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리뷰
ENHYPEN(엔하이픈) 4th Mini Album [DARK BLOOD]
엔하이픈에게는 늘 어느 정도의 기대치가 있었다. 하이브의 후광이 있어서인지, 데뷔 때부터 이어오던 엔하이픈만의 서사 덕분인지 가끔 깜짝 놀라는 곡들을 들고 나오곤 했다. 그런 엔하이픈이 데뷔한 지 벌써 2년이 넘기도 했고 4번째 미니앨범 [DARK BLOOD]는 앨범 명처럼 약간은 어둡고 숭고한 판타지적 운명의 이야기를 담았다.
하이브가 시도하는 여러 가지 사업 중 아티스트 브랜딩 사업은 특히 '스토리'가 중심이 된다. 하이브의 오리지널 스토리 'DARK MOON: 달의 제단’의 서사를 이은 앨범으로 뱀파이어와 늑대인간 소년들이 하나의 소녀를 두고 전투를 벌이는 클리쉐 적이면서도 유치한 하이틴 로맨스 물이다.
K-POP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만한 '세계관'은 약 10여 년 전 EXO로부터 시작됐다. SM엔터테인먼트는 EXO의 멤버들에게 초능력을 하나씩 부여하여 판타지적 세계관을 구축했고 앨범을 소비하는 팬들로 하여금 엑소만의 세계관에 빠져들게 하고 이를 넘어 분석하고 상상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후 아이돌 그룹의 세계관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각 그룹만의 스토리를 구축하기 시작했고 사이키델릭 했다가 아련했다가 때로는 촌스러울 만한 세계관들로 스스로를 브랜딩해나 갔다.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러한 브랜딩 방향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시점이 되었다. 가수와 음악을 소비하는 방식과 플랫폼이 10년 전과는 바뀐 만큼 K아이돌 판은 글로벌해짐과 동시에 국내 장벽은 높아지고 있다. 세계관 브랜딩의 시작을 열었던 SM엔터테인먼트는 에스파를 통해 세계꽌의 끝판왕을 선보였지만 이수만과 유영진이라는 주축 인물이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사이키델릭 한 콘셉트를 잠시 뒤로 하고 쉽고 가볍게 찍어먹을 수 있는 하이틴이라는 키워드로 또 다른 성공의 길을 찾았다.
드라마의 회차가 거듭될수록 스토리 라인은 복잡해지고 깊어지기 마련이다. 그룹이 발매하는 앨범의 개수가 많아질수록 세계관이야기는 풍부해지고 절정을 맞이하지만 그때 새롭게 유입되는 팬들은 그것이 입덕의 장벽이 되기도 한다. 엔하이픈이 선택한 이야기는 뱀파이어와 늑대소년이다. 어쩌면 가장 위험한 시도일지도 모른다. K-POP 주 소비층인 1020 여성들에게 흔하지만 유치하고 익숙하지만 낯선 키워드다.
엔하이픈의 이야기를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무엇이든 가장 나 다운 것이 가장 대중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이 치열한 경쟁 시대에 모든 것을 얻을 수 없다면 얻을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는 것도 좋다.
세계관의 설명을 위해 필요한 콘셉트 트레일러 영상이다. 앨범의 시작을 알리면서 팬들의 스토리 몰입을 위한 트레일러는 무려 8분이 넘는 길이에 뛰어난 영상미와 큰 스케일에 마치 단편 영화 한 편을 보는듯한 인상을 준다. 이 콘셉트 트레일러는 유명 CF 감독인 '유광굉'이 연출을 맡았고 타이틀곡 <Bite Me> 역시 자신만의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광고계에서 주목받는 송민규 감독이 제작을 맡았다. 화려한 제작진 라인업만큼 영상을 보는 재미는 엄청나다. 스케일뿐만 아니라 몰입도 높은 스토리와 영상미, 폴란드 로케이션으로 촬영한 뮤직비디오의 광활함과 미스터리 한 세트, 의상까지. 이 앨범을 관통하는 주제는 다크 함이지만 보는 이에게는 어두운 불쾌함보다는 자본의 짜릿함을 느끼게 만든다고 해야 할까?
이 클리쉐적인 세계관은 정말 동전의 양면이다. 기존의 K-POP에 문화에 대해 이해하고 마니악한 자극적 콘텐츠에 익숙한 이에게는 밀도 높은 판타지를 꿈꾸게 만드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늘 마케팅 콘텐츠를 기획할 때 대중적인 것이냐, 매니악한 것이냐를 고민하게 되는 것처럼 딜레마의 중간점에 서있다.
이번 앨범이 큰 화제가 된 이유는 타이틀곡 <Bite Me>의 퍼포먼스 때문이었다. 발매 전 공중파 방송 종료 후 살짝 선공개된 뮤직비디오 영상에서는 엔하이픈 멤버들이 각각 여성 댄서와 함께 1대 1로 페어 댄스를 추는 파트가 있었다.
가히 파격적인 시도이다. 아이돌의 생태계를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이 퍼포먼스가 팬들에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 것이다. 특히나 남자 아이돌에게 여성 댄서와의 스킨십이 있는 퍼포먼스는 팬들의 반대를 사기 쉽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굳이...?"이다. 특히나 엔하이픈은 여전히 미성년자인 멤버들이 존재하고 아이돌에게 있어 이성은 있어도 없는 존재, 없어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성 댄서와의 페어 안무가 지금의 엔하이픈에게 필수적인 요소도 아니었고 팬들의 반감을 살 것은 뻔했다. 특히나 남자 아이돌의 컨셉틱 한 앨범은 많은 대중성을 추구하기보다는 기존의 팬덤 결속력을 상승시키고 타 아이돌 팬덤을 환승시키는 것이 주요 목적인 경우가 많다. 몸에 딱 달라붙는 치파오 같은 드레스를 입고 자신의 최애와 스킨십을 하는 안무가 무대의 2/3를 차지하고, 내 최애의 직캠을 보는 건지 댄서의 직캠을 보는 건지 하는 퍼포먼스를 좋아할 아이돌 팬덤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사실 앨범만을 보면 수록된 6곡의 상성은 정말 좋다. 앨범의 무드를 지켜가면서 장르적인 다양성을 추구하고 있고 엔하이픈 멤버들이 구현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트랙 순서대로 곡들을 들으면 어딘가 모를 기시감이 들기는 한다. 1번 트랙 <FATE>는 르세라핌 <The Hydra>의 내레이션이, 5번 트랙 <Bills>와 6번 트랙 <Krama>는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엔하이픈의 모든 곡들을 빠짐없이 듣고 그들의 세계관을 100퍼센트 이해하는 팬들이라면 이 의견에 반대를 표할 수도 있지만 이 왠지 모를 기시감은 엔하이픈 위를 덮고 있는 하이브라는 존재를 자꾸만 인식시킨다.
세계관과 스토리에 대해 걱정했던 것보다 앨범은 정도를 유지한다. 타이틀곡 <Bite Me>는 복잡한 스토리에 비해 단순하고 심플하다. 전반적인 곡 구성도 깔끔하고 사운드 구성도 미니멀하다. 화려하고 무거운 사운드 대신 드럼 비트와 베이스를 주로 사용했고 멤버들의 화음으로 웅장함을 더했다. 짧은 러닝타임은 반복되는 멜로디 라인을 보완하고 과하게 무거워지지 않도록 심플함을 더한다. 뮤직비디오 역시 의외다. 세계관 스토리에 대한 내용보다는 곡의 댄스 퍼포먼스에 집중한다. 미스터리함을 고조시키는 웅장한 세트와 진주 장식의 화려하고 정교하게 짜인 의상을 입은 멤버들, 그리고 자극적인 퍼포먼스까지. 세계관을 고수하기 위해 미장센으로 범벅된 곡과 뮤직비디오 대신 짧고 심플하면서 분위기만 이어가는 방식으로 엔하이픈의 장벽을 허물었다. 세계관에 대한 설명은 앨범 트레일러와 1번 트랙 <FATE>에서 끝내고 타이틀 곡과 수록곡은 앨범의 톤 앤 매너를 유지하면서 심플함과 대중성을 추구했다.
[ TRACK LIST ]
1. FATE
2. Bite Me *title
3. Sacrifice (Eat Me Up)
4. Chaconne
5. Bills *추천
6. Kar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