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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트레인지타임 Jun 16. 2021

런던의 지하철 2

'대니 보일(Danny Boyle)' 감독이 연출한 'Trainspotting'(트레인스포팅)이라는 영화가 있다. 마약과 범죄에 저당 잡힌 인생을 사는 스코틀랜드 청춘상을 잘 그려낸다.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와 알맞은 화면 구도 그리고 브릿팝 전성기 시대의 명곡들이 결합되어 명화의 반열에 오른, 한 번쯤 꼭 볼만한 영화다. 영어 단어 'Trainspotting'의 뜻은 이러하다. "being obsessed with any one trivial topic". '어느 한 가지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뜻이다. 영화에서는 이완 맥그리거가 연기한 주인공과 친구들이 마약에 집착하지만, 이 단어는 기차가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 '신기한' 기차를 하루 종일 주구장창 보는 취미를 뜻한 데서 유래했다. 


영화 못지 않게 Soundtrack이 좋다.


하나의 장소에는 대개 그 장소를 거쳐가는 사람과 그 장소에 머무는 사람이 있다. 나에게 지하철이란 나의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이어주는, 거쳐가는 장소였지만 옛날에 'Trainspotting'을 하던 사람과 같이 또 누군가에게는 머무는 목적지였다. 지하철을 관리하는 지하철 직원은 말할 것도 없고, 역 앞에서 "이브닝 스탠더드~"를 외치며 무료 신문을 나눠주는 사람과, 지하의 필연성인 침울함을 음악으로 달래주는 버스킹 연주자가 그러한 사람들이다. 그중에는 노숙자와 전문 구걸꾼도 있다. 


런던의 노숙자(Homeless) 수는 만 명이 넘으며, 어느 지하철 역이든 노숙자가 그 자리를 틀고 있다. 그들은 계속 한 자리에만 있는 게 아니어서, 사람들은 그들의 빈자리를 보며 우스갯소리로 "구걸해서 산 펜트하우스에서 케밥을 뜯고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말을 한다. 정확한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럴 가능성은 낮다. 나의 관찰 결과, 그들은 사람의 통행이 제일 많은 역에서 '일'을 하고 늦은 저녁이면 노숙하기 좋은 장소로 가 잠을 청한다. 그들에게 돈을 기부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뿐더러 그들이 "Change please(잔돈 부탁해요)"라고 말하듯, 사람들은 정말 몇 센트에 지나지 않는 푼 돈만을 내놓는다. 현지인들은 일절 기부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관광객들이 딱한 마음을 여겨 지폐를 주기도 한다. 하나, 노숙자들은 어디에나 있기에 관광객들이, 보이는 노숙자마다 돈을 주어 자신들의 여행경비를 다 털어버리고 무소유의 경지를 갑자기 실현하지 않는 이상, 노숙자들에게 지폐란 천운에 가깝다. 더군다나 가혹한 런던의 생존 환경을 고려할 때, 그만큼 많은 노숙자들이 양산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해서 그들이 사기를 치고 있다는 가정은 신빙성이 없다.

 

해치지 않는다. 대개 선한 사람들이다.


이에 반해, 런던에서의 첫 아침에 내가 만난 그녀와 같은 전문 구걸꾼들은 전형적인 사기꾼이다. 그들은 보통 멀쩡한 차림새로 멀쩡한 사람 행세를 한다. 연기는 정말 일품이다, '불행하게도 돈을 잃어버려 민망함을 무릅쓰고 교통비를 동냥하는 순진한 일반인' 역할을 할 배우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 영화감독이라면 당장 런던으로 가길 추천한다. 연기 실력은 물론이고 출연료도 저렴하기 때문이다. 작가에게도 추천한다. 그들이 "돈을 빌려달라"라는 결말에 도달하기까지 펼치는 서사 전개는 치밀하고 논리적이다. 그들은 주로 관광객이나 순진해 보이는 사람을 겨냥한다. 이 물정 모르는 사람들은 측은지심을 느껴 돈을 선뜻 내놓기도 한다. 내가 그랬었다. 순진하진 않지만 순진하게 살려 노력하는 나도 그들의 표적이 되었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 또한 그들의 '능력'에 추가해야겠다.


대학교 2학년 때였던가, 사람이 매우 붐비는 Shepherd's Bush 역이었다. 역 입구에서 어느 한 사람이 나에게 조심히 다가왔다. 그것도 아주 민망스럽고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그는 갈색 피부의 곱슬머리 젊은 청년이었는데, 하얀 셔츠를 입고 목에는 헤드폰을 걸고 있었다.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젊은 대학생의 모습이었다. 


"Excuse me mr"


아주 공손하게, 날 미스터라 불렀다, "Hey man", Hey bro"도 아닌 아주 격식 있는 호칭을 사용했다. 그러더니 자신이 '이 상황이 굉장히 쪽팔리고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한데, 나도 이런 적이 처음이라 정말 당황스럽지만, 지갑을 잃어버려 여기까지 걸어왔는데 더 이상 걸으면 알바에 늦을 것 같아서, 이번에 지각하면 짤릴 수도 있다고, 그래서 빨리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해서


"Could you lend me 5 pounds please?"(5 파운드만 빌려주실래요?)


그리고 나의 번호도 달란다. 이 은혜 잊지 않겠다며 꼭 돈을 갚겠다면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자신은 노숙자도 아니며 사기꾼도 아니란다. 나는 눈곱만큼의 의심도 하지 않고 그에게 


"It sounds like a bloody bad day to you"(진짜 재수 없는 날이네요)


라며 그를 위로하는 것도 모자라 돈을 안 갚아도 된다며 5파운드를 건넨다. 그 당시 나는 알바를 하며 아주 쪼들리는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서 더 그에게 공감과 연민을 느낀 듯하다.


누군가를 도왔다는 뿌듯한 마음은 다음 날에 와장창 깨져버렸다. 이 어리석은 놈이 다음 날에도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레퍼토리로 나에게 접근하는 게 아닌가. 옷도 갈아입고 대본도 좀 바꾸면 뭐가 덧나나. 그가 아주 '우직한' 사람인 걸 깨달은 나는 그에게 대꾸도 않고 지나갔다. 내가 그들 눈에는 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아시안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 해도, 그는 "기억력이 좋지 않은 사람은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음이 확실하다. 


나는 나의 동정심이 이용당했다는 사실에 무척 분노했다. 아니 분노라기보다는 무언가 되게 굴욕적이어서 하루 종일 기분이 찝찝하고 불편했다. 나는 콜라 사고 남은 잔 돈을 간혹 노숙자에게 주기도 했기에, '노숙자의 경우와 별반 다를 것도 없지 않겠느냐',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렇게까지 할까'라며 피해사실을 합리화하려 했지만 별 소용없었다.


지하철에 기생하는 '전문 구걸꾼'과 '노숙자'는 사람의 동정심을 이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공리주의를 제창한 '벤담(Jeremy Bentham)'은 노숙자들을 빈민 수용소에 강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제 수용된 노숙자가 갖는 고통보다 그들이 사라진 거리를 보며 느끼는 대중들의 행복감이 더 크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그는 선한 일반 시민이 느끼는 동정심을 불쾌감이라는 고통의 한 종류로 보았기에 가능한 주장이었다. 물론 나는 이러한 주장에 반대한다. 노숙자들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 보장을 차치하더라도 나는 동정심을 고통이라 보지 않는다. 인간으로서의 인지상정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동정심을 고통이라 치부한다면 인간 세상은 지옥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UCL(University College London)에 보관된 벤담


하지만 지금 어느 대학교에 보관되어 있는 벤담이 만약 부활해, 강제수용소로 노숙자들을 잡아들이려 한다면 난 반대하겠지만, 전문 구걸꾼들을 잡아가려 한다면 난 굳이 반대하지 않겠다. 이 두 부류의 '동정심 착취자'들에게는 엄연한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위선의 유무다. 전문 구걸꾼은 위선적이지만 노숙자는 적어도 진실성이 있다. 노숙자는 '자신이 누울 집이 없을 정도로 가난하다'라는 사실을 포장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다. 그러나 전문 구걸꾼들은 두 발 뻗고 잘 집이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가난하다는 사실을 교묘히 가리고 '착한 사람'인 척을 한다. 이러한 위선적인 사기 행태는 피해자에게 분노를 넘어선 배신감을 불러온다. 누군가가 부탁을 한다면, 사람은 일말의 의심이란 걸 한다. 이 일말의 의심을 가져야만 나중에 자신의 의심이 맞았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가해자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원망할 수 있다. '아 알고 있었는데!'라며 말이다.


위선(Hypocrisis): 겉으로만 착한 체함, 또는 그런 짓이나 일.


이에 반해, 착하다고 믿었던 사람에게 당했다면 그 원망은 오로지 가해자에게 향한다. 더군다나, 선(善, goodness)이라는 인류의 가치는 이루기도 힘들뿐더러 이뤄냈다 하더라도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유지하기가 더 어려운, '절대가치'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가치의 수호자인 착한 사람을 좋아하고 "착하게 살아라"라는 말을 한다. 근데 전문 구걸꾼과 같은 위선자는 선이라는 절대가치를 훼손하는 것도 모자라 그걸 이용하여 이득을 취한다. 그리고 진실이 발각되었을 땐, 사람들이 착한 사람인 줄 알고 주었던 엄청난 믿음과 존경에 비례하는 비난과 혐오를 부메랑처럼 돌려받는다. 어금니 아빠 '이영학'이 그랬고 내로남불이란 말을 유행시킨 현 정부 여당도 같은 경우다. 


런던의 언더그라운드에는 전문 구걸꾼뿐만 아니라 다양한 범죄자들이 존재한다. Pickpocket(소매치기범)과 Racist(인종차별주의자)에서부터 Murderer(살인자)와 Robber(강도)와 같은 사건도 간혹 발생한다. 뭐 그들에 비하면 Professional beggars(전문 구걸꾼)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볼 수도 있지만, 만약 자신의 마음이 유리잔 같아서 마상(마음의 상처)에 매우 취약하다면 전문 구걸꾼들을 꼭 주의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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