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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유선생 Sep 18. 2022

관 없는 장례식(1)

한반도의 남쪽 끝자락에 자리한 통영 앞바다는 전세계적인 팬데믹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짙은 푸른색으로 출렁이면서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고단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이곳 한산중학교에서 30여년을 국어교사로 근무하다가 정년퇴임을 하고 나서 여가 생활을 즐기고 있던 김시백 선생은 모처럼 친구의 모친상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행 버스를 탔다. 거리 두기도 완화된데다가 벌써 세 해나 바뀌었어도 코로나가 끝나지 않아, 이제는 정말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정말 오랫만에 경조사에 직접 참석하는 터였다.

고속터미널에서 버스를 내려 지하철로 갈아타고 몇 정거장 지나는데 안내 방송에서

''이번에 내리실 역은 봉은사역입니다.''

라는 멘트 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봉은사에도 지하철이 지나가고 역까지 생겼구나.'

서울 한복판에 자리잡은 봉은사라는 절이 김선생의 기억 속에서 가끔씩 되살아나곤 하던, 20여년 전 '봉은사에 얽힌 그날'을 소환해냈다.

'그때는 나도 젊었었지. 그리고 그때는 참 별일도 많았어.'

김시백 선생의 머릿속에서 키가 멀쑥하고 기생오라비처럼 멋을 내고 다니던 젊은 황선생이, 누런 삼베옷을 어설프게 차려 입고 봉은사의 어둑어둑한 경내를 쭈뼛쭈뼛 걸어나오던 모습이 어슴푸레한 안개처럼 나타났다.

'황선생은 지금 뭘 하면서 살고 있을까? 아내와 애들은 어찌 되었을까?

여기저기 물어봤지만 아무도 소식을 아는 사람이 없던데 혹시 외국으로 나가 사는게 아닐까?'

김시백 선생은 문득 봉은사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장례식장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내릴 준비를 서둘렀다.

이제 몇 년만 지나면 뉴밀레니엄,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다고 기대에 부풀어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반면에 이제 이 세상도 종말이 가까웠다고 비장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과거에도 거의 없었고, 미래에도 여간해서는 나올 수 없는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새학기가 시작된지 몇 달이 지난 어느날, 한반도의 남쪽 해안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잡은 한산중학교 교무실 유리창 안으로 유월초의 풍성한 햇살이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중이었다.

이번 학년도에 새로 학교 친목회 총무를 맡게된 김선생은 서울에서 걸려온 황도수 선생의 전화를 받으면서, '또 무슨 일이 생겼구나' 하는 심정이었다.

황선생은 여러 달 전부터 이런저런 일들로 여러 선생님들의 신경을 긁던 차였다.

서울에서 이름 있는 대학의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6년 전 공채로 이 학교에 부임한 황선생은 사회 과목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학교에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루어 관리자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너무 윗사람들 눈에만 잘 보이려 하고, 특정 몇 교사들과만 어울려 자주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러 디닌다는 안 좋은 평도 돌았다. 그리고 교사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학생 지도나 수업을 소홀히 여긴다는 것이, 좀 고지식한 성격의 김선생 눈에는 가장 거슬리는 점이었다.

수도권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학교다 보니 50여 명의 교사 중 황선생은 몇 안 되는 서울내기 중 하나였다.

그런데 1년 전쯤부터 황선생은 어머니가 암에 걸려서 병원에 다녀야 하기 때문에 서울에 가봐야 한다며 여러 차례 휴가를 신청해서 여러 선생님들이 보강을 해야 하던 차였다.

''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깜짝 놀라 큰소리로 되묻는 김선생에 비해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저쪽의 반응은 마치 어린아이가 웅얼웅얼대듯이 불분명한 메아리로 남겨졌다. 항상 깔끔하게 차려 입고, 세련된 서울 말씨를 구사하는 그의 모습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행태였다.

''그럼, 곧 모든 선생님들에게 공지하고, 조문 버스를 섭외해야 하니 장례식장이랑 어머니 인적사항을 간단히 알려주세요.''

김선생은 오래 전부터 동료교사가 상을 당했을 때 관례적으로 처리해왔던 친목회 규정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하필 내가 총무를 맡고 있을 때 이런 애경사가 자주 발생하는 거지?' 하는 푸념을 해보았다.

당시 한산중학교 친목회 규정은 회원의 직계존속이 사망한 경우 회원 1인당 1만원씩 갹출해 전달하고 조문 버스를 1대 대절해서 사정이 허락하는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다녀오도록 하는 것이었다.

김선생은 먼저 교무실 게시판에 '황도수 선생 모친상'이라는 간단한 부고를 적어 놓고, 비는 시간을 이용해 은행으로 달려가 적립된 회비에서 단체 조의금을 인출해서 친목회 명의의 봉투를 마련했다. 그러고 나서 왕복 10시간은 족히 걸릴 게 틀림없는 조문 버스를 섭외하기 위해 전화번호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황선생이 서울 시내에 있는 봉은사에 어머니를 모셨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시 후 다시 황선생의 전화가 걸려오면서  황선생 모친상 조문은 기이하게도 여느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을 중시하는 우리네 정서 때문에 한산중학교 친목회는 오래 전부터 회원의 애경사가 있으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버스 한 대가 거의 찰 정도로 다녀오곤 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가서 애도나 축하의 인사를 건네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미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주라는 황선생이 조문 버스를 보내지 말고, 그냥 승용차로 몇 명만 다녀가는게 좋겠다고 말하는 거였다.

김선생은 ''어떻게 인사가 그럴 수 있냐고, 버스를 대절해야 직접 조문을 하고 싶어하는 선생님들이 갈 수 있다''고 설득을 했지만 황선생은 아버지가 조용히 장례를 치르고 싶다고 했다며 극구 사양을 했다. 그러고 보니 황선생의 나이를 감안하면 그 모친은 환갑도 안 되는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말하자면 호상은 아니라고나 할까?

하는 수 없이 김선생은 좀 가까운 동료 교사 3명을 섭외해서 승용차로 길을 나섰다. 물론 친목회에서 마련한 단체 부의금 외에, 동료교사들이 개별적으로 보내는 부의금 봉투까지 빠짐없이 챙겨서.

가는 길에 황선생에 관한 별다른 얘기는 없었다. 휴대폰이나 네비게이션이 별로 보급되지 않던 때라 지도와 이정표를 보느라, 어떤 조직이나 마찬가지로 윗사람들 흉보느라, 그리고 가장 많이 등장하는 대화 메뉴, 속썩이는 학생들 때문에 죽겠다고 한탄하느라, 먼 길을 그리 지루한 느낌 없이 지났다.



관 없는 장례식(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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