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죽음으로 이슈가 된 재판의 일부 내용이 공개되기 시작했고 '불완전계약이다. 불공정계약이다.'라는 해석들로 언론에 노출되기 시작했다. 만화계 전반에 작가들의 불공정한 계약이 심각하다는 것도 함께 보도가 되었다. 남편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이 작가들 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전달되기 시작된 것이다. 신인작가도 아니었던 남편이 그런 계약을 했다는 건 신인작가들에 피해는 더 많을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남편의 상을 치르는 사이에 많은 만화웹툰 관련자 분들께서 찾아와 주셨고 언제든지 도움을 주겠다고 명함을 맡기면서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상황을 사회적인 문제로 가져가게 될 줄은 몰랐다.
남편이 죽고 나니 안타까워하고 애도하는 추모의 글이 많았지만 한 편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이상한 글과 주장들도 올라오기 시작했다. 소시오패스라는 진단을 내리면서 정신질환 환자로 단정 짓는 글을 추모글이라고 올리기도 하고 어느새 빨갱이라는 이름을 달기도 했다. 나도 모르는 남편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다시 한번 나와 가족을 충격에 빠뜨렸다. 사람이 죽었고 특별하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아닌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사실에 세상이 참 무섭다는 것을 또 배웠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 조용하게 남편 대신 싸워야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30년을 알고 지냈고 20년 넘게 부부로 살았지만 남편이 이렇게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인지도 몰랐고 더 솔직하게 말하면 두려웠다. 남편을 보내고 1주일 만에 혼자서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을 내리고 이사 직함을 맡고 있었던 만화가 협회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변호사와 시동생과 함께 협회에서 마련한 장소에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나를 맞이하면서 인사를 건네는 분들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얼마 전에 남편과 같이 만났던 작가님이 두 분이나 있었다. 늦둥이 때문에 둘만의 외출을 못한 세월이 10년 가까운데 작년부터는 종종 둘이 외출이 가능해졌다. 딸이 엄마를 놔주기도 했고 남편이 관련 행사나 업계 사람들과 미팅이 있으면 주말에 일정을 잡아서 나와 함께 가기를 원했었다. 그래서 요즘 들어 자주 외출을 했었고 올해 초에 데이트 겸 따라갔던 자리에서 만난 작가님들이었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물을 흘리시는 작가님들 덕분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분위기는 침울했지만 우리는 만화가협회를 중심으로 남편을 돕겠다는 단체들과 협의체를 구성하기로 했다. 유가족 의견을 중심으로 변호사가 준비한 서류를 함께 공유하면서 협의를 진행하고 대책위에서 일을 하실 분들을 구성하고 일정과 방향을 정했다.
"이우영작가님이 생전에 협회에 도울을 요청했던 시기는 여러 사정으로 적극적으로 도와드릴 수가 없어서 안타까웠는데 이런 일을 겪고 나니 마음이 더 아픕니다. 앞으로 최선을 다해서 다 같이 노력했으면 합니다."
회장님이 인사겸 당부의 말씀을 전하셨다.
남편이 이곳에 나와 같은 목적으로 방문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남편도 협회 활동을 하지도 못했고 자신의 처지을 솔직하고 상세하게 전달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협회도 이렇게 까지 어려운 상황인 줄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용기를 내서 협회를 찾았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던 남편은 좌절이나 섭섭함 보다는 선배 작가로서 협회일에 조금 더 관심을 갖고 도와주기 시작했다. 주로 혼자서 만화 작업을 했고 타인에게 피해만 주지 않고 사는 인생이면 된다고 믿었던 남편이 세상에 공짜는 없고 내가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나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런데 오늘 똑같은 주제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찾아왔고 협회 작가들이 모여서 남편을 위한 회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만화가 협회뿐만이 아니라 관련 정부부처도 마찬가지였다. 재판 초기에 똑같은 문서와 제안을 올렸었지만 모두 기각되었었다. 그런데 남편이 사망한 후에 모두가 관심을 갖고 문제를 들여다 봐주고 있다. 달라진 것은 남편이 세상에 없다는 것뿐이다. '남편이 살아서 요구할 때는 가치가 없었고 세상을 떠난 지금은 가치가 생긴 것일까?.'
"저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여기에 오기까지 짧은 기간 동안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이 번에는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만화가들이 자신들의 마감일도 맞추기 힘든 상황에서 남편의 일에 관심을 가져 줄 수 있을까? 혹시 정치에 이용되는 건 아닌가? 만화단체도 많고 단체들이 추구하는 색깔도 각각 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쪽에 휩쓸려서 난처해지는 것은 아닐까? 뭐 이런 고민이었습니다. 저는 어떤 노선도 없이 남편의 죽음이 만화웹툰작가들의 환경을 개선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진짜 속마음은 남편은 떠나고 없는 지금 아주 두렵지만 이 싸움에서 이기는데 도움을 받고 싶어서 왔습니다. 꼭 좋은 결과를 남편의 납골당에 넣어주고 싶습니다."
나는 아주 이기적이고 솔직하게 두려움과 바람을 말했다. 작가들은 모두 울었지만 나는 울지 않고 또박또박 내 생각을 이야기했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날 '이우영작가 사건 대책위원회'가 일을 시작했다.
남편이 떠나고 남편 대신 처음으로 용기를 내서 일을 시작한 날이 되었다. '남편은 이런 나를 기대하고 있었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딸은 옆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딸을 학교에 보내기 전에 해야 하는 숙제가 내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