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과 콩나물 국밥

by 앞니맘



나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절에 다녔다. 할머니와 엄마는 매년 한두 번, 쌀과 초를 들고 절을 찾았다.

공양미를 올리고 촛불을 밝히며 가족의 안녕을 빌었다. 그것이 우리 집의 종교였다.
불자라기보다 토속신앙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나는 교회보다 절이 더 익숙한 아이로 자랐다.

그러나 내가 진심으로 불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건, 다름 아닌 콩나물국밥 한 그릇 때문이었다.


지방 대학 유아교육과를 졸업한 나는 서울의 유치원에 취직하겠다는 계획 하나로 무작정 상경했다.

친구 집에서 신세를 지며 면접을 보러 다녔다. 친구는 내 길잡이였고, 친구 언니는 옷과 구두를 빌려줬다.

“지연아, 잘 다녀와.”
친구 어머니의 따뜻한 밥과 응원은 불안한 마음에 힘이 되어주었다.

면접은 몇 군데 합격했지만, 문제는 ‘살 곳’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고향을 떠나는 걸 반대하셨다.
“계집애가 어디 겁도 없이 외지로 나가 산다고 난리야.”
“거기서 계집애 얘기가 왜 나와요?”

나와 아빠의 대화는 늘 평행선을 달렸다.


결국 허락 없이 나서려면, 기숙사가 있는 유치원을 찾아야 했다. 며칠을 헤맨 끝에 학교를 통해

숙식을 제공하는 유치원을 소개받았다.
첫 직장도, 두 번째 근무지도 모두 사찰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이었다.


내 첫 숙소는 수락산 자락의 비구니 사찰이었다. 대웅전 옆 작은 건물, 창호지가 발라진 미닫이문을 열면
판자 천장과 누런 벽지, 오래된 장작 냄새가 났다.
창문은 초등학교 교실처럼 빙글빙글 돌려 잠갔다.
시골 출신인 나조차도 낡다고 느낄 만큼 허름한 방이었지만, 공짜로 쉴 수 있는 내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이
그저 다행이었다.


아침이면 새소리에 눈을 떴다. 대웅전 왼쪽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 계곡물로 세수를 했다.
손바닥에 물을 담으면 물고기들이 후닥닥 도망쳤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 웃던 날들이 있었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그런 아침 풍경도 행복하게 즐길 수 있었다. 계곡에 물이 얼어붙었던 한 겨울을 빼고 아침 세안은 이곳에서 물고기들과 인사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아침 세안에는 비누나 클렌징을 사용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하지만 그곳은 나에게 현실에 대한 자각의 공간이기도 했다.


새벽 4시, 도량석 소리에 깼고, 한겨울엔 물 잔 속 물이 얼어붙었다.
쥐는 장롱 밑에서 나를 노려봤고, 나는 이불속에서 그를 노려보았다.
샤워를 하려면 대웅전을 지나 스님들과 공양주가 머무는 곳까지 내려가야 했다.
외로웠고, 가난했고, 때로는 현실이 서글펐다. 그럼에도 버텼다.

‘이런 곳에서도 사는데, 뭐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나는 단단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불자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않았다. 불교 부설 유치원에서 일하며
법회에 참여하고 찬불가를 부르면서도 내 마음은 어디에도 닿지 못했다.

그런 내게, 따뜻한 한 사람이 다가왔다.

“이 선생님, 뭐 해요?”
문을 두드리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승가대에서 돌아온 동화 스님이었다.


“그냥 있어요.”
“오늘 너무 추워요. 제 방은 보일러를 올려뒀으니 와요.”

“괜찮아요. 견딜 만해요.”
“같이 자는 게 싫으면, 몸이라도 녹이고 가요.”

스님 방에 들어서자 따뜻한 공기와 차 향기가 몸을 감쌌다.
그날 스님의 따뜻한 말투와 미소는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

그 뒤로도 스님은 종종 ‘앞방 이 선생’을 챙겼다.
그 배려 속에서, 내 마음이 불교에 닿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서울 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다. 퇴원 후 2주간 통원치료가 필요했다.
“언니, 퇴원하고 어떡하지?”
“걱정 마. 절에 허락받았어.”

하지만 문제는 퇴원 당일이었다.
목발도 짚지 못하는 동생을 택시에 태우기도 어려웠다. 부모님께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그때, 스님이 전화를 주셨다.
“이 선생님, 동생 퇴원할 때 누가 데리러 와요? 없으면 제가 데리러 갈게요. 차를 빌렸어요.”

그 한마디에 우리 자매는 막막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울었다.


그 후로도 스님은 의정부에서 서울 병원까지 몇 번이나 함께 오가셨다.

마지막 통원 치료가 끝난 날, 스님은 식당으로 우리를 데려가셨다.

“있는 동안 맛있는 것도 못 사줘서 미안해요. 여기 별건 없지만 맛있어요.”
“스님은 공부하시느라 더 가난하시잖아요. 오늘은 제가 살게요.”
“이 정도는 살 수 있어요. 다음에 부자 되면 비싼 걸로 사줘요.”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뚝배기가 놓였다. 송송 썬 대파와 노른자가 얹힌 콩나물국밥이었다.
따뜻한 국물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입안에 퍼지는 시원한 국물 맛 위에 창밖에 눈발이 하늘을 덮었던 그날, 나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콩나물국밥을 맛볼 수 있었다.


그 후로도 날씨가 춥거나 몸이 으슬으슬할 때면 황태 육수에 콩나물과 생굴을 넣고 국밥을 끓인다. 뚝배기도 구입해서 그럴싸하게 만들어 보지만 그날의 맛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의 마음은 자주 떠오른다.

나는 그 한 그릇의 국밥에서 ‘종교’라는 단어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되었다.


20년이 흘러, 나는 그 스님을 다시 찾았다.
“스님, 의정부 절에서 앞방에 살던 이 선생입니다.”
콩나물국밥을 대접받던 그날 보다 부자가 된 동생과 나는 울산으로 향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 따뜻한 마음은 여전히 내 안에서 끓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콩나물국밥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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