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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말과 뜨거운 마음

냉소와 분노, 그 이면에 숨은 다정한 진심에 대하여


"이 글은 상담심리학자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동행하며 그들의 감정 여정을 상징적으로 재구성한 가상의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무표정한 얼굴에도 감정은 남는다


말을 아끼는 사람이 있다.

표정이 단단하고,

감정의 색이 잘 보이지 않는다.


화를 내지도,

기뻐하지도,

슬퍼하는 기색도 드러내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그런 사람을

차갑다고 말한다.

무심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무표정한 얼굴에도

수많은 감정이 지나가고 있다는 걸.


무표정은 감정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감정이 너무 많아서,

그걸 다 드러낼 수 없어

입술을 다물고

표정을 닫아버린 사람의 방식이다.


사람이 너무 자주 상처받으면,

표정보다 먼저 마음을 숨기는 법을 배운다.

그건 차가움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한 조용한 기술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은

“괜찮아”를 입에 달고,

아무 일 없다는 듯 하루를 넘긴다.

하지만 그 마음 안에는

표현되지 못한 감정의 자국들이 층층이 쌓여 있다.


그 표정 없는 얼굴에

나는 슬픔이 보이고,

애씀이 보이고,

고요한 외침이 보인다.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표정을 드러내면

“예민하다”는 말이 돌아왔고,

감정을 표현하면

“피곤하다”는 반응이 돌아왔기에

조금씩

말과 표정을 줄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조차도 내 감정을

헷갈리기 시작했다.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잊어버린 거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

다시 표정을 배우는 중이다.

지나치게 꾸미지 않아도 되고,

웃기 싫은 날엔 웃지 않아도 된다는 걸,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도

감정은 여전히 나와 함께 살아 있다는 걸

조용히 인정하고 있다.







냉소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말투였다


"에이, 뭐 다 거기서 거기지."

"세상에 뭘 기대해. 기대 안 하면 편해."

"사람한테 뭘 바라니, 그냥 그러려니 해야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처음엔 그냥 ‘차가운 사람’ 같다고 느껴진다.

정이 없어 보이고,

감정 따위엔 관심 없어 보이고,

무언가를 비껴나가서 사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다 보면 알게 된다.

그 말투 안에는 한 번쯤 깊이 상처받았던 사람의 그림자가 있다는 걸.


냉소는 감정이 없는 사람의 말투가 아니다.

그건 오히려

너무 감정이 많았던 사람, 너무 기대하고 너무 상처받았던 사람의 말투다.


다정하게 말해본 적도 있고,

순진하게 믿어본 적도 있었고,

진심으로 다가가다 외면당한 적도 있다.

그 모든 일이 반복된 끝에

사람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차라리 처음부터 기대하지 말자.”

“상처받지 않으려면 먼저 웃어넘기자.”

그리고 그 말은

냉소가 아니라 자존심이었다.


냉소는 마지막 방어선이다.

애써 무표정하게, 가볍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 말투 뒤엔

들키고 싶지 않은 진심과 자존이 숨어 있다.


"난 괜찮아"라는 말이

실은 “나, 또 실망할까 봐 무서워”라는 뜻이었음을

우리는 종종 너무 늦게야 알아차린다.


나도 그런 사람을 오해했던 적 있다.

비꼬는 말이 습관처럼 입에 붙은 사람,

감정을 회피하는 듯한 사람.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됐다.

그 사람은

누구보다 마음이 많았고,

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거리를 먼저 만든 사람이었다는 걸.


그래서 요즘 나는

그런 냉소적 말투를 들으면

그 사람의 말보다

그 말이 나온 마음의 결을 먼저 바라보려고 한다.


냉소는 얼어붙은 감정이 아니라,

아직 얼어 있지 않으면

무너질까 봐 두려운 마음의 옷이다.

그걸 조금이라도 벗을 수 있게 하려면

논리나 조언이 아니라

온기와 기다림이 필요하다.







가까운 사람이 더 쉽게 상처가 된다


같은 말인데,

낯선 사람에게 들을 때보다

가까운 사람이 했을 때 더 아프다.


농담처럼 던진 말,

건성으로 넘긴 대답,

한 번의 침묵과

작은 무관심조차

가깝다는 이유로

훨씬 더 날카롭게 다가온다.


왜일까.

왜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애틋하고 아끼는 사람에게 더 쉽게 상처를 받을까.


그건 그 사람에게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나를 이해해 줄 거라는 믿음,

내 마음을 알아줄 거라는 희망,

상처를 줄 리 없다는 신뢰.


그 믿음이 어긋나는 순간,

작은 말 한마디도

관계 전체를 흔들 만큼 무겁게 다가온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우리는 더 많이 참고,

더 많이 쌓고,

더 쉽게 넘긴다.


하지만 그 안에서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천천히 눌리고, 눌리다가

어느 날

“왜 나만 애쓰고 있는 것 같지?”

라는 문장으로

불쑥 터져 나오곤 한다.


나는 그런 감정을 너무 잘 안다.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화를 내고 싶지 않아서,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서운함을 넘긴 날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하지만 이제는 안다.

가깝기 때문에 더 상처받는다는 건,

그만큼 그 사람이 소중하다는 뜻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요즘

조금 더 솔직해지려 애쓴다.

작은 서운함이라도

감정이 엉키기 전에

조용히 말로 건네는 연습.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내 마음도

사랑스럽게 다뤄져야 한다는 사실을

나 스스로에게도, 그 사람에게도 알려주는 것.







사랑받고 싶은 사람일수록 화를 삼킨다


화를 잘 못 낸다.

아니, 사실은 화를 내야 할 순간에도 그냥 웃어버린다.

속은 부글부글 끓는데도

겉으로는 “괜찮아”라고 말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될까 봐

조금 더 참는다.


그리고 그날 밤,

혼자 있는 방 안에서야

문득 울컥 올라온다.

“왜 그땐 말하지 못했을까…”


사랑받고 싶은 사람은

갈등을 피한다.

그건 착해서가 아니라,

갈등이 곧 거절이나 이별로 이어졌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한 번쯤, 솔직한 감정을 꺼냈다가

“왜 그렇게 예민하냐”는 말에 상처받았던 적,

혹은 관계가 멀어졌던 적이 있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 배운다.

“화를 내면, 사랑받지 못한다.”


그래서 웃고 넘기고,

양보하고 맞춰주고,

참는 것이 익숙해진다.

하지만 감정은 억누를수록

사라지는 게 아니라

조용히 안으로 파고든다.


시간이 흐르면,

그 억눌린 감정은

무기력, 무시당하는 느낌,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로 바뀌기 시작한다.


나도 그랬다.

화를 표현하는 게 어렵고,

갈등이 일어날까 봐

한 발 먼저 물러섰다.

하지만 그렇게 지켜낸 관계 속에서

정작 나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제야 알게 됐다.

사랑받고 싶다면,

내 마음을 먼저 존중해야 한다는 것.

억눌린 감정은 결국 사랑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


이제는 조금씩 연습한다.

조용히 말하는 법,

화를 드러내되, 관계를 무너뜨리지 않는 방식.


사랑받고 싶은 사람일수록,

화를 삼키지 말고

조금씩 꺼내야 한다.

진짜 나로 사랑받기 위해서.







내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


딱히 상처 주는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해질 때가 있다.

그 사람의 말투,

무심한 표정,

건성으로 던지는 대답.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 해도

어딘가 가슴 한쪽이 뻐근하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나, 지금 무시당하고 있는 건가?”


그 기분은 분노보다 먼저 서늘한 서운함으로 온다.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데,

분명히 존중받고 있지 못하다는 감각.


문제는,

그걸 겉으로 꺼내 말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 정도로 예민할 일은 아니잖아?"

"너무 오해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 대부분은 그냥 넘긴다.

그리고 그 넘김이 반복될수록

자기 안의 작고 고운 자존감이 조금씩 깎여나간다.


무시당하고 있다는 감각은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감’이 부정당할 때 생긴다.

말을 무시당해서가 아니라,

존재를 가볍게 여겨진 느낌 때문.

그건 누구에게든 충분히 아플 수 있다.


그리고 중요한 건,

그 감정을 느꼈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예민한 게 아니라 ‘살아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증거라는 거다.


나 역시 이런 감정을 자주 마주했다.

조금은 서글펐고,

가끔은 우습게 느껴졌고,

한편으론 억울했다.

그런데 결국 제일 힘들었던 건

그 누구에게도 그 마음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나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그 감정,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네가 지나치게 예민한 게 아니라

그 순간, 너는 네 존재를 지키고 있었던 거야."


내가 나를 무시하지 않을 때

비로소 그 감정은 조용히 가라앉는다.

존중은 남에게서 오기도 하지만,

스스로에게서 시작될 수도 있다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더 위험하다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 있다.

언제나 침착하고, 다투지 않고,

불편한 말을 꺼내는 대신

조용히 자리를 피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않아서,

언제나 맞춰주는 쪽이니까.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사람이 정말 아무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는 걸.

표현하지 않을 뿐, 감정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다.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더 자주 상처받는다.

다른 사람보다 오래 참고,

자신을 뒤로 미뤄두며,

“괜찮아”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반복한다.


하지만 그 ‘괜찮음’은

진심이 아니라

갈등이 두렵고, 외면이 두려워서 만든 방어의 말일지도 모른다.


감정은 억누른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모양을 바꿔

몸으로, 말투로, 혹은 관계의 균열로 나타난다.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하거나,

갑자기 연락을 끊고,

자신도 이유를 모른 채 무기력에 빠지기도 한다.


그건 감정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너무 오래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

화를 내는 건 미성숙한 일이라 생각했고,

말을 아끼는 게 인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인내가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화를 내는 건 무례함이 아니라 정직함이다.

다만 그 방식이 문제였을 뿐,

감정 자체는 언제나 존중받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조금씩 연습하고 있다.

화를 ‘터뜨리는’ 대신

화를 ‘표현하는’ 연습.

화를 '내지르는' 대신

화를 '건강하게 말하는' 연습

내가 느낀 불편함을 조심스럽게 꺼내는 일,

그게 나를 지키는 방식이 될 수 있음을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







웃음 뒤에 숨어있는 냉소


누군가의 유쾌한 농담 끝에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모두 웃고 있었지만,

그 안에 섞인 말투와 눈빛에는

낙관이 아닌 체념이 깃들어 있었다.


그 사람은 웃고 있었지만

사실은 이미 마음을 닫고 있는 중이었다.


냉소는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상처였다.

기대했던 만큼 실망했고,

믿었던 만큼 무너졌고,

사랑했던 만큼 아팠다.


그런 감정들이 반복되다 보면

사람은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모른 척’ 웃는 방법을 익힌다.

그리고 그 웃음 뒤에

작고 단단한 벽을 세운다.


냉소는 회피가 아니라 방어다.

더는 기대하지 않기 위해,

상처받을 자리를 미리 없애기 위해

사람은 웃으며 거리를 둔다.

말은 가볍고 농담처럼 흘러가지만,

그 안에는

“어차피 안 될 거야”,

“기대하면 또 아플 거야”

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을 안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마음을 들킬까 봐

늘 농담처럼 말하고,

진심이 묻어날까 봐

늘 한 발 물러서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웃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진짜 웃음을 잃어가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무표정한 사람보다

지나치게 유쾌한 사람이 더 외로울 수 있다.


냉소는 나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너무 오래 버틴 사람의 흔적이다.

그 마음을 함부로 판단하기보다

그 사람의 침묵과 웃음 사이를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는 태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런 조용한 이해일지도 모른다.







분노는 왜 나를 집어삼키는가


분명 사소한 일이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예고 없이 벌어진 작은 상황.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 안에서 무언가가 폭발하듯 치밀어 올랐다.

숨이 거칠어지고,

생각은 급격히 좁아지며

나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그리고는 곧 찾아오는 죄책감.

“왜 그렇게까지 화냈을까.”

“그 정도 일로 왜 이토록 흔들렸을까.”


분노는 예고 없이 다가오지만,

사실은 오랜 시간 쌓인 것들이다.


지나친 참음,

말하지 못한 억울함,

스스로도 외면한 감정의 침전물들.

그 모든 것이 축적되어 있다가

작은 자극 하나에 불이 붙는 것이다.

마치 오래된 기름에

작은 불씨가 닿는 것처럼.


분노는 무작정 나쁜 감정이 아니다.

원래 나쁜 감정이란 없다.

오히려 분노는 내 마음이

“이건 아닌 것 같아”라고 말하는 방식이다.

부당함을 향한 저항이고,

무시당한 감정의 복원 시도다.


하지만 문제는,

그 감정이 ‘표현’이 아닌 ‘폭발’이 되었을 때다.

분노는 타인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가장 먼저 나 자신을 상하게 한다.

나는 결국,

내 감정의 불길에

내가 가장 먼저 타버리게 된다.


분노가 반복된다면,

그건 지금의 일이 아니라

예전부터 해결되지 않은 감정이 있다는 신호다.


"그때 그 말, 너무 상처였어."

"나는 계속 참고 있는데 아무도 몰라줘."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지?"


이런 말들을 하지 못하고 쌓아두다 보면

결국 분노가 나서서 그것을 말하게 된다.

거칠고, 날카롭게,

때로는 상처를 남기면서.


나는 이제 배워가는 중이다.

분노가 오기 전,

그 감정이 내게 뭘 말하려 하는지

조금 더 일찍 들어보는 연습을.


그 분노는 어쩌면

내가 내 마음을 방치한 시간에 대한

늦은 항의였는지도 모르니까.








차가움이 관계를 멀리 밀어낼 때


아무 말 없이 대화를 끊거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그냥 흘려보내거나,

정말 친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한 겹 벽이 느껴지는 순간.


그럴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은 좀 차가운 사람이야.”

“정이 없어.”

“도무지 속을 모르겠어.”


하지만 때로 그 차가움은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너무 많은 경우일 수도 있다.


마음을 가까이 두는 게

늘 따뜻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두려움이 밀려온다.

거절당할까 봐,

상처받을까 봐,

기대했다가 또 실망하게 될까 봐

차라리 미리 거리를 두는 것이

안전하다고 믿는 것이다.


차가움은 감정이 식어서가 아니라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서 생긴 갑옷일 때가 많다.

사실은 다가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또는 예전에 다가갔다가 크게 다친 기억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서게 된다.


그 모습은 냉정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다가가고 싶은 마음과

도망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오래 흔들리고 있다.


관계는 온기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안에는 두려움, 방어, 거리감 같은

보이지 않는 요소들이 함께 얽혀 있다.

그리고 그중 어떤 마음은

말로 설명되지 않아 더 오해받는다.


차가움은 사람을 밀어내는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누군가가 조금 차갑게 느껴진다면

그 사람의 마음이 얼어붙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너무 자주, 너무 깊이 데인 사람일 수 있다는 걸

기억해 주면 좋겠다.


그걸 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조금 더 다정하게

거리를 건널 수 있을지 모른다.







냉소는 상처 입은 자존심의 언어


“그래봤자 뭐가 달라지겠어.”

“그 사람도 결국 다 똑같지.”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문득 마음이 서늘해진다.

차가운 단어들인데

그 말들 속에는 어딘지 모르게

슬픔과 체념이 스며 있다.


냉소는 무심한 척하지만

사실 그 안에는 깊은 감정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한때 기대했고,

진심을 내보였고,

정말 믿고 싶었던 무언가가 있었다.


그게 산산이 부서졌을 때

사람은 쉽게 다시 마음을 내어줄 수 없다.

그래서 자존심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감정을 걷어내고,

냉소라는 언어를 배운다.


냉소는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감정이 너무 깊어서 생긴 방어다.

“나는 상관없어”라고 말하지만

그건 사실,

“사실은 너무 상처받았어”라는 뜻이기도 하다.


웃으며 던진 냉소적 말들 뒤에는

한때 간절했던 나의 자존심,

그 자존심이 무너졌을 때의

잔해 같은 감정들이 쌓여 있다.


나도 그랬다.

실망하고 또 실망하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기대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냉소는 쿨한 척하는 게 아니라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은 사람의 외투였다.


하지만 그 외투를 오래 입고 있으면

진짜 온기도, 진짜 대화도

닿지 못하게 된다.


이제는 조금씩 내려놓는 연습을 한다.

냉소 뒤에 숨은 감정을

나부터 들여다보려 한다.

“괜찮은 척, 모른 척하지 않아도 돼”라고

내 마음에게 말해주는 일.


때로는 차가움보다

부드러운 솔직함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눌러둔 분노가 병이 될 때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 있다.

대체로 착하고, 이해심 많고,

늘 먼저 양보하고,

갈등이 생기면 조용히 물러난다.


그런 사람에게 우리는

"참 너그러운 사람이야"라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의 마음 안에서는

소리 없이 끓고 있는 감정이 있다는 것,

우리는 자주 잊는다.


분노는 나쁜 감정이 아니다.

그건 내가 느끼는 부당함, 슬픔, 억울함을

세상에 알리려는 신호다.

그 신호를 계속 무시하면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대신, 몸으로 옮겨간다.


설명할 수 없는 통증,

무기력, 두통, 피로, 그리고 우울감.

그건 단순한 피곤함이 아니라

표현되지 못한 감정의 언어일 수 있다.


화를 내는 것이 두려웠다.

상처 줄까 봐, 미움받을까 봐,

분노를 드러내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

나는 늘 참는 쪽을 선택해 왔다.


그런데 그렇게 누르고, 눌러온 감정이

결국 나를 병들게 만들었다.

타인을 향해야 할 분노가

나를 향한 자책과 자기 비난으로 바뀌었고,

그건 어느새 나를 안에서부터 갉아먹고 있었다.


분노는 표현되지 않을수록

더 날카로운 형태로 변한다.

폭발하거나,

안으로 고요히 침잠하거나.


그러니 이제는

분노를 밀어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려 한다.

“왜 그렇게 화가 났어?”

“무엇이 그렇게 아팠던 거야?”


그 질문 하나가

감정을 병이 아닌

대화로 이끄는 시작이 될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분노를 '나쁜 감정'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

무엇인가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아직 있다는 증거로 바라본다.


이제야 조금씩,

마음이 병들지 않는 방법을

배워가는 중이다.







화를 건강하게 말하는 연습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은

조용히 무너진다.

화를 너무 쉽게 내는 사람은

관계를 잃는다.


그 사이 어딘가,

화를 ‘건강하게 말하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는 자기 마음을 해치지 않으면서

타인과도 오래 함께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한동안 화를 잘 못 냈다.

정확히 말하면,

화를 ‘내지 않고’ 참는 것이 아니라,

화를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어느 날은 폭발했고,

어느 날은 침묵했고,

어느 날은 관계를 끊어버리며 뒤늦게 후회했다.


화를 내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그 감정 뒤에 따라오는

죄책감과 오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화는 나쁜 감정이 아니다.

화는 “그건 나에게 아픈 일이었어”라는

마음의 신호다.


화를 건강하게 말한다는 건

“나는 너를 공격하고 싶은 게 아니라,

지금 내 마음이 이렇게 느껴지고 있어”라고

표현하는 방식이다.


감정을 전달하면서도

상대를 존중하고,

자기감정을 외면하지 않는 일.

그건 기술이 아니라

연습이 필요한 태도다.


화가 날 때,

이젠 잠시 멈추고 생각해 본다.

“내가 지금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뭘까?”

“이 분노 아래에는 어떤 감정이 숨어 있을까?”

그렇게 마음을 한 번 더 내려다보면

비난 대신 이야기가 나오고,

상처 대신 이해가 시작된다.


우리는 모두

화를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화를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 감정이

관계를 무너뜨리는 칼이 아니라,

관계를 다시 이어주는 다리가 되도록.






냉소를 걷어내면 드러나는 맨얼굴


어떤 사람은 늘 웃으면서 말한다.

“뭘 그런 걸 진지하게 생각해.”

“세상 원래 그래. 기대할수록 손해야.”

가볍고 능청스러운 말투,

속을 알 수 없는 눈빛.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어쩐지 마음 한편이 서늘해진다.

그 사람의 말이

진짜 생각이 아닐 것 같은

묘한 이질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냉소는 어쩌면

너무 일찍 실망한 사람의 말투다.

믿고 싶었고,

기대했었고,

마음을 내어줬던 어떤 순간들이

모두 상처로 돌아왔을 때,

사람은 웃으며 거리를 두는 법을 배운다.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무언의 신호.

냉소는 그 사람의 자기 방어이자, 살아남은 방식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말투와 표정 뒤에

누군가의 고요한 외로움과 두려움이 있다는 걸.

냉소는 감정이 식은 게 아니라

감정이 너무 뜨거웠던 사람의 식힌 얼굴일 수 있다.


냉소를 걷어낸 자리에 드러나는 건

의외로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마음이다.

사람을 여전히 좋아하고 싶고,

다시 믿어보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너무 약하고 상처받기 쉬워서

지금은 그 위에

조금 딱딱한 갑옷을 덧입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냉소적인 사람 앞에서

더 따뜻한 말투로 천천히 머문다.

함부로 파고들지 않고,

하지만 너무 멀어지지도 않게.


그 사람 스스로

자기 맨얼굴을 꺼내어도 괜찮겠다고

느낄 수 있을 만큼

안전한 거리를 만들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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