급함을 이해해 주시라. 조명 무대 의상 등등 수고하신 분들이 참 많다.)
대본 김성덕 고혜정 김영주
연출 송창의
조연출 권석장
참으로 슬림하지 않은가. 물론 안팎에서 이런저런 수고를 했던 FD(무대감독)도 있었다. 솔직히 대본 첫 장에 인쇄돼 있는 면면들이 나도 믿기지 않는다. 혹시...? 하고 다른 해의 대본을 꺼냈다. 1년 후인 1994년 11월 20일 방영된 307회다. 표지에 이렇게 되어 있다.
기획 지석원
대본 강제상 고혜정 김영주
연출 송창의 김지완
조연출 권석장
지석원은 예능국장이었다. 피디가 한 사람 더 늘었다. 좀 나아졌나 보다. 여하튼, 그땐 그랬다.
내용은 어떤 것들로 채웠나. 93년 11월 26일 방송은 크게 3개의 코너였다. 일요 옴부즈맨, TV인생극장, 특별기획. MC는 이문세 이홍렬 이휘재.
'일요 옴부즈맨'은 일종의 자학 콘셉트다. 일주일 전의 방송 내용에서 실수했거나 잘못된 내용에 대해 정정하는 과정으로 웃음을 준다. 시청자가 보내온 지적사항에 대해 제작진이 답을 주는 형식으로 잘못을 인정하거나 변명을 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지난주 방송에서 한 코너에 나오는 어떤 연기자가 같은 코너에서 전혀 다른 역할로 겹치기 출연을 했습니다. 이게 말이 되는 겁니까?' 개그맨 최왕순이 처음에는 염라대왕으로 나왔는데 나중에 형사 역으로 또 등장했던 걸 말한 거다. 그러면 우리는 그 장면을 다시 보여주고 개그맨 최왕순의 인터뷰를 보여주며 웃겼다. 또 다른 예는 가수 방실이가 변비로 한 달밖에 못 산다고 했던 내용을 얘기하며 그래서 재촬영을 했다는 방식으로 웃음을 주었다.
여기서 웃긴 게 MC 멘트를 보면,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시청자들은 언제라도 '엽서'를 보낸다고 하며 진짜로 '우편번호 150-728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31번지 문화방송 일요일일요일밤에 담당자 앞으로 보내달라'라고 한다. 그야말로 그땐 그랬지다.
다음 코너는 'TV인생극장'이다. 여주로는 김완선이 출연했다. 선택의 갈림길은 이랬다. 이휘재가 선을 보러 가는 길에 어떤 여자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 맞닥뜨린다. 아마 깡패들이 위협을 했을 거다. 그때 이휘재는 무시하고 가야 할지, 구하러 달려가야 할지의 갈림길에서 고민한다. “그래, 결심했어. 내 인생이 달린 선 보러 가는데 어쩔 수 없잖아. 모른 척하는 거야.” 하고 펼쳐지는 인생 A의 경우와 “그래. 결심했어! 어떻게 못 본 척 해? 가서 돕는 거야.” 하는 인생 B의 경우를 코믹 드라마로 보여줬다.
다음 코너는 '특별기획'인데 고정 코너가 아닌 그때그때 이슈가 있을 때 했던 코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적어도 아시아 톱스타였던 홍콩 영화배우 이연걸이 내한했는데 바로 <일밤>에 출연한 것이다. 스튜디오에 이연걸이 등장해서 토크와 무술 시범 등을 보여줬고 놀랍게도 이경규와 함께 따로 시간을 내어 야외에서 콩트도 찍었다. “아뵤오오오~ 황비홍! 복수혈전!” 하면서 말이다. 통역은 개그맨 전유성의 부인인 가수 진미령이 했다.
그때 대본을 보면서 불현듯 떠오른 게 있다. 내가 하는 프로그램에 이연걸이 온다고 하니까 친구들이 난리가 났었다. 사인을 꼭 받아달라 신신당부를 했는데 아뿔싸, 어찌어찌하다 보니 사인을 받지 못했다.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친구를 만나 내가 그냥 슥슥 그린 사인을 주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했던 때가 아니었으니 친구가 이연걸의 사인이 어떻다는 걸 알리 만무했던 거다. 친구는 무척 고마워했다. 그런데 헤어지고서야 아차 했는데... 한글로 ‘이연걸’이라고 쓴 것이었다. 그땐 그랬다.
94년 11월 20일에 방영된 307회 대본을 넘겨보니 ‘맞아, 이 사람도 MC를 했었지!’ 했다. 이수만 SM 회장님. 후회가 밀려든다. 그때 잘 좀 사귀어 둘 걸.
그렇게 매주, 소수정예의 제작진으로 즐겁게 꾸려갔던 그때였다.
참, 문제를 내놓고 답을 안 하고 지나갈 뻔했다. 이경규가 이렇게 투덜거린 적 있다는 얘기 들어보신 분 계실 거다.
‘요즘은 녹화를 쓸데없이 너무 길게 해!’
맞다. 60분 물 <일밤>의 녹화는 몇 시간이나 했을까. 70분에서 80분 정도 했다. 그러니 이틀 정도면 편집 가능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