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대사가, 어느새 우리 집 대화가 되었다.
딸과 마주 앉아 알밤을 까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나는 집 앞에서 주워 온 알밤을 까서 딸의 입에 넣어주고, 딸은 문제를 풀며 받아먹는다. 밤이 작아 까는 품은 큰데, 입에 들어가는 양은 적다. 그래도 맛있다며 날름날름 받아먹는다.
그렇게 받아먹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다는 친구도 있지만, 나는 손가락이 아프다. 나도 옆에서 까주는 사람이 있으면 입만 벌리고 받아먹고 싶다.
“은중과 상연?”
내가 좋아하는 김고은 배우가 주연이라는 이유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드라마 속 은중은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 남동생과 산다. 학교에서 가정환경 조사서를 쓸 때마다 가난하고 아빠가 없다는 사실을 적는 게 싫었다. 은중의 사정을 아는 담임 선생님은 은중에게 아빠의 빈자리를 스스로 채우면 된다고 설명한다.
선생님 : 선생님이 은중이한테 이 말을 꼭 해 주고 싶었어. 아빠가 안 계시거나, 엄마가 안 계시거나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는 건 슬픈 일이야. 그런데 선생님은 어릴 때 아빠가 안 계시는 게 창피했어. 혼자 있을 때는 안 그런데, 사람들하고 있으면 그랬던 것 같아.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생각해. 이게 은 중이 마음속에 있는 아빠 자리야. 아빠가 안 계시니까 지금은 텅 비어 있고 슬프겠지?
은중: 네
선생님: 하지만 이 자리를 무엇으로 채우는가는 자기한테 달려있는 거야. 만약에 은중이가 이 자리를 이렇게 좋은 걸로 가득 채운다면, 다 찼다. 이다음에 커서 '나는 아빠가 없어서 슬펐지만, 아빠의 자리를 이런 걸로 채웠고, 그래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거야. 그럼 하늘에 계신 아빠도 은중이를 무척 자랑스러워하시겠지? 슬프고 그런 날엔 일기를 써. 선생님에게 보여주는 그런 일기 말고, 진짜 은중이가 느낀 걸 쓰면 돼.
나는 드라마를 보다가 딸에게 물었다.
“너도 아빠 보고 싶지? 보고 싶어서 운 적 있어?”
“엄마는 저런 얘기만 나오면 꼭 묻더라.”
딸은 시선을 돌린 채 텔레비전만 바라봤다.
“4학년 때 샤워하면서 울었지.”
“갑자기 눈물이 났어?”
“몰라. 그냥 생각나서 그랬겠지. 지금은 괜찮아.”
나도 이유 없이 눈물이 터질 때가 있는데, 딸에게 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 내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너는 아빠 자리에 뭘 채울 거야?”
“꼭 채워야 해? 잘 모르겠는데.”
무심하게 말하는 딸의 입에 알밤을 넣어줬다. 오도독오도독 씹어 먹는 모습은 아직 아기 같다.
우리만 기억하는 딸의 어린 시절을 빼면, 딸이 기억하는 아빠와의 추억은 만 5년도 되지 못한다. 그 사실이 짠하지만, 아빠를 떠올리며 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아빠의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우든, 그 부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카톡 메시지를 받았다.
“곧 추석이네요. 근황은 글을 통해 알고 있어요. 마음이 허전하실 텐데 힘내시고 건강하세요. 아이들 용돈 보냈으니 전달 부탁드려요.”
카톡을 보는 순간 마음이 울컥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매번 같은 답장을 보냈다.
“매번 감사하게 받습니다. 아이들이 많아 작은 돈이 아니니 늘 고민되지만, 아빠 대신 주시는 사랑이라 생각하겠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그러자 답장이 왔다.
“네, 아빠 대신 주는 용돈이에요. 작은 돈이지만 아빠친구가 잊지 않고 챙겨주면 아이들에게 위로가 되리라 믿어요."
고맙다는 말 외에 더 특별한 표현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아이들이 이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기를 바랐다.
아빠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분들이 있기에,
우리 아이들은 여전히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