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소심 판결이 끝나고 나는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기분을 안고 돌아왔다. 남은 욕심과 집착의 끈을 아직 내려놓지 못한 걸까. 가슴이 답답했다.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무작정 밖으로 나섰다.
가족과 함께 걷던 산책길. 아직 해는 서쪽에 걸려 훤한 시간이었다. 수확을 앞둔 가을 들판은 풍성하고 아름다웠다. 알맹이를 담고 있는 풍성한 가을 한가운데 서 있는 나는, 모든 것을 쏟아버린 쭉정이 같았다. 차라리 겨울이면 좋았을 텐데.
다 끝났다고 생각했고, 내려놓으면 후련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지금 흔들리는 갈대다.
상고 여부를 결정하는 자리에서 나는 많은 고민을 했고, 결국 상고를 포기했다. 억울함이 없어서도, 재판 결과가 만족스러워서도 아니었다. 이제는 아이들과 내 삶을 살고 싶었다. 과거의 아픔을 계속 복기하며 보냈던 괴로운 날들을 정리하고자 했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집으로 돌아와 남편의 흔적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포기라는 단어가 나를 아프게 했는지, 끝이라고 생각하니 허무함이 내 마음을 두드렸다. 나는 다시 들판으로 나갔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붉은 하늘은 회색에서 검정으로 바뀌고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달이 선명해지고 별이 보일 때까지 나는 걷고 뛰었다. 기다리는 사람,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같은 길을 돌고 돌았다. 하지만 예전 어느 날 하염없이 기다리던 그 사람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둘이 걷던 길에 혼자가 되어 또 걷는다. 눈물이 멈출 때를 기다렸지만 쉽게 그칠 눈물이 아니었다. 오늘 내 눈물을 담담하게 받아줄 사람을 찾았지만 없었다. 몇 시간 전 헤어진 동생에게조차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날도 나는 그렇게 잘 견뎠다.
그리고 이제는 방치해 왔던 내 마음과 건강을 챙기기 위해 매일 그 길을 걷고 뛰기 시작했다.
나는 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상대 쪽은 뺏겼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상대측에서 상고를 했다. 나는 과거도 미래도 다 포기했지만, 그들은 최소 과거는 다 챙겼다. 그런데도 나보다 억울한 모양이다.
딱 하루만 잠을 설쳤다. 이제 이 일에 대해 더 이상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 바위로 돌아가리라 다짐했다.
오늘도 나는 산책길을 따라 걷고, 때로는 뛰었다. 눈물로 가려졌던 시간과, 앞만 보고 뛰느라 보이지 않았던 주변 풍경과 사람들이 이제 보인다.
오늘 내가 본 풍경은, 내가 다시 서 있어도 괜찮다고 속삭여주었다. 내일도 이 풍경 속에서 잠시 쉬어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