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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악몽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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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앞니맘 Mar 26. 2023

함께 했던 마지막 공간

 

"제  봄이야 냉이가 꽃이 핀 것도 있더라고.  시간 진짜 빠르네.  낮에 보니까 곧  산수유도 피겠어."

"산수유?"

남편이  식탁을 닦으면서 내 등뒤에서 혼잣말처럼 얘기했다. 산수유가 무슨 꽃인지 머릿속에서  검색하고 있것이 분명했다.

"다닥다닥 붙은 노란 꽃"

"아하, 저기께 피는 건가?"

캄캄해져서 보이지 않는 창밖을 가리켰다.  집 뒤에 산속에 있는 산수유나무를 가리키는 것이다.

"오우, 주입식 교육이 승리했어. 이제 그걸 다 알다니 ㅋㅋㅋ."

"벚꽃은 언제 피나."

"아직 기다려야지. 목련 개나리 그런 거 먼저 피고 나면 피는 거."

나는 설거지를 하고 남편은  식탁을 정리하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금요일인데 맥주 한 잔 할 거야?"

거실에 술상을 차리면서 남편이 물었다.

"나는 안주만 먹을 거야."

저녁식사가 끝나면 남편이 늘 차리는 술상에 나는 오늘도 똑같이 초대가 되어서 앉았다.

"안 마셔 어디 안 좋아?"

"내일  애들 공연 가는 날이라서 일찍 나가서  머리 자르고 지하철까지 데려다주오려고."

"공연이 내일이구나."

큰애가 막내 생일 선물로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 예약을  해 놓았는데 그날이 바로 내일이다.

"둘만 보내도 되는 거야?"

"오빠가 아빠 만한데 뭘 걱정해."

나는 소파에 앉아서 얇은 담요를 덮으면서 말했다.

"재판은 또 다음 달  언제야?"

"27일. 생각하기도 싫다."

편은 송곳처럼 변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글라스에 소주를 따라서 들이켰다.

"판사가 바뀌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야."

"서류부터 다시 제출해야 하는 거야?"

"서류는 그동안 가져다줄 거  다 으니까 추가서류 아니면 없겠지. 그런데 모르지. 뭐 또  말도 안 되는 거 증명하라고 하면 또 내야지. 변호사가 전체적인 거 정리해서 ppt로 설명한데."

"서류는 우리만 제출하나 봐. 그 새끼들은 내라고 한 것도 안 내고 있다면서."


햇수로 5년 전에 시작한 재판은 아직도 제자리를 맴도는 기분이었다. 송, 재판 이런 거 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적법하게 산다고 살았는데 고소를 당하고 보니 적법하게 사는 것과 소송은 다른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재판에서 가장 답답한 것 일반인의 상식이나 드라마처럼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성폭력 사건에서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증명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돈을 줬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이체증이나 계산서 같은 걸 제출하면  끝인데  서류 제출 안 하고 재판을 끌기만 하 못 받은 사람이 못 받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술서는 잘 제출했어?  판사가 잘 읽어 보기는 하나?"

"아이씨 몰라. 사람이 죽어야 알아주려나."

"거든. 그런 말 마지마. 뭔 헛소리야."

남편의  헛소리에 나는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재판에 관한 얘기는 궁금하지 않은 척 묻지 않아도,  궁금해서 물어도 항상 이렇게 침묵 또는 분노로 대화가 마무리된 것이 몇 년째 반복 중이다.



"오징어도 너무 비싸서 1년에 한 번만 먹어야겠어."

"이제 바다 오염 때문에 그것도 못 먹게 될걸."

남편은 다시 술을 한 잔 따르고 나도 맥주를 한 잔 따랐다. 남편이 내 맥주잔에 손가락을 걸친다. 늘 하는 남편의 주도다.

"텃밭에 퇴비 비닐 정리 던데."

"티 났어?"

"티가 팍팍 났어. 들어오는 길이 깔끔해져서 바로 알아봤지. 수고했어. 근데 그거 내가 자기 없을 때 다 정리해서 담은 거야. 알지?"

"알았어. 알았어."

나도 했다는 걸 짚고 넘어가는 나에게 억지로 잔을 부딪혔다. 이렇게 우리는 재판에서 멀어지려고 애썼다.


더글로리를 언제 볼까 고민하는 나에게 피곤하지 않을 때 보라는 말도 하고  욕이 반이상인데 그런  영화 싫어하면서  볼만하냐는 질문도 했다.

"직접 복수하잖아. 다른 사람한테 의지하고 판결받을 필요 없이 그냥 다 싹."

내 말에 남편은 쓴웃음을 지었다.


남편은  법정드라마를 싫어했다. 내가 정규방송을 보겠다는 의지가 강하면 자리를 피하던지 이어폰을 끼고 다른 방송을 들었다. 나도 같이 변해가고 있는 중이고 최근 같이 본 드라마는 모범택시다.

"나도 저기다 전화해서 의뢰하고 싶다."

나도 남편도 초점을 잃어버린 분노가  쌓여서  정의로운 방법보다는 내 마음을 풀어줄 수 있는  방법에 더 마음이 가고 있었다.


 "피곤한데 조금만 보고자. 나 먼저 올라갈게."

 

우리가 함께한 공간에서의 일상의 대화가  24년  나와 남편이 만든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이 될지는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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