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에서 회복으로 향하는 치유의 길
"이 글은 상담심리학자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동행하며 그들의 감정 여정을 상징적으로 재구성한 가상의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괜찮은 척했다.
별일 아닌 듯 지냈고,
웃기도 했고,
누가 물어보면 “응, 잘 지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문득문득
아무 말 없이 닫혀 있는 내 마음을
나조차 외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누군가 다가오면
괜히 불편해졌고,
친절한 말에도 방어가 먼저 앞섰다.
그러다 혼자 있는 밤,
작은 생각 하나에도
그 마음은 어김없이 저릿하게 반응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예민하지?”
“왜 이렇게 쉽게 지치지?”
그러다 문득,
속에서 아주 오래 잠들어 있던 감정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사실은…
그냥 너무 많이 상처받았던 거였다.
사람은 종종
마음을 닫은 채 살아간다.
누군가 또 실망시킬까 봐,
이번에도 또 아플까 봐.
닫힌 마음은 무뚝뚝하거나 차가운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지나치게 섬세하고,
작은 온기에도 반응하는
연약하고 따뜻한 마음이었다.
그 마음이 문을 닫은 건
세상을 향한 냉소 때문이 아니라,
누구보다 연결을 갈망했기 때문이었다.
상처받은 마음은 말이 없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조용히, 묵묵히,
“나도 괜찮아지고 싶어”라는 속삭임이 계속되고 있다.
나는 이제 안다.
누군가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도,
거리를 두는 것도,
마음을 지키기 위한 애처로운 방식이라는 걸.
그리고
그런 내 마음을 다그치지 않기로 했다.
문을 열기까지 시간이 걸려도 괜찮다고,
지금은 그저,
조금씩 틈을 내는 연습을 하면 된다고.
그리고 누군가 내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열지 못해 머뭇거릴 때,
이제는 안다.
그 마음은 아직도
다정한 온기를 기억하고 있고,
언젠가는 다시,
누군가를 향해 천천히 열릴 거라는 걸.
닫힌 마음은 끝이 아니다.
그건 회복의 시작점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다시 문을 열기까지,
우리는 기다릴 수 있다.
기다리는 동안
우리도 함께 문 앞에 앉아 있을 수 있다.
“괜찮아. 너, 천천히 와도 돼.”
그 말 한마디가
상처받은 마음에 다시 햇살이 스며들게 한다.
누군가의 말을 들었다.
조용한 목소리로
“요즘 너무 힘들어”라는 말을.
나는 그 말에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괜히 무거운 말이 나올까 봐
가볍게 웃어넘길까도 싶었고,
괜히 더 아프게 할까 봐
조심스러워지기도 했다.
그래서 잠시 침묵하다가,
그저 이렇게 말했다.
“응, 그럴 수 있어. 정말 많이 힘들었겠다.”
그 말이 끝나자,
상대의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
그제야 알았다.
어쩌면 이 사람이 원했던 건
해결이나 조언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 이해되고 있다는 느낌 하나였다는 걸.
공감은 거창한 말이 아니다.
누군가의 아픔을 전부 알아야 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저
“그럴 수도 있겠다”는 마음,
“네가 느낀 건 틀리지 않아”라는 시선이면
충분할 때가 많다.
공감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듣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말을 덧붙이고 싶어지고,
자신의 경험을 꺼내어
위로랍시고 내밀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공감은
내 말보다 상대의 마음이 더 중요한 순간을 견뎌내는 일이다.
침묵 속에서도 같이 있어주는 일이고,
울고 있는 사람 곁에
같이 앉아 있어 주는 일이다.
그런 순간이 쌓이면
마음과 마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다리가 생긴다.
흔들릴 수도 있지만,
무너지지 않고 건널 수 있는
작은 다리.
나는 이제,
누군가가 조용히 마음을 꺼낼 때
그걸 먼저 끌어안고 싶다.
무엇이 옳은지를 말하는 대신,
무엇이 느껴졌는지를 들어주고 싶다.
공감은 사람을 바꾸지 않는다.
하지만 공감은
사람을 외롭지 않게 한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서로를 살릴 수 있다.
조금은 더 따뜻하게,
조금은 더 다정하게.
마음이 멀어졌다고 느낀 건,
어느 날 갑자기였다.
예전 같지 않은 말투,
텅 빈 메시지,
답이 오지 않는 시간들.
그때부터 나는
상대가 나를 떠났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관심이 없고,
이젠 마음이 식은 거라고.
그래서 나도 서서히
마음을 접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어딘가 마음 한편은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다시 와주기를.
어느 날 다시
“잘 지내?”라는 말이 오기를.
그리고 어느 날,
아주 느리게,
정말 조심스럽게
그 사람이 다시 돌아왔다.
“미안. 마음이 복잡했어.”
“조금 시간이 필요했어.”
그 말에 나는
괜찮다고,
괜찮다고 여러 번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제야 알게 됐다.
관계가 멀어지는 건 종종 오해 때문이지만,
그 관계가 다시 살아나는 건
한 사람의 조용한 기다림 덕분이라는 걸.
사람과 사람 사이엔
예측할 수 없는 흐름이 있다.
가깝던 마음이 멀어지기도 하고,
멀었던 마음이 어느 날 다시
천천히 가까워지기도 한다.
그 사이에서
관계를 살리는 건
매달림이 아니라
기다림이다.
강요하지 않고,
다그치지 않고,
그저 한걸음 물러서서
상대의 리듬을 기다려주는 것.
그 기다림은 결코 수동적인 게 아니다.
그건 믿음의 다른 얼굴이다.
“너는 결국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야.”
“나는 여전히 여기 있어.”
그 말 없는 신호가
관계를 지탱한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기다림 속에서
한 번쯤 살아난 경험이 있다.
말없이 곁을 지켜준 사람 덕분에,
다시 손 내밀 수 있었던 순간이 있다.
그리고 이제는,
그 기다림을
내가 해주고 싶다.
한 사람의 기다림이
한 관계를 살려낸다는 걸
나는 안다.
그래서 오늘도 조용히,
여기서 기다린다.
서로의 연락이 끊긴 지
어느새 몇 주가 지났다.
처음엔 문자 한 통,
그다음엔 안부 전화,
그러다 이젠 아무 말도 오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우리 관계가 끝난 줄 알았다.
고장 난 듯,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문득문득 그 사람이 떠오르고,
그때 나눴던 대화들이
아직도 마음 어딘가에서 따뜻하게 살아 있다.
그걸 느끼는 순간
내 마음 깊은 데서
조용히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아, 이건 고장 난 게 아니라
그저 잠시 멈춰 있는 거구나."
관계는 기계처럼
망가지고 부서지는 게 아니다.
때론 멈춰 있을 뿐이다.
서로가 너무 지쳐서,
혹은 서로가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을 만큼
조심스러워졌기 때문에.
그건 끝이 아니라
멈춤이다.
숨을 고르는 시간이고,
감정의 균형을 다시 맞추기 위한
조용한 정지 상태다.
멈춰 있다는 건
다시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다.
한 사람이 손을 내밀면,
다른 사람도
아직 거기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관계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는 이제
관계를 너무 쉽게 '끝'이라 말하지 않는다.
침묵이 길어져도
상대가 내 마음을 모르는 것 같아도
그건 고장이 아니라 멈춤일 수 있다는 걸 기억한다.
기억은 남아 있고,
감정은 어딘가에 머물러 있으며,
우리가 함께 웃었던 순간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는 안다.
관계는 그렇게 쉽게 망가지지 않는다.
그저,
잠시 멈춰 서 있을 뿐이다.
그 사람과 말없이 앉아 있었던 날이 있다.
별다른 이야기도 없이,
그냥 같은 공간에 조용히 머물렀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시간이 지나고 나니
마음이 좀 괜찮아졌다.
무슨 특별한 말을 들은 것도 아니고,
누가 문제를 해결해 준 것도 아닌데
내 안에 있던 불안이
조금씩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그때 알았다.
말보다 먼저,
존재가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다는 걸.
우리는 너무 자주
말로 위로하려 한다.
뭔가를 설명해야만 관계가 유지되는 줄 알고,
공백을 채우기 위해
서둘러 입을 연다.
하지만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같이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그걸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순간.
그게 바로
정서적 안정감이 깃드는 자리다.
사람은 원래
관계를 통해 마음을 조율하는 존재다.
누군가의 눈빛,
호흡,
작은 손짓 하나가
불안정했던 감정을 붙들어준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자주 쌓일수록
사람은 덜 흔들리고,
덜 무너진다.
함께 있음이 주는 안정감은
크게 요란하지 않다.
티도 잘 나지 않는다.
그저,
마음 안쪽 어딘가에
잔잔한 평온을 심는다.
나는 이제
누군가가 힘들다고 말할 때
먼저 묻는다.
“내가 곁에 있어도 괜찮을까?”
그저 함께 있어주는 걸로도
충분할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혼자서 무너지지 않도록
옆에서 조용히 지켜주는 사람.
그리고 그 존재만으로
마음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간다.
모두와 연락이 끊긴 어느 저녁이었다.
휴대폰은 조용했고,
그날따라 유난히 방 안이 넓어 보였다.
마치 나 혼자 남겨진 것 같았다.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은 사람처럼.
익숙해진 고요가
그날은 유난히 서러웠다.
외로움이란
혼자 있는 시간이 아니라,
누구와도 마음이 연결되지 않는 상태라는 걸
그날 알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한 사람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별다를 것 없는 말투,
아주 짧은 안부였지만,
그 순간 마음 안쪽이
살짝 흔들렸다.
“이 사람이 지금 나를 떠올렸구나.”
“나를 잊지 않았구나.”
그것만으로도,
외로움이 조금 덜했다.
외로움은
누가 곁에 없어서 생기는 게 아니라,
누가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까 봐 생기는 감정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내 감정을 묻지도 않고
조용히 다가와줄 때,
그 자체로 마음은
살아 있다는 신호를 받는다.
그렇게
외로움의 끝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면,
그건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내가 다시 연결될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 사람은
무언가 대단한 걸 한 게 아니었다.
그저 나를 기억했고,
내가 여전히 의미 있는 존재임을 알려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따뜻한 미세한 손길이
깊은 외로움 속에서
나를 다시 꺼내주었다.
나는 이제 안다.
누군가에게 다가간다는 건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깊은 위로일 수도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게,
어쩌면 외로움의 끝에 서 있는 누군가에게
지금 당신의 한마디가
한 사람의 하루를 살리는 온기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다시 그 끝에 서게 될 때,
또 다른 누군가의 손길이
내게 닿아오길 조용히 바란다.
무너졌던 하루가 있었다.
별일 아닌 말에 상처받았고,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란 생각이
마음속을 가득 채우던 날.
그날, 나는 누군가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지도,
위로받고 싶지도 않았다.
말로 건드려지기 싫을 만큼
감정이 날카롭게 서 있던 날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왔다.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앉아만 있었다.
묻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도 없었고,
“괜찮아?”도 없었다.
그저 내 속도에 맞춰
같이 조용히 머물러주었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씩 내려앉았다.
그 어떤 말보다
그 침묵의 온기가 더 깊게 위로가 되었다.
사람은 때로
말보다 존재의 무게로 위로받는다.
아무 말 없이 옆에 있는 사람은
감정을 해석하거나
원인을 파악하려 들지 않는다.
그 대신,
당신이 어떤 상태에 있든
그 자리에 함께 있어주는 걸로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드물다.
조언 대신 기다림을 선택하고,
충고 대신 침묵을 지켜주는 사람.
마음이 약해졌을 때,
그런 사람 하나만 곁에 있어도
우리는 다시
견딜 힘을 얻는다.
나는 이제 안다.
무너졌을 때 기억나는 사람은
위로의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 말 없이도 곁에 있어준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가 나처럼 힘들어할 때
그저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말보다
함께 있다는 감정이 더 크게 전해지는
그런 사람.
한 번 부서진 마음은
다시 붙는 데 시간이 걸린다.
특히 그 마음이 ‘신뢰’라는 이름이었다면,
그 조각을 다시 맞추는 일은
단순한 용서보다 훨씬 더 어렵다.
“다시는 그 사람을 못 믿을 것 같아.”
“이젠 내 마음을 닫을래.”
그렇게 결심했는데,
어느 날 아주 작고 낯선 장면 앞에서
살짝 흔들리는 마음을 느낄 때가 있다.
신뢰는 멋진 말 한마디나
대단한 사과로 회복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작은 변화들 속에서 자라난다.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는 말,
조금 더 따뜻해진 눈빛,
듣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침묵.
그 사소한 반복이 쌓이고 쌓여
마음은 어느 순간
“이 사람, 이번엔 다를지도 몰라”
하는 희미한 희망을 품기 시작한다.
그 희망은
기대가 아니라 관계에 대한 유연한 애씀이다.
신뢰는 단순히 다시 믿는 게 아니라,
“다시 다가갈 수 있다”는 나의 감정 능력 자체가 회복되는 일이기도 하다.
상대만 변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나도,
다시 나의 마음을 열고,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넘어서야만
그 신뢰는 조금씩 자랄 수 있다.
나는 그런 과정을 겪어본 적 있다.
닫아버렸던 마음을
다시 열기까지 수십 번 망설였고,
조금씩 바뀌어가는 그 사람을 보며
나도 몰래 마음이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신뢰한 건 그 사람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내 마음의 회복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무너졌던 신뢰가 다시 자라날 때,
우리는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을, 관계를, 그리고
스스로의 회복 가능성을.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도
문득 외로울 때가 있다.
말은 오가지만, 마음은 도착하지 않는다.
그럴 땐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아무도 진짜 내 마음을 모르는 것 같아.”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인간관계를 맺고,
그중 몇몇과는 꽤 깊은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도 어느 순간,
“이런 말, 누구에게도 못 하겠어”
라는 생각이 불쑥 들 때가 있다.
그건 내가 까다로워서가 아니라,
마음을 내놓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어떤 한 사람 앞에서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
그 사람에게 조용히 받아들여졌을 때,
마음은 살짝 놀란다.
그 사람은 고치려 하지 않고,
가르치려 하지 않고,
“나도 그런 적 있어”라는 말 한마디로
내 마음을 먼저 인정해 준다.
그 순간, 마음은 달라진다.
세상 전체가 이해해주지 않아도
단 한 사람이 진심으로 이해해 줄 때,
내 마음은 다시 살아난다.
벽처럼 굳어 있던 감정이
조금씩 녹기 시작한다.
그 사람은 어떤 특별한 조언을 한 것도 아니고,
대단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그저 “당신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태도로
내 마음을 회복시켜 준다.
나는 그런 사람을
‘기적 같은 사람’이라 부른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나는 나를 다시 믿을 수 있게 되었고,
내 마음도 틀리지 않았다는 걸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나를 이해해 주는 단 한 사람”의 존재는
가끔은 치료보다 더 깊은 치유가 된다.
그 존재 하나로,
사람은 다시 세상에 기대를 품는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한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사람 사이에 둘러싸여 있어도
고립감을 느낄 때가 있다.
말은 오가지만 마음은 닿지 않고,
웃고 있지만 어느 순간
혼자인 것 같은 감정이 스며든다.
그 고립은 격리와는 다른 감정이다.
‘이해받지 못하는 느낌’이 쌓여 만들어지는 조용한 단절.
내가 말해도 달라질 게 없을 것 같고,
말을 꺼낼수록 더 외로워질까 봐
입을 다물게 되는 감정의 습관.
그렇게 마음은 점점
자기 안에 웅크리게 된다.
사람이 무서운 게 아니라,
다시 외면당할까 봐 조심스러운 것.
사람을 향한 마음이 아니라,
실망을 향한 기억이 내 마음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아주 작은 어떤 계기로
마음이 미세하게 흔들릴 때가 있다.
무심한 듯 내민 말 한마디,
괜찮냐는 눈빛,
아무 의도 없이 건넨 “네 말, 알겠어”라는 반응.
그건 큰 위로나 멋진 공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이
닫혀 있던 내 마음 어딘가에
조용히 틈을 만들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연결은 드라마틱하게 시작되는 게 아니라,
아주 사소한 이해의 순간에서 시작된다는 걸.
그리고 그 사소함이
고립에서 연결로 방향을 바꾸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던 이야기,
표현할 수 없던 감정,
조용히 숨겨둔 상처들이
누군가의 진심 앞에서
조금씩 말을 시작할 준비를 한다.
그게 연결의 시작이다.
나는 지금도 종종 고립의 감정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안다는 것이다.
언젠가 다시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 믿음이
내 마음을
조금 더 부드럽게 살아가게 한다.
말하지 않아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봐 주는 시선.
설명하지 않아도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질문하지 않는 자리.
그런 곳이 있다면,
우리는 굳이
억지로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된다.
소속감은 그런 곳에서 시작된다.
소속감은 단지 어딘가에 ‘소속돼 있다’는 상태가 아니다.
그건 내가 그 안에
존재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감각이다.
‘어떤 역할’이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인정받는 경험.
그 경험이 마음을 서서히 회복시킨다.
오랫동안 혼자였던 사람은
처음엔 그 소속조차 낯설다.
불편하고 조심스럽고,
“내가 여기 있어도 될까?”
하는 마음이 앞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 자리에 나의 말투, 기척, 표정, 빈자리까지
그대로 스며들기 시작하면
마음은 조금씩
자리를 내어주기 시작한다.
그때야 비로소,
치유가 시작된다.
사람은 누구나
관계 안에서 다친다.
그리고 결국
다시 관계 안에서 회복된다.
그 모든 관계가 이상적일 수는 없지만,
단 한 사람,
단 한 무리 안에서라도
내가 나로 있어도 괜찮은 경험이 주어진다면
그건 그 어떤 치료보다 더 근본적인 힘이 된다.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어색한 웃음으로 버티던 내가
어느 날
내 이야기를 꺼냈고,
그 이야기를 그 누구도 고치려 하지 않았던 그날,
나는 처음으로 이렇게 느꼈다.
“아, 나도 누군가의 안에 있구나.”
그 감정은
고립으로 뒤틀렸던 내 자존감을
조용히 되살려냈다.
소속감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인정받는 자리에서 생긴다.
그리고 그 뿌리는
내 마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영양분이 된다.
누군가가 곁에 있어도
문득 마음이 혼자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아무리 말을 해도
그 말이 공중으로 흩어지는 것 같고,
함께 있는 장면 속에서도
내 마음만 따로 떨어져 있는 느낌.
그럴 때면
세상이 어쩐지
조금 더 낯설고,
내가 내 삶에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순간엔 고립감을 느낀다.
그게 꼭 누가 나를 외면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어디에도 붙지 못할 때
그 감정은 저절로 스며든다.
그리고 그 외로움은
요란하게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천천히
마음 깊은 곳을 적셔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떤 날은
지극히 평범한 말 한마디에
그 고립이 아주 잠깐
풀리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나도 그런 적 있어.”
“그 말… 나도 알 것 같아.”
“괜찮아, 거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그 말들이
꼭 무슨 해답이 되진 않지만,
마음을 다시 사람 쪽으로 기울이게 만든다.
혼자가 아니라는 건,
누가 항상 곁에 있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느낀 감정을 누군가도 느꼈고,
그 감정을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는 믿음.
그 믿음 하나로
사람은 무너지지 않고
하루를 더 버티고,
아주 작게는
다시 살아볼 힘을 얻게 된다.
나 역시 그런 순간을 기억한다.
모든 걸 내려놓고 싶었던 밤,
누군가가 건넨 짧은 말,
내 손을 꼭 잡아주었던 눈빛,
그리고 말없이 옆에 앉아 있어 준 그 시간.
그게 어떤 조언보다도
마음을 붙잡는 힘이 되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주는 위로는
시끄럽지도, 크지도 않다.
하지만 그 위로는
사람이 다시 사람을 향해 걷게 만드는 시작이 된다.
한 번 마음을 닫고 나면,
다시 여는 일은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상처는 곧 벽이 되고,
벽은 익숙한 고립이 된다.
“괜히 또 기대했다가 실망하면 어쩌지.”
“내가 먼저 다가가면, 또 무시당하진 않을까.”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결국 사람은
다시 손을 내미는 대신, 조용히 뒷걸음치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벽 사이로 아주 미세한 바람이 불어온다.
어느 한 사람의 표정,
작은 메시지 하나,
우연히 들은 말 한마디.
그것들이
마음 어딘가에 조용히 흔들림을 만들고,
닫혀 있던 마음이 아주 작게 틈을 낸다.
다시 손을 내민다는 건,
관계를 원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사람이 사람을 향해 손을 뻗는 그 행위 자체가
이미 감정의 회복이고,
존재의 복원이다.
나는 그런 순간을 기억한다.
서운했던 관계, 멀어진 사람,
오해로 끊긴 인연.
다시 손을 내밀기까지
수십 번의 망설임과 자존심의 진통이 있었고,
끝내 말 한 줄, 안부 한 마디를 꺼내는 데
용기보다 더 큰 용서가 필요했다.
그리고 알게 됐다.
손을 내밀었을 때,
그 사람이 잡아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잡아준다면 감사한 일이고,
잡아주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용감한 사람이라는 걸.
다시 손을 내밀 수 있다는 건
그 어떤 응답보다
내 마음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건 상처받은 마음이
다시 사랑을 향해 걷고 있다는 조용한 선언이기도 하다.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삶이 힘들었던 시절,
사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건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감각이었다.
그 누구도 내 마음을 모를 것 같고,
무슨 말을 해도
"그냥 지나갈 거야"라는 반응이 돌아올 것만 같을 때,
마음은 조금씩
자기 안으로 스며들어
작은 방처럼 고립되어 버린다.
하지만 마음은,
닫혀 있어도 완전히 죽지는 않는다.
어딘가, 아주 미세한 틈에서
연결되고 싶은 갈망은
조용히 숨 쉬고 있다.
그 갈망은 말을 걸고,
기다리고,
때로는 문득 혼잣말처럼 나온 감정에
누군가 응답해 주기를 바란다.
삶이 다시 피어나기 시작한 건
아주 작은 연결의 순간에서였다.
누군가의 눈빛,
진심 어린 공감,
질문 대신 들려오는
“나는 네 마음 이해할 수 있어”라는 짧은 말.
그 순간,
삶이라는 말이 다시 감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 무너지기도 하지만,
결국 사람을 통해
다시 살아난다.
누군가의 다정한 말이
깊게 묻어두었던 감정을 불러내고,
그 감정은 내 안의 생기를 흔든다.
연결은 마음만 살리는 게 아니라,
삶 전체를 다시 피워낸다.
나는 지금,
나를 살아가게 하는 건
결국 관계였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지나간 시간 속엔 오해도 있었고,
상처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을 붙잡아준 연결의 순간들이 있었다.
그게 오늘의 나를,
무너지지 않게 만들었다.
삶은 다시 피어날 수 있다.
한 사람의 다정,
한 문장의 온기,
한 번의 고개 끄덕임이
마음을 일으켜 세우고,
그 마음이 다시 삶을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