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찾아왔다는 말에 나는 잠깐 당황했다. 남편의 사망 소식이 방송에 나갔다는 것은 조문을 받으면서 알았지만 기자가 직접 찾아올지 상상하지 못했다. 언제부터인지 식당의 구석자리에 앉아서 우리를 지켜보던 젊은 남자가 나를 찾아온 기자였다.
"안녕하세요. 기자님이 저를 찾으셨다고..."
"경황이 없으실 텐데 이렇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기자로서 보다 검정고무신 만화책을 보고 자란 팬으로서 달려왔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명함을 건네면서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밝혔다.
남편은 21살부터 연재를 시작해서 30년 넘게 검정고무신을 그린 그림작가 이우영이다.
2008년에 사업권계약을 맺은 대행업체는 2019년 뜬금없이 계약 위반으로 남편을 고소했다. 고소이유는 남편의 캐릭터로 책을 출판했다는 이유였다. 10년이 넘도록 아무 문제가 없이 책을 냈고 책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애초에 대행업체와 맺은 사업권 계약서는 문제가 많았다. 일단 계약서에는 기간이 없었다. 무기한 계약서인 것이다. 불공정 계약을 한 것이다. 남편은 계약을 하고 10년이 넘은 시점에서 대행업체를 찾아가서 계약서 수정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기간도 정해지지 않고 현재에 맞지 않는 계약서를 상세하게 정리해서 다시 썼으면 합니다."
또 하나는 대행업체 대표는 사업을 하는 동안만 '내 것처럼 캐릭터 사업을 적극적으로 하고 계약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 공동저작자로 캐릭터 저작권 등록이 필요하다.'라고 제안을 했었다. 남편이 검정고무신 그림 작가라는 것을 굳이 등록할 필요는 없었지만 사업에 필요하다는 말과 언제든지 돌려받을 수 있다는 말을 믿고 저작권 캐릭터 지분을 나눠주는 등록을 하게 되었다. 이때 무상으로 나눠줬던 저작권 지분도 돌려 달라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10년간 출판한 책을 모두 모아서 고소를 한 것이다. 남편과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작가의 책까지 고소장 목록에 올린 것을 보면 고소의 의도가 눈에 보였다. 더구나 시동생과 시부모까지 포함이 되어 있었다. 사실은 공동저작권 등록 접수 자체가 받아들여지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 부분은 제도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일이 되었다.
만화를 사랑했던 어린이가 온전한 어른이 되기도 전에 작가로 데뷔를 했다. 그리고 30년 동안 한 가지 만화만 그렸다. 그래서 계약서를 써본 경험도 적었고 표본이 되는 제대로 된 계약서도 없었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만 해도 계약을 한다는 것은 만화를 계속 그릴 수 있다는 의미가 가장 컸다. 계약서를 작성하는데 변호사를 대동하거나 전문 매니저를 통해 계약을 한다는 것은 먼 나라 얘기였고 도장을 맡기고 계약서를 쓸 만큼 계약을 복잡하게 생각하거나 평생의 노력이 숲으로 돌아가고 본인의 인생을 스스로 끝내는 사건까지 겪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하는 시절을 살아온 만화가였다. 그냥 좋아하는 만화만 그리면 되는 줄 알고 살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 동료였던 어른들을 믿었다.
적어도 고소를 당한 5 년 전까지는 그랬다.
그렇게 본인이 바보였다고 믿으면서 죽어갔다.
남편의 극단적 선택의 이유로 그동안 싸워오고 있던 재판이 주요한 이유로 알려지면서 뉴스화가 되었고 이렇게 내가 기자 앞에 앉게 된 것이다. 나는 기자와 대화를 나누면서 혼란스러웠다. 살아서는 그렇게 알리고 싶어서 동분서주했던 사건이었지만 1심 판결도 내리지 않고 있던 재판부도 관련 부처도 관심 밖이었다. 개인의 잘못으로만 취급당하던 사건이 남편이 아주 떠나고 나서 다른 시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남편 말대로 창작자의 저작권 문제와 저작물등 계약의 문제가 개인이 계약서를 잘 쓰고 못쓰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남편의 죽음과 사회의 관심을 바꾼 것이다.
남편이 없는 이 상황에 작품이나 표준계약서 따위가 나와 아이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기자의 방문이 기쁘지만은 않았다. 소송을 시작하면서 힘이 들 때면 남편이 말했었다.
"만화를 하지 말고 단순한 일이나 하면서 사는 게 나한테 맞는데."
"무슨 ~맘에 없는 말도 잘하네."
진심이 아니라 넋두리라고 생각했는데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그때 재판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단순하게 살자고 내가 강력하게 말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재판을 포기하고 싶어도 상대 쪽에서 요구한 돈을 물어줄 경제적인 여유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승복한다는 것은 남편이 사랑하고 지키고 싶은 30년을 다 포기한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우리 부부는 동상이몽이었다. 나는 유명한 만화가 이기 전에 순수하고 친구 같았던 아빠로 철없는 아들 같은 남편으로 함께 늙어 간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의 작고 컸던 어리섞은 행동들도 다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조금 부족하고 섭섭해도 다섯 식구가 함께 있는 것으로도 충분했었는데 남편은 달랐었나 보다.
"작가님이 현재 진행 중인 재판 때문에 힘드셨다고 하는데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을까요?"
기자의 질문에 재판의 내용을 정리해서 이야기하는 일도 내게는 고통이었다.
"사건에 대해서는 변호사님을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남편의 사건이 죽어서 관심을 받게 되네요. 잘 들어 보시고 공정하게 기사를 써주세요. 감사합니다."
기자와 인사를 나누면서 장례식 입구 쪽을 오랜만에 나갔다. 남편 앞으로 도착한 조화가 입구를 가득 채웠다. 방송국, 학교, 개인팬, 협회, 정치인 등 다양했다. 그동안 쉴 새 없이 본인의 사정을 알리려고 뛰어다닌 흔적이라는 것을 알아 체고 더욱 안타까웠다.
그 이후로 기자들의 인터뷰와 방송사의 인터뷰는 계속되었다. 나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속으로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이라는 말인가? 다 끝났다.'는 생각에 더 서글퍼졌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전체의 크기를 볼 수 없었던 우리 가족은 남편이 떠나고 나서야 만화가로서 그의 크기를 알았고 소중한 인재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편으로서, 작가로서 존재의 이유를 이제야 인정하게 된 것 같아서 서럽고 미안하기만 했다.
많은 사건과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정신없이 3일을 보내고도 나는 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 앞으로를 살아갈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힘들어도 우리 가족으로만 견디기에는 부족했던 것일까? 내가 뭘 잘 못 했을까? 아니야, 그래도 이건 아니지.' 원망과 후회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