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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앞니맘 Jan 06. 2024

스님과 콩나물 국밥

 '모태 신앙'이라는 말을 불교에서는 잘 쓰지 않지만 그 의미를 깊이 들어가지 않고 단어로만 해석한다면 나는 모태신앙이 맞다.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절에 다녔으니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 할머니와 어머니의 믿음은 토속신앙에 가까웠다. 1년에 한두 번 절에 가서 바람을 비는 것을 불자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를 '모태 신앙'이라고 말하기에도 그 깊이가  와닿지 않는다. 어쨌거나는 교회보다 절에 가는 것이 익숙하게 태어났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불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콩나물국밥 한 그릇에서 시작되었다.     


고향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서울에 취직하기 위해서 면접을 보러 다녔다. 준비 없이 올라간 나를 위해서 서울에 사는 친구는 나와 체격이 비슷한 언니의 옷을 빌려 줬다. 신지 않던 구두까지 신고 구인광고지를 보면서 여기저기 면접을 보러 다녔다. 나의 로드 매니저를 자청한 친구 덕에 여러 곳에 면접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면접에 붙었어도 진짜 문제는 살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부모님은 내가 고향을 떠나서 취직하는 것을 반대하셨다. 가까운 병설 유치원에 취직하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나는 교육실습 때부터 서울에 취직을 염두에 두고 압구정에 있는 사립유치원에서 교생실습을 했다. 나는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을 부모님만 몰랐던 것이다.

"지지배가 어디 겁도 없이 외지에 나가서 산다고 난리야. 그럴 거면 진즉 학교를 서울로 갔어야지."

아버지는 딸을 외지로 혼자 보내는 것에 대해 딱 잘라 반대하셨다.   

"서울로 대학을 못 갔으니까 지금이라도 가려고 하는 거지. 뭐 서울로 가면 방 얻어 줄 돈은 있었나?"

방을 구해줄 경제적 여력이 없어서 반대를 한다는 것으로 나는 더 큰 비중을 두고 반박했다.


결국 내가 부모님의 허락 없이 고향을 떠나기 위해서는 기숙사가 있는 곳을 찾아야 했다. 서울에 있는 유치원을 며칠 다녀 본 결과 기숙사를 제공해 주는 곳 구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서울근교에서 찾기 시작했다. 선배의 소개로 기숙사를 제공해 주는 유치원을 찾아서 취직을 했다. 첫 번째 근무지와 두 번째 근무지 모두 기숙사를 제공했고 두 곳 다 사찰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이었다.


나의 숙식을 해결해 준 곳은 수락산 자락에 위치한 비구니스님(여자스님) 사찰이었다. 가방 하나가 이삿짐의 전부였던 내가 안내받은 곳은 대웅전 옆에 있는 작은 건물이었다. 마루를 밟고 올라서서 창호지가 발라진 미닫이 문을 열고 허름한 방 안으로 들어갔다. 70년대 드라마 속에  나오는 판잣집 같았다. 시골에 살았지만 그렇게 낡은 방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나는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허름해도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서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아침이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과 새소리에 눈을 떴다. 수건을 목에 걸고 작은 마루로 나와서 피톤치드를 맘껏 흡입하면서 기지개를 켰다. 대웅전 왼쪽 오솔길을 따라 계곡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졸졸졸 흐르는 물에 양손을 담가서 물을 모아 올리면 물속에 있던 물고기들이 후닥닥 도망가는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시골에서 자란 나로서는 그런 아침 풍경도 행복하게 즐길 수 있었다. 계곡에 이 얼어붙었던 한 겨울을 빼고 아침 세안은 이곳에서 물고기들과 인사하는 것으로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나는 아침 세안에는 비누나 클렌징을 사용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하지만 그곳은 나에게 현실에 대한 자각의 공간이기도 했다.


새벽 4시에 시작하는 도량석 목탁소리에 눈을 떠서 한 동안 '일어나야 할까? 말까?' 고민을 해야 했고  한 겨울에 내 방의 온도는 물 잔에 남겨진 물이 땡땡하게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쥐들과의 동거는 필연적으로 이루어졌다. 쥐는 장롱 밑에서 나를 바라보고 나는 이불속에서  쥐를 노려 보면서 눈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샤워를 하기 위해서는 대웅전을 지나서 스님들과 공양주가 사는 곳까지 한참을 내려가서 씻어야 했다. 사찰 속에 나는 이방인이었고 가난한 내 신세를 한탄했던 적도 많았다. 무서웠고 외로웠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도 사는데 내가 뭐는 못하겠어.'그곳에서 나는 더 단단해졌다. 그때는 내가 처한 상황에만 집중하느라 그곳을 떠날 때까지도 감사하다는 생각을 못했다. 나 때문에 사찰 조경 공사를 미루고 있었다는 것을 그곳을 떠나고 한 참 후에  알게 되었다. 내 처지를 배려해서 공사도 미루고 보호자로 함께 해주신 주지스님께 뒤늦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불자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다. 불교 부설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절에서 스님들과 지내고 있었지만 사실 내 마음은 무교였다. 법회에 참여하고 법문을 듣고 찬불가를 부르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어디에도 닿지 못했던 것이다. 아직 어려서라고도 생각했고 불교가 어려워서라고도 생각했다.


"이선생님, 뭐해요."

이불 속에 들어가서 일기를 쓰고 있는데 창호지 문을 두드리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있어요."

문을 열면서 대답했다. 겨울방학을 해서 승가대학교 기숙사에서 본 사찰로 돌아온  동화스님 이셨다.

"오늘 날씨가 너무 추워서 보일러가 돌아도 선생님방은 냉방 일 텐데 내 방에 와요."

"괜찮아요. 견딜만해요."

입김이 나오는 것도 모르고 거절을 했다.

"같이 자는 것이 싫으면 몸이라도 따뜻하게 하고 와서 자요. 보일러 더 올려 달라고 했으니까 조금 지나면 방이 좀 따뜻해질 거예요."

스님의 말씀에 나는 스님방에 잠시 있다가 돌아왔다. 따뜻한 차도 한 잔 마셨고 '서로가 궁금한 얘기를 나눴다.'는 기억 외에 이야기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스님의 따뜻했던 마음만 남아있다. 그 뒤로도 스님은 '이선생님, 뭐해요?' 부르면서 나를 챙겨 주셨다. 스님의 그 배려와 따뜻한 음성에 내 마음이 닿고 있었다.


동생이 서울 병원에서 수술을 하게 되었다. 퇴원을 하고도 2주 이상 통원치료가 필요했기 때문에 내가 사는 곳으로 와서 지내야 했다.

"언니 퇴원하고 어떡하지?"

퇴원을 앞두고 동생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절에 허락받았으니까 걱정 말고 있어. "

무슨 큰 묘수라도 있는 것처럼 동생에게 말했지만 내가 사는 불편한 집으로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퇴원하는 날이 문제였다. 목발을 짚을 수도 없는 상태에서 택시를 타는 것도 무리였기 때문이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두 자매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고 그날 우리는 한계에 부딪혔다.


"이선생님, 내일 동생 퇴원 할 때 누가 데려다줘요? 없으면 내가 데리러 갈게요. 차를 아는 분께 빌렸어요. 몇 시에 퇴원 인지 알려 줘요."

이 소식을 전하는 동화스님의 목소리는 기쁨으로 가득했다. 그 목소리는 우리 자매울리기에 충분했다.


의정부에서 고대병원까지, 고대병원에서 의정부까지 몇 차례의 도움을 받고 마지막날이 되었다. 병원 마지막 진료를 마치고 스님은 우리를 식당으로 데리고 가셨다.

"있는 동안 맛있는 것도 못 사주고 미안해요. 여기 별거 아니지만 맛있어요."

"스님은 공부하시느라 저보다도 가난하시잖아요. 오늘은 제가 살게요."

미안한 마음에 스님의 주머니 사정을 아는 척했다.   

"이 정도는 살 수 있어요. 가격이 아주 싸요. 다음에 부자 되면 비싼 걸로 사줘요."

보글보글 끓고 있는 뚝배기가 우리 앞에 놓였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국물 위에 송송 썬 대파와 엄마닭이 '꼬끼오~'하고 계란의 탄생을 알리기도 전에 꺼내 온 듯한 탱글한 계란 노른자가 올려진 콩나물 국밥이 우리를 보고 인사했다. 따뜻한 국물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입안에 퍼지는 시원한 국물맛 위에 창밖에 눈발이 하늘을 덮었던 그날,  나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콩나물 국밥'을 맛볼 수 있었다.


그 뒤로 나는 날씨가 춥거나 몸이 으스스한 날에는 황태 대가리로 육수를 만들고 황태 살과 생굴을 잔뜩 넣은  콩나물 국밥을 해 먹는다. 뚝배기도 구입해서 그럴싸하게 만들어 보지만 그날에 느낀 그 맛을 낼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닿지 않았던 불자라는 마음을 닫게 해 줬고  동화스님의  따뜻했던  배려와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것은 분명하다. 나라는 중생을 생각하던 그 마음이 종교라고 믿게 된 것이다.


"스님 안녕하세요. 의정부 절에서 끝방에 살던 이선생입니다."

콩나물 국밥과 함께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했던 스님을 20년이 지난 후에야 찾을 수 있었다. 콩나물 국밥을 대접받던 그날 보다 부자가 된 동생과 나는 스님을 만나러  울산에 다녀왔다.

나는 누군가에게
콩나물국밥이었던 적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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