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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최 Nov 05. 2023

낭만 없는 행정에 지쳐 스웨덴으로 도망가다

스웨덴에서 지속가능한 낭만을 공부하다

고시에 보기 좋게 떨어졌다. 7급에는 붙었다.

7급 시험 준비를 위해 주로 부산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고시공부도 하지 않는데 서울에서 공부할 이유는 없었다.


부산대에서 공부하면서 운동삼아 테니스를 배웠다. 부산대 졸업생들과 테니스도 치고 가끔 술도 먹었다. 7급 시험에 붙었다는 얘기를 듣고 아주 친했던 부산대 86학번 형이 "내가 니 공무원 생활 1년 버티면 손에 장을 지진다고 했다". 나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형들이나 후배들이 보기엔 내가 공무원에 어울리지 않는 어떤 특징들이 있었나 보다.


직장생활은 팍팍하고 재미가 없었다. 아내에게 거의 매일 하소연을 했다. 그만두겠다고 정말 자주 얘기했다. 형의 말이 맞았다. 나는 공무원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MBTI 성격 유형이 INFP였다. 소위 잔다르크형! 내겐 일상적인 일보다 뭔가 변화를 만들어내는 일이 맞는 것이었다.


중앙부처, 그 당시 행정자치부 7급 공무원인 내게 무슨 변화를 위한 창의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겠는가?


출장비 계산하고, 매주 할 일 취합해서 보고 하고, 높은 사람들 식사 챙기는 그런 일들을 주로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일들도 참 중요한 일이었다. 누군가는 그런 일을 해야 했고, 누군가 그런 일들을 해주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고유의 업무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이었다.


고시에 실패하고 서른둘에 직장 생활을 시작한 나는

정말 고문관이었다. 마음은 선했지만 눈치도 없고 일처리에 능하지도 않았다. 늘 직장을 도망치고 그만두고 싶은 생각을 가지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기회가 왔다. 영어성적이 좋으면 2년간 외국에 유학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었다. 유학 시험을 먼저 준비하고 있던 어떤 직원분이 알려주었다.

 

그때부터 틈틈이 공부했다. 그 당시만 해도 달에 100시간이 넘 초과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원을 가거나 달리 시간을 빼서 공부하기가 어려웠다. 출퇴근 시간을 이용했다. 걸어 다녔다.

영어문장을 한두 문장 외우고 그걸 걸어 다니며 반복해서 입으로 소리 내어 발음했다.


그때 영어교재는 이클 샌들의 '저스티스'였다. 저스티스에 나오는 문장들을 외우고 다녔다. 외무공시와 행정고시 국제통상직을 공부했었기 때문에 영어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듣기 공부는 주로 테드(TED)를 들었다. 히, 켄 로빈슨 박사의 학교 교육이 우리의 창의성을 어떻게 죽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교육 개혁을 해야 할 지에 대한 그의 식견은 거의 충격에 가까웠다.


정말 간절히 직장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에 밤 12시가 넘지 않으면 걸어 다니며 영어를 소리 내어 읽고 테드를 들었다. 운이 좋게 한번 만에 유학 시험에 붙었다. 유학시험이 있다는 알려주신 그분은 죄송하게도 유학시험에 붙지 못했다.


유학을 갈 곳은 스웨덴으로 정했다. 시험 보기 전에 유학 가고 싶은 나라와 공부하고 싶은 내용을 제출해야 한다. 그리고 그 유학과제가 선정이 되어야 유학시험을 칠 수 있다. 나는 부정부패지수가 낮은 스웨덴에서 왜 부정부패 정도가 낮은 지를 연구하겠다고 유학과제를 내었었다.


실은 스웨덴이 부정부패지수도 낮지만 자연환경을 잘 보호하고 지속가능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많이 애쓴다고 녹색평론을 통해 읽은 적이 있기 때문에 스웨덴에 가고 싶었다. 녹색평론과의 인연은 그토록 질긴 것이었다


1 지망에 스톡홀름 대학을 지원했었는데 떨어졌다. 다행히 웁살라 대학에 붙었다는 연락이 왔다. 일이 바빠 2개월 정도 먼저 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학기가 시작되는 8월이 되어서야 한국을 떠날 수 있었다. 도망치듯 한국을 떴다. 그때가 2011년 8월이었다. 2002년 3월에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으니 9년은 족히 버틴 셈이다.


내가 1년만 버티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한 그 86학년 형은 아직도 손에 장을 지지지 않 있는 걸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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