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무너졌던 마음이 다시 말하기까지
"이 글은 상담심리학자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동행하며 그들의 감정 여정을 상징적으로 재구성한 가상의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하루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입을 열기도 싫었고,
누군가에게 안부를 묻는 것도 버거웠다.
머리는 멍하고,
시간은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다가도
금세 저녁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몸은 쉬었는데,
마음은 지쳐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무너지는 느낌일까.
아무도 몰랐을 거다.
겉으로 보기에 나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겠지.
아픈 티도 내지 않았고,
도움을 구하지도 않았고,
웃으며 “괜찮아”라고 말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나는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
말하지 않은 감정들이 가슴을 눌렀고,
삼켜버린 슬픔이 체온을 낮췄고,
작은 한숨조차 사치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그날의 나는
그저 무너지고만 있었던 게 아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마지막 남은 마음의 끈을 붙잡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향해
“이대로 괜찮아”라고 조용히 말하고 있었고,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지만
존재 그 자체로 하루를 버텼다.
마음은
우리가 포기한 줄 아는 순간에도
우리 대신 삶을 지켜내고 있었다.
그건 거대한 희망도 아니고,
극적인 회복도 아니었다.
그저 오늘 하루를
넘어지지 않고
견딘 존재로 남아 있게 한 힘.
나는 이제 그런 날을
무기력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건 견디고 있었던 날이고,
마음이 내 편이 되어
가만히 옆에 앉아 있었던 날이었다.
말이 없고, 움직임이 없던 그 날조차
내 안에는 여전히
나를 지키는 마음이 살아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화가 났었다.
그 사람의 말투,
그 사람의 무심함,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 ‘태도’에.
순간적으로 감정이 치밀어 올라
말을 뾰족하게 내뱉고,
문장을 끊어 내고,
무언의 벽을 세웠다.
스스로도 알았다.
“지금, 나… 너무 날카롭다.”
“좀 지나친 건 아닐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의 분노가 사라지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 남은 건
미안함이 아니라, 허전함이었다.
시간이 지나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말 화가 났던 걸까?"
그 질문이 마음 깊은 곳을 두드렸고,
그제야 조심스럽게 올라온 대답은
생각보다 단순하고도 조용한 말이었다.
"아니야.
화가 난 게 아니라…
그냥 너무 실망했을 뿐이야."
나는 사실 기대했었다.
그 사람이 내 마음을 눈치채주기를,
내가 아무 말 안 해도
조금은 알아주기를,
적어도 한 발짝 다가와주기를.
그 기대는 입 밖으로 나온 적 없고,
그저 ‘말 안 해도 알겠지’ 하는
조용한 바람의 형태로만 존재했다.
그런데 그 기대가
아무 반응 없이 외면당했을 때,
나는 그 감정을 ‘실망’이라고 표현하지 못하고
‘분노’로 포장했다.
분노는 솔직하지 않아도 되는 감정이니까.
약해 보이지 않게 해 주니까.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지독하게 사람다운 마음이 있었다.
상처받았다는 말도 못 하고,
서운하다는 말도 못 하고,
“괜찮아”라고 말하며 돌아섰지만
그 등 뒤에 남겨진 건
내가 원했던 연결이 끊어진 자리였다.
화가 났던 게 아니다.
나는 상대가 몰라줬다는 사실에 서운했고,
내 마음을 설명해야 한다는 상황에 지쳤고,
결국은 나 혼자 애쓴 것 같아
조용히 마음이 무너졌던 것뿐이다.
어쩌면 ‘화’라는 감정은
가장 표현하기 쉬운
방어적인 정서인지도 모른다.
진짜 마음을 꺼내 보일 수 없을 때,
우리는 그 마음에
분노라는 껍질을 씌운다.
왜냐하면
실망했다고 말하면
상대가 죄책감을 느낄 것 같고,
혹은
내가 너무 예민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아서.
그러면 또 혼자
부끄러워질 것 같아서.
하지만 나는 지금
나에게만큼은 정직하고 싶다.
"너는 화가 난 게 아니라,
실망했었구나.
기대했었고, 애썼고,
그만큼 서운했던 거구나."
그렇게 인정해 주면
마음은 분노로 달아오르기보다
서서히 식어간다.
그리고 조금씩 말할 준비를 시작한다.
분노는 폭발하지만
실망은 조용히 무너진다.
그리고 그 무너진 자리엔
언제나 마음의 애씀과 기대가 있다.
나는 그걸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화를 내기 전에
이 한마디를 스스로에게 먼저 묻고 싶다.
“혹시… 지금, 너무 속상한 거 아니야?”
울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슬펐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건 나도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이었고,
다른 사람에겐 아마 과하다고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말하고 있는 나조차
왜 이렇게까지 울게 되는지
순간적으로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 눈물은
그 자리에서 처음 흐른 게 아니었다.
그 말은
몇 번이나 꺼내려다 삼켰던 말이었고,
그 감정은
몇 번이나 설명하려다 포기했던 감정이었다.
그때마다 "말해 뭐 해",
"또 괜히 예민하다고 할 텐데" 하며
마음을 눌러뒀었다.
그런데
용기 내어 한 번 말을 꺼냈고,
겨우 꺼낸 그 말을
상대는 “그 정도 가지고 그래?”라며 흘려보냈다.
그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무너졌다.
나는 슬퍼서 운 게 아니었다.
이해받지 못해서 울었다.
말을 했는데 전해지지 않을 때,
그 마음은 아주 깊은 데서 부서진다.
그 눈물은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눈물이었다.
더는 버티지 못하겠다는 신호,
마음을 계속 밀쳐서는 안 된다는 알람.
사람은
누군가가 "그랬겠다"라고 말해주면
의외로 마음을 잘 다독인다.
꼭 해결해 달라는 게 아니라
그저 "나는 너의 감정을 인정해"라는
작은 동의만 있어도
마음은 훨씬 덜 무너진다.
그런데 이해받지 못하는 순간이 반복되면
사람은 말을 줄인다.
그리고 그 줄어든 말만큼
감정은 안으로 깊숙이 숨어버린다.
나는 늘 괜찮은 척을 잘했다.
눈치도 빠르고,
분위기도 잘 읽고,
애써 웃는 데 익숙했다.
그래서 오히려
사람들은 내가 강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건 강함이 아니라
이해받지 못해 온 시간들이 길었기 때문에 배운 생존 방식이었다.
이해받고 싶었다.
그냥 누군가가
내 말의 온도,
표정 속 숨은 감정,
말끝에 실린 주저함을
조금만 더 살펴봐 줬으면 했다.
그리고 그 소망이 닿지 않는 날,
나는 조용히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이해는 말보다 감각이다.
눈빛 하나,
고개 끄덕임 하나,
“나도 그런 적 있어”라는 짧은 말 하나.
그런 것들이 마음을 견디게 한다.
그리고 그게 없을 때,
마음은
너무 오래 혼자 있었구나 하는 감각에 젖어
슬퍼진다.
지금도 누군가는
슬퍼서가 아니라
이해받지 못해서
혼자 울고 있을지 모른다.
그 눈물은 약함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지키려는 마지막 표현일지도 모른다.
나는 자주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웬만한 일엔 웃고 넘어가고,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괜찮아” 한 마디로 정리하고.
그게 어른스러운 거라고 믿었다.
사소한 일에 감정적이지 않은 게
더 성숙한 사람 같아서.
그런데 이상했다.
가끔은 정말 사소한 말에도
안에서 뭔가 확 끓어오르고,
말투가 날카로워지고,
갑자기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항상 스스로에게
“내가 왜 이 정도로 화가 났지?”
“이건 그냥 예민한 거야”
“내가 이상한 거야”
라고 타이르며 지나갔다.
하지만 그 화는,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화’가 아니었다.
그건
말하지 못한 슬픔이,
표현되지 못한 마음이,
이해받지 못한 애씀이
쌓이고 쌓여
다른 얼굴로 나타난 감정이었다.
사람은
슬프다고 말하기보다
화가 났다고 말하는 게 쉽다.
슬픔은 너무 약해 보이고,
무언가를 기대했다는 걸 드러내야 하니까.
괜히 ‘너무 감정적이다’, ‘오버한다’는 말을 듣게 될까 봐
우리는 슬픔 대신 분노를 꺼내 들 때가 많다.
분노는 방어적인 감정이다.
슬픔이 무너지는 감정이라면,
분노는 스스로를 세우는 감정이니까.
그런데 마음은 안다.
내가 지금 화난 게 아니라,
사실은 너무 서운했던 거라는 걸.
그 사람의 반응에,
내 마음이 투명하게 취급당한 느낌에,
그동안 아무렇지 않은 척해왔던 나를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는다는 데서 오는 깊은 슬픔.
그게 쌓이고,
말해도 소용없겠다는 생각이 굳어지면
마음은 감정을 바꿔 말하기 시작한다.
슬픔 대신 분노로.
분노는 더 세고,
더 강하고,
더 분명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그 안에서
가장 여린 감정이 울고 있다.
“나, 사실 너무 속상했어.”
“그냥 알아줬으면 했어.”
“말하지 않아도, 한 번쯤 내 마음을 헤아려줬으면 좋겠어.”
그 말을 할 수 없을 때,
마음은 그렇게
다른 얼굴을 쓰고 세상에 나타난다.
나는 이제 안다.
내가 화를 내던 순간들마다
내 안의 작은 슬픔이 말할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는 걸.
그리고 그 슬픔은
단단한 말투, 날카로운 표정 뒤에서
조용히 울고 있었다는 걸.
이제는 조금씩,
그 얼굴을 벗기고
감정을 진짜 이름으로 불러주려 한다.
“화가 난 게 아니라
서운했던 거야.”
“화가 난 게 아니라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던 거야.”
“화가 난 게 아니라
사실은 그냥... 너무 슬펐던 거야.”
감정은
제때 말하지 못하면
다른 얼굴을 갖게 된다.
그 다른 얼굴은
때로 나도, 너도, 오해하게 만든다.
그러니 부디,
분노를 마주할 때마다
그 안에 숨어 있는
말하지 못한 감정을
조금 더 천천히, 따뜻하게 들여다보자.
오늘 하루도
달력 위에 큰 의미 없이 지나갔다.
해야 할 일들은 있었고,
할 수 있는 시간도 분명 있었는데,
나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하루를 보냈다.
소파에 앉아 시간을 흘려보내고,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반복하고,
그렇게 한나절이 지고서야
슬그머니 이런 질문이 올라온다.
“나는 왜 이러지…?”
자책이 빠르게 따라온다.
“왜 이렇게 의지가 없을까.”
“왜 이렇게 게으를까.”
“이러고도 뭘 바랄 수 있을까.”
그 생각이 들수록
몸은 더 굳고,
마음은 더 움츠러든다.
그리고 결국
하루를 ‘아무것도 못한 시간’으로 덮어버린다.
그런데 마음 깊은 곳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하루가 정말 비어 있던 시간은 아니다.
말하지 못한 감정,
소화되지 못한 생각,
삼켜버린 서운함,
넘어가며 눌러둔 슬픔 같은 것들이
그 하루 안에 조용히 웅크려 있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 건
게으름이 아니라
감정이 너무 많아서 일시적으로 멈춘 상태일지도 모른다.
생각은 많은데 정리가 안 되고,
느낌은 있는데 말이 안 되고,
결국엔 마음이 탈진한 나머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스스로를 방어한 하루.
나는 요즘 그런 하루를
이전처럼 다그치지 않으려고 한다.
‘오늘 하루도 쉬었다’고 말해주고,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팠던 거야’라고
조용히 이해해보려고 한다.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날도 있어야
무너졌던 마음이 조용히 복구될 수 있다.
그 하루가 나를 무가치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그 하루 덕분에 내가 내 감정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하루가 끝날 무렵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왜 이렇게 힘들지?”
누가 나를 비난한 것도 아니고,
심각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하루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계속 아팠다.
쓸쓸했고, 공허했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서서히 나를 짓눌렀다.
처음엔 이 감정을
무기력이라 생각했다.
기분 탓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아픔은
단지 피곤해서 생긴 감정이 아니었다.
그건 어쩌면,
지속적으로 이해받지 못한 날들의 잔여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보통
상처를 ‘사건’으로 이해한다.
폭언, 배신, 갈등 같은
분명한 자극이 있어야
마음이 다쳤다고 말할 수 있을 것처럼.
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상처는, 꼭 누가 때려야만 생기는 게 아니다.
오히려 아무도 내게 관심을 주지 않을 때,
있는 그대로의 감정이 투명하게 취급될 때,
“그 정도는 그냥 넘기지”라는 말에 반복적으로 눌릴 때
마음은 조용히 갈라진다.
나는 최근,
아무에게도 불편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기분이 나빴다는 말도,
서운했다는 표현도
차마 하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누가 내게 상처 준 것 같진 않은데,
사실은 나 자신이 계속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
불편해도 침묵했고,
슬퍼도 웃는 척했고,
실망해도 괜찮은 척했다.
어쩌면 지금 내가 아픈 건
누군가의 말 때문이 아니라
말하지 못한 내 감정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너무 오래 쌓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용한 감정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 더 깊게 스며들고,
더 오래 남고,
때로는 “왜 아픈지조차 모르게 만든다.”
나는 지금
그 조용한 아픔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귀를 기울여보려 한다.
“정말 아무도 상처 준 게 없었을까?”
“혹시, 나 스스로가 나를 외면한 적은 없었을까?”
“정말 괜찮았던 걸까?”
그 질문들 앞에서
조금씩 마음이 말문을 열기 시작한다.
“사실은… 조금 외로웠어.”
“사실은… 말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어.”
“사실은… 나도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었어.”
그 말들이 나올 때,
비로소 마음은 아픔의 이유를 찾아낸다.
그리고 그제야
진짜 회복이 시작된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지만,
내 안에서는 오래전부터 울고 있었다는 걸.
나는 이제 그 조용한 감정을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어떤 감정은
소리도 없이 안으로 스며들었다.
처음엔 아무렇지 않았다.
그냥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을 뿐이고,
말수가 줄었을 뿐이고,
가끔 혼자 있고 싶을 뿐이었다.
그게 ‘슬픔’이었다는 걸
나는 꽤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았다.
슬픔은 조용한 감정이다.
겉으론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방치되기 쉽고,
대충 넘기기 쉬운 감정이다.
“그냥 피곤한가?”
“좀 예민한가 보지.”
“뭘 그렇게까지…”
그렇게 한두 번
스스로도, 다른 사람도 외면하고 나면
슬픔은 조용히 마음 깊은 곳에 눌러앉는다.
아무 말 없이, 그러나 천천히
마음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반면 분노는 요란하다.
갑자기 목소리가 커지고,
표정이 굳고,
감정이 솟구치고,
때론 말이 날카롭게 쏟아진다.
그래서 분노는
다른 사람도, 나도
즉시 알아챌 수 있다.
“왜 이렇게 화가 났지?”
“이건 좀 지나친 거 아닌가?”
“나도 몰랐던 내가 튀어나온 것 같아.”
그만큼 분노는 폭발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요란함에 놀라고,
때론 그 요란함 때문에 스스로를 자책한다.
하지만 그 안에는
사실 말하지 못한 슬픔이 있었다.
나는 요즘에서야 알게 됐다.
내가 화를 낼 때마다
그 이전에는 늘 말하지 못한 서운함, 애씀, 기대가 있었다는 걸.
그건 그냥 한순간의 욱함이 아니라
오랫동안 눌러온 감정이
이제 더 이상 눌러지지 않아 터진 장면이었다는 걸.
슬픔은 조용히 나를 가라앉혔다.
내가 나를 덜 사랑하게 만들었고,
말할 필요조차 없는 사람처럼 느끼게 했고,
세상 속에서 ‘내 존재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라는
조용한 결론을 스스로 내리게 했다.
분노는 요란하게 나를 흔들었다.
말이 독해졌고,
행동이 거칠어졌고,
결국 나를 몰아세운 사람처럼
스스로를 낯설게 만들었다.
슬픔은 바깥으로 흘러가지 못하면
내 안에서 썩기 시작하고,
분노는 감당하지 못하면
관계를 망치기 시작한다.
결국 둘 다
표현되지 않으면,
나를 나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오늘,
감정이 조용하든 요란하든
그걸 그냥 넘기지 않기로 했다.
슬픔이 찾아오면
“왜 이렇게 힘들지?”가 아니라
“무엇이 내 마음을 조용히 눌렀을까?”를 묻고,
분노가 올라오면
“왜 또 욱했지?”가 아니라
“내 안에 있던 어떤 감정이 말하고 싶었던 걸까?”를 들여다본다.
조용한 감정도,
요란한 감정도
다 나를 지키기 위한 방식이었다.
슬픔은 버텼고,
분노는 알려달라고 외쳤다.
그리고 나는,
그 둘이 나를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이제는 나를 다시 회복하게 만들 수 있는 감정임을
배워가는 중이다.
그저 내가 느낀 감정을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었다.
화가 났고,
속상했고,
서운했고,
조금 외로웠다고.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너, 좀 오버 아니야?”
“그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할 일은 아니잖아.”
“다들 그렇게 사는 거야.”
그 말이 내 감정보다 더 컸다.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조용히 무너졌다.
감정은 말보다 빠르다.
상황이 벌어지기 전부터
마음은 이미 반응하고 있었고,
그 감정을 꺼내기까지
내 안에선 수많은 망설임이 있었다.
“말하면 이상하게 보일까?”
“또 너무 예민한 사람처럼 보일까?”
“그냥 넘어가는 게 나을까?”
그렇게 참아오다
정말 어렵게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오버’라는 단어는
내 감정을 설명하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감정이 ‘존중받는다’고 느낄 때
비로소 안심한다.
하지만 그 감정이
과장된 것으로 취급되거나,
가볍게 넘겨지거나,
비교의 대상이 되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그건
상처보다 더 깊은 파문을 남긴다.
나는 나를 믿지 못하게 됐다.
“내가 진짜 너무 유난스러웠던 걸까?”
“다들 괜찮다고 하는데, 왜 나만 힘든 거지?”
“내가 잘못 느낀 걸 수도 있겠지.”
감정이 틀렸다는 말을 반복해서 듣다 보면
사람은 결국
자기감정에 확신을 잃는다.
그리고 나중에는
감정을 느껴도 말하지 않게 된다.
말하지 않으면, 무시당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정말 묻고 싶다.
감정을 어떻게 ‘오버’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느끼는 강도는 다르고,
버틸 수 있는 에너지의 크기도 다른데.
누군가에게는 흠집 하나지만,
누군가에게는 무너지는 경계였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견딜 수 있었지만,
나는 그날 그 말이 너무 아팠을 수도 있다.
그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감정은
정당하거나, 지나치거나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그 사람의 이야기고,
그 사람이 걸어온 생애와 기억이 깃든 반응이다.
가볍게 툭 던진 “오버”라는 말은
그 사람의 내면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다.
나는 다시 배워가는 중이다.
내 감정이 지나쳤던 게 아니라,
누군가가 나의 감정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뿐이라는 걸.
그걸 안 순간,
나는 비로소 나를 탓하는 일을 멈출 수 있었다.
지금도 누군가는
“이 정도로 힘들다고 말하면 이상할까?”를
열두 번쯤 삼킨 후에
입을 다물고 있을지 모른다.
그 사람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은
“오버 아냐”가 아니라
“그랬구나”일지도 모른다.
나는 한때
화를 내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목소리가 커지고,
표정이 굳고,
날 선 말이 튀어나올 때마다
그 사람의 본심보다
그 태도에 먼저 겁이 났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문득 알게 되었다.
분노는, 나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울타리일 수 있다는 걸.
사람은 참는다.
불편한 말을 꺼내지 않고,
상대의 말에 맞춰주고,
화내고 싶을 때조차
그 감정을 억누른다.
왜냐하면
사랑받고 싶고, 거절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관계를 위해
마음을 접고,
자존을 꺾고,
그렇게 조용히 물러선다.
그렇게 물러선 마음은
어느 순간 벽이 된다.
작은 무시, 반복되는 상처, 말 없는 외면.
그리고 끝끝내 누군가 내 울타리를 넘보는 순간,
마음은 마지막 방어기제로 분노를 꺼내 든다.
그건 누군가를 공격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여기까지가 내 한계야”라고 외치는 절규에 가깝다.
분노는 본심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 훨씬 먼저,
슬픔이 있었고, 서운함이 있었고, 기대가 있었고,
참아왔던 애씀이 있었던 사람의 감정이다.
화를 내고 나서
뒤돌아 앉아 조용히 우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면,
우리는 그제야 안다.
그 분노는 누군가를 밀쳐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붙잡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걸.
나 역시 그랬다.
참고, 참고, 또 참다가
터뜨리듯 쏟아낸 말들 뒤에
남는 건 후회와 자책뿐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알게 됐다.
그건 내가 미성숙해서가 아니라,
너무 오래 나를 보호하지 못한 채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걸.
분노는 나쁜 게 아니다.
다만,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그 울타리 안에는
외롭고 지친 마음이 앉아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사실 누구보다 안전하고 따뜻한 이해를 원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슬펐다.
어떤 기대가 어긋났고,
마음 한편이 쓸쓸하게 무너졌다.
그때는 몰랐다.
그 감정의 바닥이 그렇게 깊을 줄은.
슬픔은 겉으로 표현하기 비교적 쉬운 감정이다.
눈물이 있고, 말이 있고, 어쩌면 공감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슬픔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감정은,
그 아래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는 걸.
슬픔을 더듬어 내려가면
좌절이 나온다.
몇 번이고 기대해 봤지만,
결국 돌아오는 건 이해받지 못한 느낌.
말해봤자 바뀌지 않는 현실.
그래서 결국 포기하게 된 마음.
좌절은 조용한 절망이다.
화도 내지 못하고,
뭘 더 시도할 힘도 없을 때,
마음은 말없이 고개를 떨군다.
그 좌절의 밑바닥엔
수치심이 있었다.
‘내가 뭔가 잘못했나?’
‘괜히 기대했나?’
‘내가 과했나?’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작게, 깊게, 천천히
마음을 잠식해 들어왔다.
그래서 어떤 감정은
표현할 수가 없다.
‘괜히 민망해질까 봐’
‘감정이 크다고 보일까 봐’
‘나약해 보일까 봐’
그런 생각에
슬픔조차 억누르고,
좌절은 숨기고,
결국 남는 건
“나는 그냥 괜찮아”라는 말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싶다.
내가 느끼는 감정의 ‘첫 목소리’가 아닌
마지막 울림을.
내 슬픔 아래에 있는 좌절,
그리고 그 좌절이 품고 있는 수치심까지도
내 감정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나는 더 이상
내 감정과 싸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일어나기가 너무 버겁고,
평소엔 아무렇지 않던 일조차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
딱히 슬픈 일도 없고,
화나는 일도 없는데,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
그럴 땐 스스로를 이렇게 탓하게 된다.
“왜 이렇게 의지가 없지?”
“나 왜 이렇게 게으르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 알게 됐다.
그 무기력의 정체는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온 것이었다는 걸.
하나하나 정리하지 못한 감정들이
마음 안에서 뒤엉켜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할지 모를 정도로
복잡하게 엉겨 있는 상태.
그래서 마음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방어적 마비 상태에 들어간다.
무기력은 ‘의욕 부족’이 아니다.
그건 오히려
지나치게 많은 감정의 흔적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날들,
감정을 눌러 참았던 순간들,
상처받고도 말하지 못했던 기억들.
그 모든 것들이 쌓이고 쌓여
어느 날,
몸이 먼저 멈추는 것이다.
나는 그런 날들을 부끄러워했었다.
남들처럼 부지런하지 못하고,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소파에 앉은 채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나를.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건 게으름이 아니라,
마음이 나에게 보낸 구조 요청이었다는 걸.
그래서 요즘은
무기력한 나를 다그치기보단
조금 더 내 마음에 귀 기울여보려 한다.
“너 지금, 감정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거지?”
“괜찮아, 다 느끼지 않아도 돼.
오늘은 그냥 조용히 있어도 돼.”
그렇게 나를 향해
한 발짝 물러나는 순간,
마음은 아주 조금,
다시 움직일 준비를 시작한다.
화를 낸 적이 별로 없다.
기분이 상해도 웃어넘기고,
속이 끓어올라도
“아니야, 그냥 내가 예민한 거지”라고 넘겼다.
분위기를 망치기 싫었고,
나 때문에 누군가 기분이 나빠질까 봐 두려웠다.
화를 낼 줄 몰라서가 아니라,
화를 내는 나를 누가 싫어할까 봐,
그게 무서웠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조용히 상처받는 쪽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마음속 어딘가는
계속해서 붉게 멍들고 있었다.
화를 삼키는 게 익숙해질수록,
감정 표현은 어색해지고,
결국 나는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화를 내지 않는 건,
착한 게 아니다.
그건 대개
두려움에 익숙해진 방식이다.
갈등이 곧 거절이었던 기억들,
말을 꺼냈다가 상처받았던 순간들.
그 모든 것들이
마음을 조용히 닫게 만든다.
그렇게 오래 참은 마음은
나중엔 분노조차 느끼지 않는다.
그저 멍하니,
조용히,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하루를 넘긴다.
그리고 밤이 되면
감정 없는 얼굴로 잠에 든다.
하지만 그건
감정이 없는 게 아니다.
마음이 아프게 잠들어 있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
화를 건강한 방식으로 표현한다는 건
상대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나를 지키는 감정의 언어라는 것.
그 언어를 몰라
마음이 멍들고,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졌다는 걸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보다
더 큰 용기는
감정을 꺼내는 일이었다.
나는 지금,
내 마음이 다시 깨어나길 바라며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를 연습하는 중이다.
눈물이 나야 할 순간인데
울지 못한 날이 있다.
목 끝까지 올라온 감정을
그저 꾹 삼키고,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야 했던 날들.
“이 정도는 다 겪는 거잖아.”
“지금 울면, 더 약해질 거야.”
“지금 무너지면, 아무도 받아주지 못할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며
말하지 못한 슬픔을 가슴 한구석에 눌러두었다.
그 슬픔은 사라지지 않았다.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형태를 바꿔 조용히 스며들었다.
어느 날은 무기력으로,
어느 날은 짜증으로,
또 어느 날은
아무 이유 없는 자괴감으로 얼굴을 바꿨다.
그리고 나는
그게 슬픔이었다는 걸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슬픔을 참는 사람은
약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걸 감당해 온 사람이다.
마음을 털어놓을 자리가 없었고,
들어줄 사람이 없었고,
말을 꺼내는 순간 무너질 것 같았기에
혼자 조용히 견디는 법을 먼저 배운 사람.
그 견딤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은 단단해지지 않고
오히려 조용히 깎여 나간다.
소리 없는 슬픔이 마음의 기둥을 갉아먹는다.
나는 그 감정을 너무 늦게야 말할 수 있었다.
말했을 땐 이미 많은 것이 무너진 후였다.
그렇지만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슬픔은 드러낼 때보다
감춘 채 오래 붙잡고 있을 때
사람을 더 아프게 만든다는 것.
이제는,
울 수 있을 때 울고,
슬플 때 슬프다고 말하는 연습을 한다.
조금 어색해도,
괜찮다고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기 시작했다.
조용히 삼켰던 감정이
조용히 나를 아프게 만들기 전에,
나는 그 감정에게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화를 냈다.
별일 아닌 듯한 대화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높아졌고,
그 말이 나가고 나서야
스스로도 놀랐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났지?”
“이 정도로 예민한 일이었나?”
그러다 문득
속에서 뻗어 나온 마음이 있었다.
사실은… 그냥 너무 속상했던 거였다.
사람은 종종
분노로 감정을 포장한다.
화는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까.
“화났어”는 분명한 감정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엔 늘
서운함, 외면당한 감정, 말하지 못한 기대가 숨어 있다.
그건 때로
“왜 나만 이렇게 애쓰지?”
“왜 내 마음은 아무도 몰라주지?”
“왜 나는 늘 이해하는 쪽이 되어야 하지?”
같은 말로 쌓여 있다가,
결국엔 ‘화’라는 이름으로 터져버린다.
하지만 분노는
진짜 하고 싶은 말을 가리는 감정이다.
화의 껍질을 벗겨보면
그 안에는 자주
속상함, 외로움, 상처받은 기대가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화를 내고 나서
괜히 미안해지는 이유도
그 안에 있는 진짜 마음은
사실은 다정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누군가가 갑자기 화를 낼 때
그 말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그 말이 왜 나왔는지,
그 사람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는지,
조금 더 천천히 바라보려 한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묻는다.
“너 지금, 화난 게 아니라
속상한 거였지?”
그 질문 앞에서야
마음은 조금씩
진짜 이야기를 시작한다.
분노는 약한 감정이 아니다.
하지만 분노는
진짜 감정이 말해지지 못할 때 나오는
두꺼운 침묵의 옷이다.
그 옷을 벗고 나면,
말할 수 있는 슬픔이 있고,
기다리던 이해가 있고,
사실은 단 한 마디,
“나 이거 너무 속상했어”라는 말이
너무 오래 눌려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해야 할 일들은 책상 위에 그대로였고,
방은 흐트러졌고,
시간은 멀뚱히 흘러갔다.
그런 날,
무엇보다 나를 지치게 하는 건
게으름이 아니라, 내 안의 나였다.
“왜 또 이렇게 흘려보냈어.”
“이럴 거면 뭐 하러 계획을 세워?”
“진짜 넌 답이 없다.”
조용한 방 안에서
그 말들을 가장 많이 들려준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마음은 쉴 틈 없이 조여왔다.
해야 할 일 앞에선 숨이 막히고,
못한 일 앞에선 죄책감이 밀려오고,
결국 나는
일은 하지 못하고,
나를 혼내는 일만 열심히 하며 하루를 다 써버렸다.
나를 다그치는 그 목소리는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릴 때부터 들었던 말들,
비교당했던 기억,
실망시켜선 안 된다는 강박.
그게 이제는 내 안으로 자리를 옮겨
스스로를 밀어붙이는 목소리로 남은 건 아닐까.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날이 필요하다.
몸도, 마음도
잠시 멈추는 시간이 있어야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이
조용히 스스로 가라앉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나는
그 쉼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나를 몰아세우느라
그 하루의 고요함마저 빼앗아 버렸다.
오늘 나는 이렇게 말해보려 한다.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야.
마음을 붙잡느라
애쓴 하루였어.”
다그치지 않고,
달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나와 함께 있어주는 말.
그 말 한 줄이면,
내일은 조금 덜 아픈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