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주 작가 Apr 26. 2021

녹화방송 결사 반대했던 피디가 있었다

SBS <잘 먹고 잘 사는 법> 그리고 주 5일 근무제

내가 2001년부터 한 MBC <찾아라! 맛있는TV>는 외주 제작사 캔디 프로덕션이었다. 처음 일했을 때는 합정역과 상수역 중간에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홍대 거리 쪽의 한 빌딩 5층으로 옮겼다. 현재 김종국 하하의 고깃집이 1층에 있는 바로 그 건물이다.


캔디는 2000년대 초중반 당시 프로그램을 평균 네다섯 개 하던, 꽤 잘 나가던 제작사였는데, SBS의 토요일 오전 생방송 <잘 먹고 잘 사는 법>도 하고 있었다. 맛TV 팀 바로 옆에 있었고, 한 공간 안에서 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빤히 보였고 작가와 피디들도 서로 알았고 몇몇과는 술도 한잔씩 하면서 친하게 지냈다. 그중 한 메인 피디가 했던 행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지금이야 토요일도 휴일이라는 건 너무도 당연한 상식이지만, 그때는 토요일에도 일을 했다. 다만 오전까지. 월화수목금 일하고 토요일은 오전까지 일하면 비로소 휴일이 시작됐다. <잘 먹고 잘 사는 법(이하 잘잘법)> 팀은 토요일 오전에 하는 생방송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보람찬 일주일을 끝낸 평화로운 휴식의 오후를 보내는 게 루틴이었음이 물론이다.


그런데, 2004년의 어느 날! ‘주 5일 근무제’라는 것이 시행된 것이다. 아마도 2003년에 관련 법률이 개정되었을 것이고, 비로소 2004년에 시행 예정이라는 일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잘잘법 팀은 그동안 해온 게 있었기에, 프로그램의 방송 요일을 변경하지 않는 이상, 법으로 토요일 전체가 휴일로 규정된다 해도 당연히 늘 그래 왔던 것처럼 토요일 오전에는 생방송을 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SBS에서 캔디 프로덕션으로 공문에 왔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을 거라 추정한다.


- 잘잘법 제작사 귀하 여러분. 모월 모일 토요일부터는 주 5일 근무제가 시행되어 우리 방송사는 국가 시책에 따를 수밖에 없으니, 지금까지 해오던 토요일 오전 생방송을 전날인 금요일 오후에 녹화방송을 하시오 -


“아니 이게 무슨 망발이야!!!!”


그냥 대화만 해도 온 사무실에서 다 들리는데 크게 버럭 하는 소리가 울린 것이다.


“김 피디, 무슨 일인데?”

“아니 무슨 주 5일 근무제라는 게 시행된다는데 SBS 카메라 감독들, 부조 기술감독들이 토요일에 쉰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우리더러 금요일에 녹화하라고.”


요는 제작을 담당하는 팀과 제대로 된 상의도 없이 일방적인 통보를 해서 더 열 받았다는 거였다.


생방송과 녹화방송을 준비하는 것은 크게 차이가 없으면서도 꽤 달라지기도 한다. 가장 큰 차이는 준비 과정이 어찌했든 생방송이 끝나기만 하면 그야말로 끝이다. 엠씨가 망발을 했다면? 끝. 내용이 다소 부실했다? 끝. 코너 한 개를 틀지 못하는 방송사고가 있었다? 끝. 그냥 끝이다.


그에 비해 녹화방송은 녹화가 끝나도 끝이 아니다. 여건이 허락하는 그 순간까지 고치려고 들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 심지어 녹화할 때 코너 영상을 틀지 않아도 된다. 최종 방송본에만 들어가면 된다. 한마디로 녹화 시스템이 되면 일이 더 많아지는 것이다. 편집 과정이 들어가는 것이다. 엠씨들도 생방송이라면 대본에 쓰인 대로 거의 그대로 하지만, 녹화방송이라면 대본에 없어도 부담 없이 할 수 있다. 나중에 편집하면 되니까.


여하튼, 거역할 수 없는 주 5일 근무제의 시행으로 생방송을 녹화로 변경해야 하게 되었는데, 메인 피디는 예상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어떻게 했느냐고? 광고 보시겠다!


(광고)

김영주 작가의 책 <웃음의 현대사>, 나온 지 좀 되긴 했지만 관심 가져주세요. 저마다의 거래하는 도서관에 검색해보시고 없으면 ‘희망도서 신청’ 해 주세용ㅇㅇㅇ

(광고 끝)


잘잘법 메인 피디는 모든 팀원을 모아놓고 비장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이번 주 방송분부터 생방 못하게 돼서 금요일에 녹화합니다. 그런데 전 생방으로 하고 싶습니다.”


모두가 흠칫.


“지금까지 매주 해오던 대로 똑같이 녹화합니다. 생방이라 생각하고 분초 오차 없이 그대로 갑니다. 우리가 생방으로 넣던 자막들 그대로 넣습니다. 납품해야 하는 분량이 53분이라면, 우리는 53분 녹화합니다.”


그제야 모두 아하.


“자,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모두 끄덕끄덕.


“본사 감독님들이 토요일 온종일 쉬신다는데, 우리만 일하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그 주 금요일 오후 혹은 저녁 언저리, 탄현 SBS 스튜디오에서는 잘잘법 녹화가 시작됐고 끝났다. 그리고 메인 피디는 녹화를 한 테이프 고대~~~로 본사에 납품했다. 나와 만나 술잔 기울였다. 즐겁게.


* 주 5일 근무제

주 5일 근무제는 2003년에 개정된 근로기준법에 따라 실시됐다. 2004년에는 공기업 ・ 보험업 및 100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하고, 그 후 다른 사업장으로 확대하는 방식이었다. 한편 은행과 증권사는 2002년에 주 5일 근무제를 시행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외주 제작사가 늘어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