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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유선생 Sep 24. 2022

관 없는 장례식(2)

김시백 선생은 봉은사역에서 몇 정거장 더 지나 친구 모친상을 치르는 장례식장 가까운 역에 내렸다.

대학병원 한쪽에 마련된 친구 어머니의 장례식장은 누구나 흔히 보듯 다소 엄숙하면서도 왁자지껄한 활기가 흐르고 있었다.

김시백 선생은 흰 국화꽃으로 뒤덮인 제단에, 그리고 검은 양복을 입고 옆에 죽 늘어선 상주들에게 예를 표하고 아는 얼굴들을 찾아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때도 술 한잔 하긴 했어. 좀 한산하긴 했지만.'

김시백 선생은 오랫만에 만난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20여년 전 봉은사 옆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던 그날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황선생이 알려준 장례식장이 있다는 봉은사에 도착한 김선생은 그가 왜 조문버스 운행을 극구 사양했는지 알 것 같았다.

당시에는 자기 집에 천막을 치고 조문객들을 맞는 경우가 많았고, 마을회관이나 병원에서도 장례식을 치렀지만, 여하튼 절에서 장례를 치르는 데 조문을 가게 된 것은 처음 접하는 일이었다.

정규 수업을 마치고 출발한데다가, 네비게이션도 없던 때여서 김선생 일행이 봉은사에 도착한 건 밤 9시가 가까워 올 때쯤이었다.

절은 서울에서도 노른자위라고 불리는 강남 도심에 거창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바로 옆 6차선 넓은 도로에서 귀가를 재촉하는 수많은 차량들이 헤드라이트 불빛을 이리저리 흩뿌리며 질주하고 있었다. 겨우 절 한 켠에 위치한 주차장에 차를 댄 김선생은 동료들과 함께 장례식장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시커먼 기와를 올린 대웅전과 크고 작은 여러 건물들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전등 불빛이 잔디가 깔린 일주문 앞뜰을 비추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넓은 마당에는 돌아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장례식장이란 표지판, 아니 하다못해 '근조'라고 쓴 등이라도 걸려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김선생은 절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들르는 종무소에서 전화기를 빌려서 황선생이 미리 알려주었던 전화번호를 눌렀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곧 그리로 가겠습니다.''

황급히 대답하는 소리를 듣고 나자 마자, 정말 잠깐만에 저쪽 어둠 속에서 황선생이 허겁지겁 뛰어 왔다.

상주들이 흔히 묘지에 갈 때 입는 누런 베옷에 두건을 쓰고, 왼쪽 팔에 완장도 둘렀지만 상주라기엔 뭔가 좀 어색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평소 교무실 옆에 있는 휴게실에서 남들이 잘 피우지 않는 박하 담배를 입에 물고 멋스럽게 앉아 있던 그 황선생이 아니었다.

'뭐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니 정신이 없겠지.'

여하튼 일행은 황선생을 따라서 사찰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여기가 장례를 모신 곳이란다.

우리가 보통 장례식장에 가보면 하얀 국화꽃으로 장식된 제단, 여기저기서 시끌벅적하게 술과 음식을 나누는 조문객들과 마주치게 된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작은 방을 휑하니 차지하고 있는 것은 조그마한 위패 하나뿐이었다.

'황선생이 지금 서른 셋이던가? 형제들은 없나? 아버지는 어디 볼일이 있어서 나갔나? 와이프랑 네 살쯤 되는 아들이 있는 걸로 아는데 왜 안 보이지?'

마음속으로 그런 수많은 질문을 하면서 묻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황선생은,

''아이고.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아버지가 떠들썩하게 장례를 치르면 집안에 액이 낀다고 해서..... .''

다소 횡설수설 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상하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리고 장례를 바로 절에서 지내는 것도 처음 보는 일이기는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우선 너무 늦은 시간이라 다시 집으로 돌아갈 걱정이 앞섰다. 급히 저녁식사만 하고 곧장 되돌아간다고 해도 밤 1시는 넘어야 집에 들어갈 수 있을 터였다.

황선생이 식사를 대접한다고 해서 김선생 일행은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다른 손님이 하나도 없어 썰렁한 홀에서 상주 복장을 한 황선생과 지방에서 오랫만에 복잡한 서울로 올라와 다소 정신이 어수선한 네 사람은 별다른 얘기 없이 제육볶음에 소주를 곁들여 늦은 저녁을 먹었다.

상주라는 황선생이 너무 침울한 표정으로 말을 잘 안 하려고 해서, 김선생 일행 또한 돌아갈 길이 걱정이 되어 그날 밤, 조문객들을 위한 식사는 무겁고 조용한, 그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기이한 풍경으로 남게 되었다.

친구 모친의 장례식장에서 늦은 점심에 소주 몇잔을 걸치고 나서 김시백 선생은 지하철을 타고 고속터미널 쪽으로 가다가 봉은사역에 내렸다. 집으로 내려갈 버스 시간에 여유가 있는 데다가 오랜 시간 동안 기억 저편에 남아 있던 봉은사에 한번쯤은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절이 예전에 비해 얼마나 달라졌을까 궁금했다기보다는 20여년 전 그날의 황선생이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선택을 했는지 생각해 보고 싶어서였다.

지하철역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주위를 둘러보자 절의 좌우로 뻗은 6차선 대로로 끝없는 차량의 행렬이 저마다 제갈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거창하게 서 있는 일주문을 들어서자 법왕루로 통하는 넓은 길에 연꽃 바다가 펼쳐져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커다란 고무 함지박에 물을 붓고 키워낸 연꽃 화분을 수백 개 늘어놓은 것이었다. 위를 쳐다보니 수천 개의 하얀 연등이 하늘을 온통 가릴 듯이 걸려 있다. 조금 더 걸어서 대웅전 앞을 지나니 산 아래 거대한 석조 미륵상과 그 옆으로 빼곡히 크고 작은 석조 불상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그리고 그 화분이나 연등, 불상들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그것을 시주한 신도들의 이름과 헌금액수가 적혀 있었다.

'유럽의 종교 개혁을 촉발했던 면죄부와 다를 바 없군.'

김시백 선생은 자신이 절에 한푼도 시주를 한 적이 없으면서도 다소 씁쓸한 심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수십채의 사찰 건물들이 늘어선 거창한 봉은사는 과연 스님들이 수행에 정진할 정신이 있을까 싶은 의문이 들 정도로, 현대 물질 문명의 총아인 자동차의 불빛과 소음에 완전히 파묻혀 있었다.

김선생 일행은 저녁을 먹자마자, 곧바로 왔던 길을 되짚어 통영으로 차를 몰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부터 뭔가 좀 이상하다는 얘기는 시작되었다.

''어머니가 사망했다는데 시신이 든 관은 어디에 있나?''

''혹시 먼저 화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유골함이라도 모셔놔야 하는게 아닌가?''

''아니, 바로 어제 돌아가셨다고 연락을 했는데, 그렇게 빨리 화장을 할 리는 없어요. 그리고 우리 풍습에는 망자가 깨어날 수도 있다고 최소한 3일장을 치르는 게 상식이잖아요.''

''황선생 아버지는 어디서 뭘하고 있기에 안 보일까? 사모님이나 아이는?''

그런 얘기들은 자연스럽게 황선생의 사생활에 대한 소문으로 흘러갔다.

''황선생이 자주 고급 주점에 드나든다고 하던데요. 원래 집이 부잔가 봐요.''

''부모 집이 서울이니 부자일 수도 있겠지. 근데 부모가 서울 어디에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아는 선생님이 거의 없는 거 같던데.''

''제가 듣기론 황선생이 여러 선생님들한테 돈을 빌렸다고 하던데요. 저도 얼마 전에 황선생이 어머니 치료비가 많이 들어서 은행 대출 받는데 필요하다고 해서 보증을 서줬어요.''

''사모님이 다른 선생님들 사모님이랑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던데 여기보다는 친정이 있는 서울에서 더 많이 머무는 게 아닐까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일행은 밤 1시가 넘어서야 겨우 각자의 집으로 돌아왔다. 김선생은 먼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지만, 잠이 들 때까지 큰 숙제를 끝마치지 못하고 잠자리에 든 것같은 찜찜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음날 한산중학교 교무실과 휴게실 등, 학생들이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는 교사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황선생과 관련된, 물밑에 숨어있던 여러 소문들을 환한 햇빛 아래 낱낱이 끄집어내고 있었다. 의문을 증폭시킨 건 황선생과 사적으로 좀더 가깝게 지내던 교사들이었다. 김선생 일행이 학교 친목회 명의로 조문을 떠나고, 1시간쯤 후에 황선생의 대학 동문들 몇 명이 개인적으로 조문을 다녀온 것이다. 그때는 황선생이 더 허겁지겁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고 한다.

''아무것도 차려 놓은 것 없이 상주 혼자 장례를 지낸다는 게 있을 수 있나요? 아무리 급한 일이 있더라도 첫날인데, 황선생의 아버지나 부인도 자리에 없는 건 좀 뭐하네요.''

''장례식장을 차리는 게 비용이 많이 들어서 그렇게 한 건가?''

''아무리 그래도 친척들이나 친구들이 몇 명이라도 와 있는게 정상이 아닌가?''

''집안 싸움이나 돈 문제로 서로 척을 진 게 아닐까요?''

''그러고보니 황선생이 우리 선생님들이랑 금전적인 관계가 꽤 있는 거 같던데.''

''황선생이 구선생한테 은행 보증을 서달라고 해서 도장을 찍어줬는데 그게 무려 삼천만원이라네요.''

''구선생말고도 여러 명이 있는 걸로 아는데.''

''여러 명이 아니라 열 명도 더 될 걸요.''

''그럼 혹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게 거짓말이 아닐까요?''

''에이. 아무리 그래도 멀쩡히 살아있는 자기 부모를 죽었다고 사기칠 사람이 어디 있겠어?''

''황선생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쓴 여러 건이 이제 만기가 돌아와 대출 연장 보증을 부탁한다나 봐요.

''이상한 점이 너무 많잖아요. 빨리 자세히 조사해 볼 필요가 있어요.''

김선생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료교사들 틈에서 말없이 앉아 있다가 바로 몇 달 전에 거의 10년간 옆집에서 가깝게 지내다가 떠나버린 은아네 식구들이 떠올랐다.

김선생은 몇 년 동안 전세를 살다가 새로 분양받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는데, 복도식 아파트 같은 층에 비슷한 연령대의 네 집이 입주하게 되어 자주 회식이나 나들이도 같이 하면서 꽤 친밀하게 지냈다.

그러던 언젠가부터 은아네 부모가 '구원파'라는 종교에 빠져서 '휴거', 즉 이제 곧 지구에 종말이 오는데,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만 하늘로 들려올라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우리를 만날 때마다 열심히 전도를 했다. 그러더니 어느날 갑자기 아빠가 괜찮은 직장을 그만둬 퇴직금을 받고, 살고 있는 집도 팔아서 모든 재산을 종교단체에 바치고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던 은아를 데리고 성령의 은사를 받는다는 기숙 천막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혹시 황선생도 사이비 종교에 빠진게 아닌가? 이곳저곳에서 돈을 빌리고, 근무에 소홀한 걸 보면.'

김선생은 황선생과 은아 아빠의 얼굴을 서로 매치해 놓고 열심히 연관성을 찾아 보았으나 공통점을 찾기는 어려웠다. 은아네는 부부 둘다 외곬수적인 면이 강했지만, 황선생은 사교성도 좋았고 아주 유들유들한 성격이었다.

교원 근무 규정에 의하면 황선생은 모친상으로 일주일 후에나 학교로 돌아올 터였다. 당사자가 없으니 얘기하기가 훨씬 쉬웠기 때문이었을까? 황선생과 관련된 아주 사소한 일까지도 도마에 올랐다.

여러 교사들이 황선생에 대한 이런저런 온갖 추측성 얘기를 나누고, 불성실한 근무 태도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황선생을 감싸고 돌았던 관리자들의 행태를 성토하던 중,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진실을 확인할 수 있는 돌파구가 열렸다.




관 없는 장례식(3)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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