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명심해라. 여자들끼리 연애 상담하면 연애 고자가 탄생한다.
내가 어렸을 때 한창 논스톱이라는 시트콤이 유행했다. 그리고 티비를 보면서 어린 나는 항상 꿈꿨다.
자유로운 대학생활을. 그리고 청춘을. 그래서 마냥 순수했던 나는 20살이 되면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를 가듯 대학교도 그렇게 쉽게 결정해서 가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내가 본 논스톱 시트콤 속 대학생들은 아무 걱정거리 없는 쾌활한 청춘들 같아 보였는데 고3 입시생의 시선이 되어보니 대학생을 지칭하는 표현에는 청춘보다 취준생이란 표현이 더 어울렸다. 고등학교까지는 부모님의 품 안에 있는 어린아이였다면 대학생은 달랐다.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해야 하는 시기였고 대박이 날 주식 종목을 고르는 것처럼 내 성적으로 갈 수 있는 학과 중에서 가장 취직이 잘 되는 과를 예측해서 골라야만 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공부하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학교 설명회를 들으면 어느 과가 가장 취직이 잘 되는지 이 과를 졸업하고 어떤 직장에 취직할 수 있는지 취업률은 어느 정도 되는지가 가장 중점적인 홍보 문구였다. 그 결과 나는 가장 무난하고 가장 취업 걱정이 적은 학과에 입학했고 또한 여자들이 가장 많은 학과를 선택했다.
입학해 보니 정말 여자들이 많았다. 혹시 '퀸카로 살아남는 법'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남자들은 잘 모르겠지만 10대, 20대 여자들의 세계는 원시 부족과도 같다. 족장이 부족을 만들면 그 부족의 무리에 끼는 것이 여자들끼리 생존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여자들은 놀랍게도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모여도 1시간이면 무리를 만들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나 또한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어렸을 때부터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빨랐던지라 심성이 착한 친구들 무리를 찾아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우리는 총 6명이었다. 성격도 생김새도 가지각색이라 늘 중구난방이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인원
6명,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기엔 너무 다양한 색깔의 여자들이 모여있었다. 그래서 이 중에서도 삼삼오오 또 다른 부족을 이루어 뭉쳐 다녔다. 그러나 중구난방인 각자 개성 뚜렷한 우리도 유일하게 똘똘 뭉치는 주제가 있었다. 바로 '연애 상담'
" 야! 000이 일촌 신청을 했다고?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너 지금부터 중요하다? 먼저 일촌을 걸었지?
근데 지금부터 얼마나 밀고 당기기를 잘하냐에 따라서 너네가 사귈지 안 사귈지 결정이 나는 거야!
간만 보고 안 사귀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 - 여자 A (연애 경험 없음)
"일촌 신청은 그냥 예의상 한 거 아니야? 별 의미 없을 거 같은데?" - 여자 B (남의 연애사에 관심 없음)
"야 일단 일주일은 일촌 신청받지 마! 덥석 좋다고 쪽지 보내면 너가 남자 없는 거 너무 티 나잖아!
안 그래?" - 여자 C (속 뒤집는 재능이 탁월함)
"너 개랑 잘되면 우리 과팅 하는 거 맞지?" - 여자 D (잿밥에 관심이 많음)
나머지 둘은 방청객 소질이 있는 여자들이라 밀당을 해야 한다는 친구들의 의견에 격하게 동조하며 손뼉을 쳤다. 그렇게 밤새 기도하며 모든 신들의 도움을 받아 하늘의 응답을 얻었건만 어리석었던 나는 기필코 이 남자와 인연을 만들어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친구들의 연애 상담 조언을 마음 깊이 새겨들었고 여자 부족원들의 만장일치에 따라 내 첫사랑 도련님의 일촌 신청을 일주일 꼬박 채우고 승낙했다. 그리고 반가웠으나 반갑지 않은 척 마음이 있으나 최대한 마음이 없는 척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쪽지를 보냈다.
"반갑다! 일촌 신청해서 깜짝 놀랐어. 잘 지내지? 나 요즘 토익학원 다니느라 바빠서 일촌 신청한 줄도 몰랐네
늦게 수락해서 미안ㅠ"
그리고 쪽지가 도착했다.
"혹시 토익학원 어디 다녀? 나도 마침 등록하려고 했는데 같이 다닐래?"
'.................................!!!!!'
요즘 친구들은 모르겠지만 우리 때는 말이야, 토익학원 같이 다니자? 이건 최고의 플러팅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