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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트레인지타임 Jun 11. 2021

런던의 지하철(1)

이 세상에는 몇 가지의 '탈 것'이 있다. 인간의 두 발로 가기 힘든 곳을 우리는 탈 것의 힘을 빌려 좀 더 쉽고 빠르게 간다. 하나, 우리 모두가 그것을 다 경험하고 누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재산, 사회 계급과 지위, 신체적 능력, 사회 기반시설 등의 다름에 따라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은 제한된다. 재산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비행기를 탈 확률이 훨씬 높으며,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는 사람은 흔하디 흔한 버스 조차 자신의 교통수단으로 삼기 어렵다. 또 누군가는 아예 탈 것을 타지 못 해서 온전히 두 발로만 수십 킬로를 이동하기도 한다.


나는 운이 좋게도 현대 대부분의 교통수단을 경험할 기회가 있었다. 지하철을 제외하곤 말이다(물론 우주선도 제외하고). 내가 나고자란 지역의 교통수단이란 자동차와 버스가 전부였다. 평화로운 '지상낙원'에서만 운신했지, 바쁘고 미어터진 사회가 마련해야 하는 '지하세계'를 내달리는 지하철은 내 발 밑엔 없었다. 처음으로 지하를 통해 이동해 본 적은 19살 때였다. 고삼 때 학교를 째고 가수 '스팅'의 내한공연을 보러, 홀로 상경해 타 본 지하철이 내 첫 경험이었다. 그 뒤로도 지하철 탈 일이 없었고 나는 지하철에 문외한으로 남아있었다. 본격적으로 그것이 나의 탈 것이 된 때는 서울만큼 미어터지는 런던에서 학교를 다닐 때였다.


영국에서는 지하철을 Subway(미국식)가 아니라 Underground(지하) 또는 Tube라고 부른다.


첫 수업 전 날 밤, 지하철을 무서워 한 나 자신을 기억한다. 기숙사에서 학교까지 세 정거장만 가면 되었지만, '지하철 타는 법'을 충분히 예행연습해보지 못한 나에게 런던의 지하철이라니... 걱정이 앞서 'How to use  London underground'로 구글 검색도 해보고 머릿속으로 지하철 타는 이미지 트레이닝도 해보았다. 세계에서 지하철 짬밥을 제일 오래 먹은 사람들이 런던 사람들이다. 자칫 개찰구 앞에서 어리바리해버려 그들의 눈길을 받기도 싫었고 그래서 누군가 내가 초보자인걸 눈치채고 도움의 손길을 뻗는 것은 영어 울렁증이 도진 나에게 오히려 최악의 경우였다. 게다가 첫 관문을 무사히 통과한다 하여도 그 밑 어두운 '지하세계'에서 길을 잃진 않을지, 범죄의 표적이 되진 않을지, 실수로 반대편행 열차에 탑승하진 않을지 같은 온갖 걱정이 나를 옭아맸다. 지하철 타는 것은 단지 학교에 도착하기 위한 행위 이상으로, 이제 막 시작한 캄캄한 내 유학생활의 문턱을 넘어서기 위한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Caledonian Road Station:  딱 봐도 1906년에 개통됐다. 

다음 날 아침, 기숙사 밖으로 발을 내딛는다. 많은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걷는다. 그 방향은 나의 방향이기도 했기에 인파에 자연스레 내 몸을 섞는다. 전 날 누군가에게 이 지역에 교도소가 있단 말을 들은 나는, 두리번거리며 교도소를 찾아보는 동시에 내 앞뒤에 있는 사람이 재소자는 아닐까라는 걱정을 하며 걷는다. 나와 그들이 '무사히' 도착한 곳은 지하철역 'Caledonian Road Station', 우리는 우연히 같은 방향을 걷는 게 아니라 목적지가 같았다. 


역 건물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춰 응시한다. 1906년에 지어진 역 건물을 보며 그것의 새로움과 신기함에 도취된 나에게 걱정 따윈 사라진 지 오래다. 전 날 잠시 본, 땅거미 진 지하철 입구는 나를 삼키려 드는 어둠의 아가리 같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저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것이 시작이라는 환희와 희열에 휩싸여 나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는다. 여차하면 학교를 땡땡이치고 King's Cross역에 있는 9와 4분의 3 플랫폼에서 호그와트행 열차나 타버릴까 고민 중이다. 걱정과 두려움에 지배당했던 어제의 내가 참 한심하게 느껴진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라는 말을 더욱더 실천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제 시작이다!'


기쁜 마음으로 출정식을 시작하려는 그때, 누군가가 갑자기 내 앞길을 막는다. 멀쩡한 차림새의 중년 백인 여성이다. 그녀는 두 손을 모아 나에게 들이대며 아주 공손하게 말을 건다.


"죄송하지만, 돈이 부족해 지하철을 못 타고 있는데 동전 남는 것 좀 줄래요?"


그녀의 안타까운 처지가 딱하기도 딱하지만 나만의 중요한 의례를 망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호주머니에 있던 동전 몇 푼을 꺼내 건넨다. 그녀는 연신 감사하다고 한다. 그러니 어쩐지 내가 더 감사한 마음이 드는 건 왠지 모르겠다. 어찌 됐건 그녀가 구걸하던 이동의 자유를 얻었으니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곳이 어딜까라고 생각하며 뒤를 돌아 그녀를 다시 본다. 아니 웬걸, 그녀는 여전히 교통비를 구걸하고 있고 많은 사람이 그녀를 본 체도 않고 지나간다. 난 이 익숙지 않은 풍경에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이 두 가지 부류의 사람 모두가 잘못됐을 리는 없다. 그녀가 잘못되었거나 아니면 '비정한' 런던 사람들이 정말로 비정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끔찍하다.

무사히 지하세계에 도달한 나는 플랫폼에 서있다. 그곳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Tube(튜브)를 통과한 Train(전동차)이 플랫폼에 도착한다. 그 안에도 이미 사람들로 꽉 차있다. '입추의 여지가 없다'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정말 저 안에는 송곳을 세울 공간도, 숨을 쉴 공기도 없어 보인다. 그러한 공간에 "Excuse me"라며 꾸역꾸역 몸을 간신히 끼워 넣는 '비정한' 런더너(Londoner)들을 본다. 안 닫힐 것 같은 문이 아슬아슬하게 닫히고, 문에 밀착한 사람의 코트 끝자락이 미처 탑승하지 못한 채 밖으로 빠져나와있다. 나의 처지 같은 그 끝자락을 보며 아까의 그녀와 런더너들을 생각한다. 제발 그녀가 틀리길 바란다고, 아니면 런더너들은 진실로 비정한 사람들이 되기에 그들과 같이 살아갈 자신이 없다고. 이 궁금증을 해소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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