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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트레인지타임 Jul 18. 2021

흑인들

'마이크'였던가. 이름도 이제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갈 만큼, 그를 만난 건 오래 전의 일이다. 매끈한 검은 피부는 반듯반듯했고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눈과 알맞은 크기로 솟아나 있는 코와 입술은 그를 귀여운 엠엔엠즈 캐릭터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내가 다닌 어학원에서 영국 풋내기들을 위한 이벤트를 계획하고 집행하는 일을 맡았다. 심한 영어 버퍼링이 걸린 학생들의 말을 어린아이의 이야기를 듣는 마냥 다정하고 서글서글한 웃음으로 맞이했다. 학생들이 겪는 각종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심각한 문제까지 자기 일처럼 신경 쓰고 화를 내었다. 


공허한 웃음이 아닌 충실한 웃음을 가진 그는 내가 처음 만난 참 사람 좋은 흑인이었다.


어학원의 날들을 다섯 손가락만으로도 셀 수 있을 만큼 지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친구들과 다 같이 펍을 체험하고 다들 기분 좋게 취한 상태였다. 우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거리에 있던 캡(택시)을 잡으려 했다. 친구 중 한 명이 택시 문을 열려 손잡이로 손을 뻗는 순간, 검은 피부의 손이 훅 들어와 황색 피부의 손을 쳐냈다. 젓가락처럼 길쭉한 몸매에 빼빼 마른 흑인이었다. 그는 실실 웃어대며 'It's our cab, we got this one already". 그러더니 "there is no cap for Asian, go away yellow"라고 했던가. 그의 말에는 인종차별이 짙게 묻어있었다. 같은 옐로에 속했던 친구 중 한 명은 발끈해 그와 싸우려 했지만, 가슴 깊은 곳에 가라앉아있는 말의 배출구가 막힌 채 화를 삭이고 있었다. 그녀는 씩씩거리며 나를 보고 억지웃음으로 말했다. 


"어디서 흑인 따위가 인종차별을 하는 거지?, 지가 백인도 아니고 참, 흑인이 말이야"


비열한 웃음을 지닌 그는 내가 두 번째로 만난 참 나쁜 흑인이었다.


열 손가락으로는 셀 수 없는 날들을 보낸 후였다. 아프리카의 한 국가에서 국가 장학생으로 뽑힌 한 무리의 흑인들이 입학했다.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웃어댔다. 떨어지는 낙엽에도 까르르 웃어 대는 소녀 마냥 사소한 것에도 꺌꺌 댔다.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그들은 항상 웃음을 그들의 얼굴에 장착하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은 다 달랐다. 조용하고 소심한 웃음도 있었고, 부끄럽고 숫기 없는 웃음도 있었다. 활기차고 열정적인 웃음만 있는 건 아니었다. 


사소한 행복에도 감사할 줄 아는 웃음을 가진 그들은 내가 세 번째로 만난 각기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었다.


유학을 다녀오기 전, 나는 영상 속의 흑인만이 전부의 흑인인 줄 알았다. LA 폭동의 무서운 흑인들, 영화 속 기고만장하고 긍정의 극치를 달렸던 흑인들, 옛날 노예제 속에 억압을 벗어나려 폭력적이었던 흑인들, 신체적 재능을 타고난 건장한 흑인들. 그래서 사실 사람의 피부색이 짙으면 짙을수록 상대를 향한 내 경계심과 두려움 또한 짙어지곤 했다. 그러나 항상 내 예측을 빗나갔던 그들은 내가 더 이상 그들을 예측하지 못하도록 했다. 피부색의 잣대는 참 부질없었다. 이 부질없음은 예측이란 행위 자체를 피곤하고 소모적인 짓에 불과하도록 만들었다.


예측을 서서히 귀찮아하던 나는 런던의 길거리를 걷고 있다. 좀 외곽에 자리 잡은 길거리라 그런지, 이른 저녁인데도 사람의 존재가 희미하다. 한 백 미터쯤 앞인가, 젊은 흑인 청년 두 명이 어슬렁거리고 있다. 근데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 둘이서 나의 눈치를 본다. 그들과 시선이 닿을 때면 내 눈을 피하며 그 둘만의 꿍꿍이를 나누고 있다. 나를 향한 모종의 모의를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나는 그들을 예측하지 않기로 한다. 그냥 나의 길을 걷기로 한다. 어깨를 활짝 펴고 마침 피고 싶었기에 담뱃잎 뭉치와 종이, 필터를 꺼낸다. 담배를 마는 실력이 부쩍 늘어난 나는 걸으면서도 순식간에 담배를 말아 불을 붙인다. 한 모금 들이키는 순간, 나와 그들의 거리는 불과 몇 걸음에 불과하다. 나는 그들을 빤히 쳐다보며 내 입에 머금던 담배연기를 내뿜는다. 연기로 인해 내 시야에서 흐려진 그들은 내게 다가오려다 웬일인지 내 시선을 피하며 뒤로 물러선다. 


현재의 나도 그때의 두 흑인 청년이 나에게 무엇을 하려 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이 나에게 행하려 했던 짓을 갑작스럽게 멈춘 이유는 내가 그들을 예측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내가 만약 그들이 나에게 해를 가하려 한다라고 단정했다면, 두려움으로 인해 부자연스럽고 어설픈 나의 행동거지를 본 그들은 서슴없이 나에게 그들의 계획을 실행했을 테다. 하지만 이 또한 확실치 않다. 그들은 그저 나에게 길을 물으려 했거나, 심심해서 말을 걸려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예측은 대상의 상태뿐만 아니라 주체의 상태까지도 제한한다. 깜둥이, 흑형, Nigger와 같은 인종차별 용어는 대상인 흑인과 차별의 주체인 비흑인 모두 다 차별한다. 예측에 포함되지 않은 가능성들은 배제되어 예측자의 가능성마저 차별한다.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셈이다. 즉 자해와 다를 바가 없다. 


영국에서 만난 친구들과 제삼자에 관한 이야기 할 때 그들의 궁금증은 대개 제삼자의 성별에까지만 뻗쳤다. 보통 성격에 대한 질문을 많이 했다. 반대로 나를 포함한 한국인과 아시아인들은 제삼자의 성별을 넘어 나이, 인종, 국적까지도 궁금해했다. 우리는 남을 이해하기보다는 규정하기 바쁜 듯하다. 누군가를 틀에 맞춰 규정하면 그 틀에 나 자신도 갇힐 수밖에 없다.


나에게 이러한 가르침을 준 영국은 지금 인종차별 문제로 시끌하다. 유로 결승전 승부차기에서 실축한 영국 흑인 선수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하는 영국인들이 있다. 분명 지극히 소수겠지만, "실망이 참 크다 영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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