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작작 좀 마셔라, 지연아.”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자, 나는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으며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전날 마신 술이 문제였다. 술이 깰 시간도 없이 나온 탓에 옷도 머리도 그대로였다.
“만화과 실기시험장이 어디예요?”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며 물었다. 나는 다리가 풀려 속도가 줄던 참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셔츠 단추가 풀어진 학생 하나가 화구통을 덜컹이며 뛰고 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졌고, 숨소리는 거칠었다.
‘뭐야, 수험생이야?’
나는 손가락으로 시험장 방향을 가리켰고, 둘은 나란히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숨이 가빠져 어느 게 내 숨인지 그 애의 숨인지조차 헷갈렸다.
그 애는 가까스로 시험장 안으로 들어갔고, 이마에 맺힌 땀방울과 숨 찬 얼굴을 바라보며 지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쟤, 떨어지겠다.’
얼마 뒤, 우리는 다시 만났다. 신입생 환영식 강당에서였다.
“다음은 유아교육과를 소개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오른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딸들아, 일어나라!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게 아니라, 알을 낳습니다!
성차별 없는 세상, 생애 최초 교육을 책임지는 유아교육과입니다!”
강당 안에서 박수와 함성이 터졌다. 봄이 깨어나는 소리 같았다.
간호대와 유아교육과로 출발한 학교는 한동안 여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새 건물이 들어서고, 몇몇 학과가 신설되면서 캠퍼스엔 변화가 찾아왔다. 남학생들이 들어오자, 풍경도 달라졌다. 캠퍼스 곳곳에서 손잡고 걷는 커플,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장난치는 모습이 낯설지만 신선했다.
“쟤들 뭐냐. 부럽다.”
등나무 아래 커플을 바라보며 학회 총무 영현이 중얼거렸다. 남학생이 없는 유아교육과는 부러움과 불편함이 동시에 존재했다. 행사 준비나 물건 옮길 일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다른 과 남학생들에게 도움을 청하기 시작했다. 몇십 년 동안 뭐든 스스로 해내던 유아교육과와 간호과 여학생들이 갑자기 ‘약골’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아무리 공간이 없어도, 학생회실을 같이 쓰라고?
만화과가 대세긴 대세네. 총장실도 나눠줘야겠네.”
나는 밀어버린 회전의자가 벽에 부딪혔다.
“만화과 아니라니까, ‘만화예술과’라니까. 아직도 그걸 몰라?”
영현이 팔짱을 낀 채 비꼬듯 말했다.
“너, 만화가 예술이라고 생각하냐?”
“배우려고 시골까지 오는 거 보면 예술이지.
올해 실력 좋은 애들 많이 들어왔대. 잘 지내보자고.”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며 웃었다.
“너 수상하다.”
“수상하긴 뭐가 수상해. 연애할 수만 있다면 로맨스 소설 필사라도 할 판이구만.”
그때였다.
“똑, 똑, 똑. 만화예술과 회장 김고진입니다.”
낯익은 남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같은 통학버스에서 내리면 늘 내 앞을 걷던 남자. 키는 크지 않았고, 악성 곱슬머리에 검은 화구 가방을 늘 들고 다녔다. 지연은 종종 그가 교수님은 아닌지 헷갈리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그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본의 아니게 유아교육과에 신세를 지게 됐습니다. 당분간 함께 쓰라고 해서요. 불편하실 수 있겠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시키는 거 다 하겠습니다. 특히 힘쓰는 일은 언제든.”
그는 소매를 걷고, 어수선한 사무실 정리에 바로 나섰다.
“괜찮습니다. 학교가 문제죠. 회장님 잘못은 아니잖아요.”
영현이 먼저 웃으며 말을 받았다. 나는 아직도 회의적이었지만, 직접 와서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모습에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한 가지만 부탁드릴게요. 사무실에선 담배 피우지 말아 주세요.”
“알겠습니다.”
고진이 형은 같은 학번 보다 다섯 살이나 많았다. 다른 학교를 졸업하고 만예과에 다시 들어왔다고 했다.
그의 과에는 그런 ‘늦깎이’들이 꽤 있었다.
그렇게 유아교육과와 만화예술과의 어색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며칠 뒤, 사무실을 찾은 그를 나는 반갑게 맞이했다
“고진이 형, 전에 부탁 있으면 말하라고 하셨죠?”
“물론이죠.”
“문선대에서 율동할 남학생 세 명만 꼬셔 주세요. 여학생만 있으니 뭔가 아쉬워요.”
“걱정 마세요. 괜찮은 애들로 보내겠습니다.”
말은 쿨했지만, 나는 기대하지 않았다. 낯선 민중가요에 율동까지, 남학생이 자원하길 바라긴 힘들었다.
며칠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 똑, 똑.”
나는 회전의자를 돌려 문 쪽을 바라봤다. 세 명의 남학생이 들어왔고, 그중 한 명이 말했다.
“고진 선배가 가보라고 해서 왔어요.”
그 순간, 지연의 시선은 그가 아닌 다른 학생에게 멈췄다.
운동장에서 함께 뛰었던, 그날의 그 애.
‘떨어지겠다’ 확신했던 바로 그 수험생이었다.
“혹시…”
그가 안경을 올리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