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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돌아왔을 때, 마음은 거기 있었다


"이 글은 상담심리학자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동행하며

그들의 감정 여정을 상징적으로 재구성한 가상의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마주하기 전엔 끝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이젠 괜찮다고,

그 일은 이미 지나간 과거라고.


괜한 감정 소비 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였고,

생각날 틈 없이

바쁘게 살아냈다.


그렇게만 하면

끝나는 줄 알았다.

그 감정도, 그 기억도, 그 사람도.


그런데

문득,

불쑥,

아무 이유 없이

그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잊은 줄 알았던 마음이

다시 올라오고,

참아왔던 감정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때 알았다.

마주하지 않은 건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걸.


감정은 묻는다고 사라지지 않고,

기억은 무시한다고 흐려지지 않는다.


말하지 못한 말은

언젠가 몸이 대신 아프게 하고,

풀지 못한 마음은

다른 관계를 불편하게 만든다.


나는 회피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그 감정을,

그 안에서 서럽게 울던 나를.


그저 잘 덮는 것이

잘 넘어가는 거라고 믿었지만,

마주하지 않은 감정은

결국 돌아온다.


그리고 마주한 날,

나는 울었다.

생각보다 훨씬 오래,

생각보다 훨씬 깊게.


그 감정은 무섭지 않았다.

그건 단지

오랫동안 기다려온 마음이었다.

언제쯤 나를 좀 바라봐줄 수 있겠냐고

조용히 문을 두드려온 감정이었다.


나는 이제 안다.

상처는 무시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정직하게 바라봐 줄 때

비로소 사라질 수 있다는 걸.


관계도 그렇고,

감정도 그렇고,

기억도 그렇다.


마주하지 않으면,

끝났다고 해도

사실은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


마주한다는 건

반드시 누군가에게 말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건 내가 나에게 말 걸기 시작하는 것,

다시 나와 연결되는 것이다.


나는 도망치기보다

이제는 가만히 멈춰 서는 쪽을 선택하려 한다.


무섭더라도,

불편하더라도,

마주한 감정만이

나를 떠나 줄 수 있으니까.







감정은 마주했을 때만 이름을 가질 수 있다


가끔은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저 마음이 무거웠고,

말수가 줄었고,

숨이 조금 얕아진 채

하루를 버텼다.


"기분이 왜 그래?"

누가 물어오면

“그냥… 모르겠어.”

대답을 피했고,

내 안에서도 똑같이

모른 척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덜 아플 거라 믿었고,

그게 덜 복잡한 삶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상했다.

감정을 무시한 날이 쌓일수록

나는 점점 더

나와 멀어지고 있었다.


웃는 게 어색했고,

울고 싶어도 눈물이 안 났고,

기뻐도 그 기쁨을 오래 머금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날,

그 마음을 그냥 두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봤다.


‘지금 이 감정, 혹시 슬픔인가?’

‘혹은 외로움? 무력감?

아니면 말 못 한 분노?’


그 감정을

조금만 더 가까이, 부드럽게 마주했을 뿐인데,

희미했던 마음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 이건 상처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구나.”

“이건 인정받고 싶었던 갈망이었어.”

“이건 서운함에 눌러둔 분노였네.”

"이건 사랑받고 싶었던 소망이었어."


그제야

그 감정들은 나를 향해

조용히 이름을 말해주었다.


감정은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하지 않으면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감정은 머물러 있다.

하지만

우리가 외면하면

그 자리에 멍든 채 남아 있을 뿐이다.


감정을 마주하는 건

아픈 과거를 꺼내는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나를

온전히 이해하려는 용기다.


감정에 이름이 붙는 순간,

그건 단지 ‘기분’이 아니라

경험이 되고, 메시지가 되고,

내가 나에게 보내는 손 편지가 된다.


나는 이제

감정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기쁘면 기쁘다고,

두려우면 두렵다고,

서운하면 서운하다고

속으로라도 나에게 말해주는 연습.


그 연습 속에서

감정은

조금씩 방향을 잃지 않게 되고,

나는 나와 더 가까워진다.


감정은

마주했을 때만

제 이름을 말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우리는 더 이상 낯선 내면에

혼자 서 있지 않게 된다.







무시했던 마음이 가장 오래 머물렀다


‘그땐 별일 아니었지.’

‘금방 지나갈 감정이었어.’

‘시간이 지나면 이 감정은 사라질 거야'’


그렇게 넘겼다.

조금 울컥했지만 참았고,

서운했지만 아무 말하지 않았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그 감정을 조용히 밀어냈다.


그 감정은

작았다.

짧았고,

그날 하루 머물다 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소란스럽게 떠났을 줄 알았던 감정이

그 자리에 조용히 머물고 있었던 거였다.


시간이 흐르고,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그 감정은 조금씩 몸집을 키웠다.


새로운 일이 벌어진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숨이 막혔고,

사람의 말 한마디가 지나치게 날을 세우게 했고,

괜찮아야 할 장면에서

나는 이유 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알았다.

그때 무시했던 마음이

아직 내 안에 머물고 있었다는 걸.


감정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자리만 옮겨 조용히 주저앉아 있다가

결국 언젠가는 나를 부른다는 걸.


나는 그 감정을

기억에서 지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말 한마디가 서운했다는 걸.

그 상황이 나를 얼마나 외롭게 했는지를.

그리움과 애틋함이 혼재된 마음들조차.


그리고 무엇보다

그 감정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고,

심지어 나조차도

모른 척하고 지나쳤다는 걸.


감정을 무시한 건

그 순간만 괜찮자고 만든 선택이었지만

그 대가를 치른 건,

지금까지도 울림으로 남아 있던 나였다.


이제는

작은 마음일수록

조금 더 천천히 들여다보려 한다.

애써 느끼지 않으려 넘겼던 감정들.


그 감정들이

오히려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가장 오래 머물며 나를 흔든다는 걸

이제는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내 안에

묵묵히 머물고 있는 감정이 있다면,

그건 사라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아직 그것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숨었던 감정에게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 마음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자주

아닌 척하며 지나왔다.


조금 무서웠고,

조금은 낯설었고,

무엇보다 그 마음을 꺼내면

다시 아플 것 같았다.


처음엔 슬픔이었고,

어느새 서운함이 되거나 그리움이 되었고,

결국엔 “그냥 괜찮지 않은 기분”이라 이름 붙이며

어딘가 깊숙한 곳으로 밀어두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조용히

내 하루를 서성이곤 했다.


어느 날은

익숙한 냄새에 괜히 울컥했고,

어느 날은

사소한 말 한마디에 오래 맴돌았고.


그러면서도

나는 자꾸 스스로를 설득했다.

“지금은 아닐 거야.”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거지.”

“지나가면 괜찮아질 거야.”


그러던 어느 날,

아무 일도 없었는데

괜히 마음이 허전한 하루가 있었다.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도

내가 그 자리에 없는 것 같은,

다정한 말에도

어쩐지 멀어진 기분이 드는 날.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 마음은 사라진 게 아니라

내가 멀어졌던 거라는 걸.


그날,

나는 가만히 마음속으로

작은 말을 건넸다.


“지금은… 네 이야기를

조금 들어볼 수 있을 것 같아.”


그 마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어딘가에서

살짝 숨을 고르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그 마음에게

처음으로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다그치지 않고,

어설프지 않게

그저 부드럽게

그 마음 옆에 앉아

말을 건넸다.


“그땐 많이 힘들었지.”

“그 감정, 나 이제야 알 것 같아.”


놀랍게도

그 마음은 나를 탓하지 않았다.

묻어두었다고,

외면했다고

서운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다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주기를.


그 마음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는 걸.

말하지 않아도,

표현하지 않아도

그 마음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는 걸

나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 마음에게

가끔 말을 건넨다.

소리 내진 않지만,

내 안에 조용히 남겨두고.


그리고 느낀다.

감정은 나를 아프게 하려는 게 아니라,

나와 다시 이어지려는 방식이었음을.


감정도, 사람도

가끔은

먼저 손을 내밀어 줄 누군가를

기다릴 때가 있다.


나는

그 마음에게

먼저 다가갔다.


그러자 그 마음도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 없이

작게, 부드럽게

나를 안아주었다.


“이제 그만 도망쳐도 괜찮아.”

“네가 돌아와서… 다행이야.”







마주침은 회피를 품어 안을 때 시작된다


나는 오랫동안

회피했다.


감정도, 상황도,

사람도, 나 자신도.


그게 나쁜 줄은 알았다.

그 모든 걸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땐

그렇게라도 살아야 했던 시기였다.


마주하기엔

너무 벅찼고,

정면으로 부딪히기엔

내 마음이 너무 약했다.


그래서 나는

돌아서고,

모른 척했고,

“지금은 아닐 거야”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시간을 밀어냈다.


하지만 마음은 기억하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외면당할 수는 없다는 걸.


무심코 들은 말 한마디에

가슴이 철렁했고,

혼자 있는 밤이면

어딘가 텅 빈 듯한 기분이 날 덮쳤다.


나는 회피한 게 아니라

견딘 거였다.

그때의 나는

감정을 감당할 힘이 없었고,

그저 하루를 무사히 통과하는 게

목표였을 뿐이었다.


그걸 인정하는 데

참 오래 걸렸다.


그 후,

어느 날 나는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


"그래, 난 그땐 피할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그건

비겁한 게 아니라,

나를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어."


그 순간,

마주침이 시작되었다.


마주한다는 건

갑자기 강해지는 일이 아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던 마음을

천천히,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이다.


그리고 그 안에

회피했던 나도 함께 안아주는 일이다.


회피를 탓하지 않고,

이해하려고 할 때

감정은 조금씩 흐르기 시작했다.


멈춰있던 마음이

다시 움직였고,

닫혀 있던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진짜 마주침은

회피를 내쫓는 데서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회피를 품어 안고,

“그때 넌 너대로 잘 살아냈어”라고

내 마음에게 말을 걸어주는 순간

비로소 시작된다.


이제는 안다.

나는 그저 나를

살리고 싶었던 거였다.

그래서 돌아섰던 거고,

그래서 이제

돌아서서 다시 마주 볼 수 있는 힘이 생긴 거다.







두려워서 외면했던 감정이 나를 살리고 있었다


그 감정을 처음 느꼈던 건,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던 날이었다.

별것 아닌 말 같았는데,

그날 이후로 나는 내 안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감정과 마주하게 되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왜 그 말에 이렇게 흔들리는지,

내가 왜 이런 마음을 느끼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멈췄다.

그 감정을 끝까지 따라가면

어딘가에서 무너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감정보다 일상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고,

그냥 견디면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조금 바쁘게 지냈고,

사람들 속에 섞였고,

그저 괜찮은 척,

잘 살아가는 척했다.


하지만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피한 만큼,

모른 척한 만큼

더 깊어지고, 더 단단해졌다.


그리고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그 감정은 다시 말을 걸어왔다.

낯익은 공간,

낯익은 사람,

낯익은 기억을 지나며.


나는 다시 그 감정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제야 알았다.


그 감정은 나를 해치러 온 게 아니었다.

오히려 오래전부터

나를 살리기 위해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존재였다는 걸.


서운함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넌 오래 기다렸어. 너무 조용히, 너무 오랫동안.”

두려움은 속삭였다.

“이 관계는 너에게 소중했잖아. 잃고 싶지 않았잖아.”

그리고 슬픔은

그 모든 말을 대신해 눈을 감고 있었다.


그 감정을 마주한 그날,

나는 조용히, 아주 천천히

잊고 지냈던 마음 한 조각을 다시 꺼내볼 수 있었다.


어쩌면

그 감정 안에는

말하지 못한 그리움,

끝내 건네지 못한 미안함,

그리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감정은 때때로

내가 멈춰야 할 지점을 조용히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나는 내 마음을 조금 더

부드럽게 안아볼 수 있었다.


지금은 안다.

감정을 꺼낸다는 건

상처를 들추는 일이 아니라,

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이라는 걸.


그 감정을 받아들였기에

나는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말없이 마음을 건드리는 그 모든 기억들 속에서

내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걸

내 마음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도망쳐도 따라오는 마음의 그림자


피하고 싶었다.

그 기억도,

그 감정도.


말하지 않았고,

생각하지 않으려 했고,

그냥 아무렇지 않게 살아내면 괜찮아질 거라 믿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시간이 지나고,

사람이 달라지고,

공간이 바뀌어도

마음 어딘가에서는

똑같은 감정이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


처음엔 우연이라 여겼다.

비슷한 상황이 반복된다고,

내가 예민해졌다고.


하지만 반복될수록 알게 되었다.

감정은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하지 않았다고

끝난 게 아니라는 걸.


어느 날 문득

아무렇지 않은 풍경 속에서,

뜻밖의 말 한마디에

묻어두었던 감정이

조용히 불쑥

나를 흔들었다.


그건 마치

도망쳐도 따라오는 마음의 그림자 같았다.

멀리 달아났다고 생각했는데,

해가 기울면

어김없이 내 발밑에 서 있는.


나는 자주 그 감정을 외면했다.

아프다고 말하는 게 미안했고,

다시 그때로 돌아가는 게 두려웠고,

그냥 덮고 지내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은

감정을 덮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 감정은 다른 얼굴을 하고

내 삶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불안처럼,

무기력처럼,

때로는 말끝의 날카로움이나

어딘가 모를 거리감으로.


감정은 묻는 존재였다.

“그때 왜 아팠는지,

이제라도 말해보지 않을래?”

“그 순간 참았던 마음을,

지금이라도 꺼내보면 어때?”


그 질문을 오랫동안 지나쳐오면

감정은 그림자가 된다.

앞만 보고 걸어가도

발밑에서 조용히 따라오는 무언가.


그 감정은

나를 무너뜨리려는 게 아니었다.

놓치고 간 마음의 조각,

끝내 이해받고 싶었던 내 마음의 일부였다.


그래서 요즘은

그 감정을 바라보려 한다.

조금 천천히,

조금 덜 두려워하며.

도망치지 않고

그림자에게 말을 걸어보는 연습.


감정은 마주할 때 비로소

그림자에서 빛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렇게 마주한 마음만이

조금씩 자유로워진다.







회피는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일 뿐


감정을 마주할 용기가 없을 때가 있다.

그 상황에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고,

그 사람의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온몸이 조용히 뒤로 물러서는 느낌.


그럴 때

우리는 말없이 돌아서거나,

괜히 딴소리를 하거나,

아무 일 없다는 듯 하루를 흘려보낸다.


사람들은 말한다.

“왜 그렇게 회피해?”

“그냥 마주하면 되잖아.”

“피한다고 해결되지 않아.”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말에는

지금 내가 얼마나 버거운지를

조금도 헤아리지 못하는 기운이 숨어 있다.


회피는 꼭 무언가를 피하고 싶은 게 아니라,

버티던 마음이 더는 감당하지 못해

잠시 숨을 고르는 선택일 때가 있다.


말하면 터질까 봐,

마주하면 무너질까 봐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다.


예전엔 나도 나를 자주 다그쳤다.

“왜 또 피하지?”

“왜 제대로 말을 못 해?”

“왜 마음을 솔직하게 꺼내지 못해?”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지금의 나는 안다.

나는 도망친 게 아니라,

숨이 차서 멈춰 섰던 거라는 걸.


마음도

자기만의 속도가 필요하다.

바로 직면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무 말 못 한 날이 있어도,

그게 용기를 잃은 건 아니다.


회피는 비겁함이 아니라,

마음이 아직 다 회복되지 않았다는 조용한 신호일지 모른다.


그리고 어떤 감정은

시간이라는 여백 속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익숙해지고, 회복된다.


그래서 지금은,

내가 한동안 피했던 그 시간들을

조금 더 다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건 내 마음이 나를 버린 게 아니라,

어떻게든 살기 위해

숨죽이고 기다리던 시간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회피는 끝이 아니라,

마음을 다시 꺼내기 위한 작은 쉼표다.


그리고 때로는

그 쉼표 덕분에

어떤 관계는 다시 시작될 수 있다.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따뜻하게.







감정을 외면할수록 감정은 더 또렷해진다


그때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니, 괜찮다고 믿고 싶었다.

조금만 지나면 흐려질 줄 알았고,

말하지 않으면 더 빨리 사라질 줄 알았다.


그래서 모른 척했다.

마음이 조금 흔들려도,

속이 조금 쓰라려도,

그냥, 그렇게 하루를 넘겼다.


“이 정도는 누구나 겪는 감정일 거야.”

“조금 참으면 괜찮아질 거야.”

“지금 꺼내면 더 복잡해질 테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외면했던 감정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아무 표현 없이

조용히 나를 기다리듯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감정은 점점

다른 모습으로 내 일상에 스며들었다.


설명하기 힘든 피로,

작은 말에도 흔들리는 마음,

자꾸만 반복되는 생각의 장면들.


무기력이나 짜증,

별것 아닌 일에도 날카로워지는 말투.

그 모든 것의 뒤에

제 자리를 찾지 못한 감정이 숨어 있었다.


감정은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조용히 머무는 존재라는 걸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이해받지 못한 감정은

더 오래 남는다.

설명되지 못한 마음은

더 자주 돌아온다.

외면한 만큼,

그 감정은 내 안에서

더 또렷해졌다.


감정은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찾아오는 게 아니었다.

그저

“나는 여기 있어”라고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감정을 꺼내 앉히는 연습을 하고 있다.

말로 다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고,

누군가가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내 마음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나 스스로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감정은 조금 덜 흔들린다.


감정은

서툰 말보다

따뜻한 인정 하나를 더 오래 기억한다.


“이렇게 느끼는구나.”

“그럴 수도 있지.”

그 한마디면

마음은 조금씩, 조용히 풀린다.


외면하지 않으려는 그 마음 하나로도

감정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마치 오래 기다린 누군가가

비로소 돌아올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내 마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동안,

나는 나를 돌보지 않았다.


바쁘다는 이유로,

견뎌야 한다는 이유로,

“지금은 감정을 꺼낼 때가 아니야”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며

내 마음을 조금씩, 멀리 밀어두었다.


해야 할 일들이 늘 먼저였고,

사람들의 눈치와 감정을 먼저 배려했다.

그리고 내 안의 조용한 슬픔,

어딘가 무겁게 쌓인 피로 같은 감정들은

자꾸만

“나중에 보자”

하며 밀쳐두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어느 날 문득,

나는 나에게서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걸 느꼈다.


마음이 없어진 게 아니었다.

내가 너무 오랫동안

그 마음을 찾아가지 않았을 뿐이었다.


마치 집을 떠난 아이처럼

내 감정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조용히 남겨져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처음엔

조금 두려웠다.

지금 다시 그 마음을 열면

모든 게 무너질까 봐.

꺼낸다는 건 다시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이라서.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아주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마음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마음은 그 자리에 있었다.

도망가지도 않았고,

서운해하지도 않았고,

그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괜히 울컥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 마음이

그렇게 오래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는 사실이

어쩐지 미안했고,

고마웠고,

어딘가에서

조금 안도되었다.


마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자리를 지키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속상했던 기억,

말하지 못했던 감정들,

이미 잊었다고 생각했던 것들마저도

사실은

내 안 어딘가에서

그저

내가 다시 돌아와 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마음에게 조금 더 자주 말을 걸어보려 한다.

“괜찮아?”

“오늘은 좀 어땠어?”

다그치지 않고,

재촉하지 않고

조금 더 다정하게 묻는 연습.


그건 거창한 자기 돌봄이 아니라,

그저

내가 나에게

다시 말을 걸기 시작한 시간이다.


마음은 떠난 게 아니다.

잊힌 채로,

조용히,

그 자리에 앉아

우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아무 말 없이,

그저 따뜻하게.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조용한 용기가 시작되었다


처음엔 도망치고 싶었다.

지금 이 감정을 마주하면

무너질 것 같았고,

이 관계를 들여다보면

돌이킬 수 없을까 봐

어딘가 두려웠다.


그래서 조용히 침묵했고,

애써 웃었고,

하루를 바쁘게 채우며

그 마음이 틈을 타지 않도록

나를 더 바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아무리 외면하고

덮어두려 해도

그 감정은

조용히,

내 안 어딘가에 그대로 있었다.


어느 날은

흘러나오던 노랫말 하나에,

또 어느 밤은

창밖 빗소리 하나에

나는 그 감정과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그때 알았다.

피한다고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

이건 꾹 누른다고 사라질 마음이 아니라는 것.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조용히 손을 내미는 감정이라는 걸.


그 깨달음은

절망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조용한

시작이었다.


누구 앞에서 말하지도 않았고,

누군가에게 설명하지도 않았지만

내 안에서

아주 작게,

조용히

끄덕인 순간.


“그래, 지금은 그냥 피하지 않기로 하자.”


그 작은 끄덕임이

조금씩 숨을 틔웠다.

상황은 그대로였지만,

그 안에서

나는 더 이상

숨어 있지 않았다.


감정은 여전히 깊었지만

그 감정 속에

조금은 나를

앉힐 수 있게 되었다.


용기는

커다란 결심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그저

피하지 않겠다는 마음 하나,

그것이면

충분한 순간들이 있었다.


우리는 자주

감정을 이겨내야 한다고 배우지만,

어쩌면

그보다 먼저 필요한 건

“이건 그냥 내가 느끼는 마음이구나.”

하고 조용히 마주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나는 완전히 용감하지 않다.

감정 앞에 멈칫하고,

관계 앞에서 조심스럽다.

그렇지만

그때 처음,

피하지 않겠다고 속삭였던 그날부터

나는 아주 조금씩

나를 다시 살려내고 있었다.







내가 외면한 감정은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잊고 싶었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땐 너무 벅찼고,

지금 꺼내면 무너질 것 같아서

나는 조용히 밀어두었다.


“지금 말하면 안 돼.”

“그냥 넘어가자.”

“괜찮아질 거야.”


스스로를 그렇게 설득하며

나는 천천히

내 마음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 일 없는 듯한 어느 날,

그 낯익은 마음이

문득 다시 찾아왔다.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지워졌다고 믿었는데

그 마음은

내 안 어딘가에서

조용히, 아주 조용히

살아 있었다.


노래 한 소절에,

누군가의 말투에,

비 오는 저녁 창가에서

그 마음은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떠났다고 믿었던 그것이,

사실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그 마음을 외면했다.

그건 방치가 아니라

그때의 나로선 최선이었다.


말하면 더 아플 것 같아서,

꺼내면 감당할 수 없을까 봐

나는 애써 모른 척한 채

지나왔다.


하지만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모른 척하는 동안에도

조용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무르기 위해서.


말 없는 친구처럼,

말을 꺼내기 전에 이미

내 표정을 알아채는 누군가처럼

그 마음은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와서 돌아와도 괜찮다고.

지금이라도 괜찮다고.

속삭이듯 말하는 듯했다.


그 마음을 다시 들여다봤을 때

나는 나를

조금 더 다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땐 정말 버거웠구나.”

“말하지 못한 것만으로도

얼마나 외로웠을까.”

“지금까지도

그 자리에서 기다려줘서 고마워.”


지금에 와서야

나는 조금씩 안다.

마음은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찾아오는 게 아니라,

우리를 잊지 않기 위해

조용히 기다리는 존재라는 걸.


그건 때로 사람과도

참 많이 닮아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순간들.

멀어졌지만 여전히 연결되어 있는 감정들.

다시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은 자리들.


그리고 그 마음은

지금도

조용히 거기 앉아 있다.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포기하지 않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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