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의 밀도
특별한 용건도 없이
카톡 프사에
하트 하나가 달린다.
아주 오랜만에 보인
그의 반응이었다.
반가움보다는
이상한 예감이 먼저 들었다.
어디서
나의 사정을 들었는지,
연민이 먼저 반응한 모양이었다.
그때는
아직 알지 못했다.
왜 그런 작은 표시 하나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지.
이런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잘 지내고 있을 땐
존재감이 없다가,
삶이 기울어졌다는 이야기가 돌면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의 관심은
사람이 아니라
상황에 머문다.
“괜찮아?”
“많이 힘들다며.”
“그래도 네가 버텨야지.”
말은 따뜻한데
이상하게
나는 점점 작아진다.
그 순간엔
왜 그런지 몰랐다.
기분 탓이라고 넘기기엔
마음 한쪽이
자꾸 움츠러들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야
그 말들이
나를 어디에 세워 두었는지
보이기 시작한다.
동정에는
설명도 없고,
해결도 없고,
실질적인 도움도 없다.
대신
연민만 있다.
그리고 그 연민은
나를 향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들이 느끼고 싶은
자기감정에 더 가깝다.
당사자의 동의 없이
사정을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믿는다.
힘든 이야기를 대신 꺼내주면
고통을 나눈 것이고,
말로 전해주면
조금은 덜어낸 거라고.
하지만
그 말들은
대부분
정작 힘든 사람에게는
닿지 않는다.
인간은 원래
남의 인생에는 무심하다가도,
남의 슬픔과 고통에는
지나치게 오래 머문다.
그 이야기를 나눴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스스로를 이렇게 설득한다.
‘나는 너를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야.’
‘나는 걱정해 주는 사람이야.’
그 연민 속에서
자기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합리화한다.
그래서
이 태도는 더 서늘하다.
힘들던 사람이
시간이 지나 잘 되기라도 하면
그 공은
어느새 자기 몫이 된다.
“내가 그때 많이 걱정해 줬잖아.”
“그래서 버틴 거지.”
“내가 옆에서 말해줬잖아.”
연민은
이렇게
자화자찬으로 변한다.
이 연민의 목적은
누군가를 돕는 데 있기보다
자기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더 가까워 보인다.
그와 달리,
진짜 도움은
훨씬 조용하다.
묻지 않고,
흘리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다가온다.
누군가의 사정을
자기 입으로
증명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사생활이 가장 많이 훼손된다는 점이다.
“걱정”이라는 포장 덕분에
불편함을 말하면
언제든 이렇게 돌아온다.
“난 좋은 마음이었어.”
악의도 없고,
노골적인 공격도 없다.
하지만
당사자의 동의 없이
사정은 옮겨지고,
연민은 나뉘고,
위로는 소비된다.
그때는
아직 몰랐다.
정작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왜 그들이
그 자리에 없었는지.
그래서
여기서 한 번
멈춰 생각하게 된다.
나는
누군가의 힘듦을
이야기로 옮긴 적은 없었는지.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내 마음의 안정을
확인하고 싶었던 순간은 없었는지.
나는 이것을
동정 중독이라 부른다.
남의 불행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태도.
이제는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연락의 타이밍이 아니라
연락의 이유를.
따뜻한 말의 모양이 아니라
그 말이
상대를 어디에 세우는지를.
동정은
받아야 할 감정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신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