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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춘 내가 게으른 줄 알았다

― 마음이 먼저 지쳐 있었다는 걸, 나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이 글은 상담심리학자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동행하며 그들의 감정 여정을 상징적으로 재구성한 가상의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생산성 없는 하루를 견뎌낸다는 것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날이 있다.

해야 할 일은 분명히 있는데,

머리는 멍하고

몸은 이상하게 무겁다.

딱히 큰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모든 게 벅차고 버겁게 느껴지는 날.


그럴 땐,

그냥 가만히 있는 나 자신이

도무지 용납되지 않는다.


눈을 떴는데 벌써 오후,

정신을 차리고 싶어도 마음이 따라주지 않고,

무언가를 시작하려 하면

이미 늦었다는 생각에

더더욱 아무것도 못 하게 된다.


그렇게 하루가

미끄러지듯 흘러간다.


그리고 밤이 되면

기다렸다는 듯

자책이 찾아온다.

"오늘 너 뭐 했니?"

"하루를 이렇게 버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마음속에 새겨진 어떤 ‘기준’이

가만히 있던 나를 벌하고,

쉬는 나를 게으르다고 몰아세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견뎌냈다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라는 것.


무너질 듯한 하루를

그저 무너지지 않고 지나갔다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오늘은 충분했던 게 아닐까.


우리는 너무 자주

‘해야만 한다’는 기준에 나를 가두고

‘살아냈다’는 사실을 놓친다.


생산성 없는 하루가 반복될 때

나는 내 안의 소리를 조심스레 들어본다.

혹시 이건 게으름이 아니라,

지쳐 있다는 신호는 아닐까?

아무것도 하기 싫은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살 수 있는 마음의 리듬은 아닐까?


어쩌면 지금 필요한 건

다그침이 아니라

잠시 나를 놓아주는 용기인지도 모른다.


오늘 하루가 비어 보였을지 몰라도

그 안에서도 나는,

버티고 있었고,

조용히 살아내고 있었고,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니 이 말 하나만큼은

조용히 건네고 싶다.


"오늘도, 잘 견뎠어요."





내 감정은 왜 나조차 몰랐을까


“나 지금 왜 이런 기분이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날이 있다.

분명 웃고 있었는데

속은 자꾸 쓸쓸하고,

사소한 말에도 화가 나거나

별일 아닌데도 눈물이 날 것 같은 순간.


그럴 때면

나는 내 감정이 낯설다.

내 마음인데

내가 알 수가 없다.


감정은 언제나

크고 분명한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대부분은 모호하고 흐릿한 신호로 다가온다.

불편함, 답답함, 이유 없는 피로감.

그 안에 감춰진 감정을

나는 너무 자주 ‘그냥 예민해서’라고 넘겨버린다.


그렇게 넘긴 감정들이

언젠가는 쌓이고, 뒤엉키고, 터진다.

그리고 그때서야 묻게 된다.

“나는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내 감정을 내가 모르겠을 때,

그건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오래 억눌렀기 때문이었다.


슬프면 안 될 것 같고,

화내면 나쁜 사람 같고,

힘들다고 말하면

누군가에게 폐가 될까 봐

나는 늘 ‘괜찮은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다 보니

내 감정은 나 몰래 어딘가에 숨고

나는 내가 진짜 어떤 마음인지

점점 알 수 없게 되었다.


감정을 이해한다는 건

지적인 일이 아니라

관계 맺는 일이다.

그 감정을 몰아내려 하지 않고

그저 “그래, 그런 마음이 있었구나” 하고

내 안의 어떤 부분을 쓰다듬어주는 일.


내가 나에게 말을 걸고,

그 감정이 나에게 왜 왔는지

조용히 들어보는 일.

그 순간, 감정은 ‘문제’가 아니라

‘메시지’가 된다.


이제 나는 배워가는 중이다.

감정은 느껴도 되는 것,

표현해도 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나에게 허락해줘야 하는 것이라는 걸.


나조차 몰랐던 내 감정을

조금씩 알아보는 하루하루가

이제는 회복이고

성장이 되고 있다.





자책이 습관이 되어버린 어느 날


문득, 하루를 돌아보는데

잘한 게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그때 그렇게 말하지 말 걸”

“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그런 생각들만 머릿속을 빙빙 맴돈다.


나는 또 나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게 습관이 되어버린 줄도 모른 채.


누군가에게 실수한 것 같으면

그날 밤 잠을 설친다.

가볍게 던진 말이

혹시 상처가 되었을까

끝도 없이 되짚는다.


심지어 상대가 괜찮다고 말해도

나는 괜찮지 않다.

내 마음 어딘가는 이미

나를 벌하고 있다.


자책은 때로

나를 지키기 위해 가장 먼저 꺼내 드는 방패였다.

상처받기 전에

내가 먼저 나를 깎아내리고,

누가 뭐라 하기 전에

스스로를 꾸짖으며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나를 납득시키려 했다.


그런데

그 방패는 결국 칼이 되어

나를 가장 많이 찔렀다.


자책은 책임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친 마음의 경고음이었다.

내가 내 편이 되어주지 못했을 때,

내 안에서 가장 약한 내가

도움을 요청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채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자주

그 습관을 반복한다.


하지만 이제는

자책이 올라올 때마다

조금 더 부드럽게 나를 바라보려 한다.

그때의 나는

최선을 다했을지도 모르고,

다른 선택이 있었더라도

그 순간엔 그게 나에게

유일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조금씩 나를 이해해 가는 중이다.

자책을 멈추는 연습이 아니라,

그 감정을 품고도 나를 안아주는 연습.






쉴 수 없다는 마음이 더 아프다


피로가 쌓여도

아프지 않은 척,

괜찮은 척하며 하루를 보낼 때가 있다.

몸은 이미 멈추고 싶다고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머리는 계속해서 ‘아직 더 해야 한다’고 몰아붙인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사는 게

도대체 무엇을 위한 건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정말 쉴 수 없어서가 아니라

쉴 수 없다고 느끼는 마음이

더 나를 무겁게 만든다.


쉬어도 되는 순간에도

괜히 불안하고,

남들이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

나만 멈춰 있는 것 같아

조급해지고 위축된다.


그럴 때면 쉼은 휴식이 아니라

또 다른 스트레스가 된다.


왜 이렇게까지 쫓기듯 살아야 할까.

누가 나를 채근하지도 않았는데

내 안의 목소리가

쉬면 안 된다고 윽박지른다.


“지금 멈추면 뒤처질 거야.”

“이대로 멈추면 넌 무능력한 사람이 될지도 몰라.”

“조금만 더 참아. 조금만 더…”


그 목소리는 나를 지켜주는 척하지만

사실은 나를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었다.


쉴 수 없다는 마음은

단순한 바쁨에서 오는 게 아니다.

그건 존재의 불안에서 온다.

“나는 이만큼은 해야 괜찮은 사람이다.”

“나는 계속 뭔가를 증명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 믿음이 깊게 뿌리내려 있을수록

우리는 더욱 멈추지 못한다.


그러나 진실은,

쉴 수 있는 사람이 결국 더 오래간다.

잘 쉴 줄 아는 사람이

자기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다.


나도 이제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

쉰다는 건 게으름이 아니라

회복을 선택하는 용기라는 것을.

누구에게 허락받지 않아도

내가 나에게

“괜찮아, 지금은 쉬어도 돼”라고 말해줄 수 있는 용기.


그게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문장이라는 걸

이제야 알 것 같다.






나는 왜 사소한 일에도 무너질까


누군가 툭 던진 말 한마디,

하루의 리듬을 어긋나게 하는 작은 변수 하나.

그게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고

나는 이상하리만치 크게 무너진다.


이런 내가

스스로도 답답하고,

왜 이렇게 유난스러운지

혼자 부끄러울 때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건 그 일이 사소해서가 아니라,

마음에 이미 오래 쌓여 있던 것들이

그 작은 충격을 계기로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라는 걸.


감정은 단순히 ‘지금’의 문제가 아니다.

지나간 말, 견뎠던 상처,

버틴다는 이름으로 꾹 눌러뒀던 모든 감정들이

언젠가는 작은 일 하나를 타고

갑작스레 흘러나온다.


그동안 너무 괜찮은 척했는지도 모른다.

화나도 웃고,

속상해도 참았고,

힘들어도 견디는 게 당연하다고 믿었다.


그러다 보니

감정은 제때 나올 곳을 잃고

내 안 어딘가에 응어리처럼 남아 있었다.


사소한 일에도 무너지는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지금껏 너무 오래 버텨온 사람이라는 걸

이제는 알아주고 싶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무너졌던 순간들조차

결국은 다시 일어났고

조용히 나를 조금 더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니 무너졌다고

자책하지 않기로 했다.

사소한 일 앞에 흔들리는 나를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다독이기로 했다.


삶은 거대한 사건보다

작고 사소한 감정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감정에 솔직해지는 연습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거니까.






기운이 없는 게 아니라 마음이 고장 난 거였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몸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겨우 일어나 앉았지만,

옷을 입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하나하나가 버거운 일처럼 느껴졌다.


‘왜 이렇게 기운이 없지’

‘내 체력이 약해졌나’

‘요즘 너무 게을러진 거 아냐’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탓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몸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수면도, 영양제도, 운동도

그 어떤 것도 효과가 없을 때

조용히 깨닫게 되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고장 난 거였구나.


마음이 지치면

몸도 함께 무너진다.

생각은 흐릿해지고,

작은 일에도 감정은 쉽게 요동친다.

사람들이 다정하게 대해도

나는 괜히 위축되고, 괜히 눈치 보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삶 전체가 귀찮고 버거워진다.


그동안 나는

‘할 수 있다’는 말에 중독되어 있었다.

힘들어도 참고,

아파도 견디고,

지쳐도 그냥 밀어붙이며

“괜찮아, 조금만 더”를 되뇌었다.


그러는 사이

내 마음은 점점 마모되고,

결국 ‘작동하지 않는 상태’까지 밀려와 있었다.


기운이 없다고 느껴질 때,

그건 단순히 휴식이 부족한 게 아니다.

마음이 나에게 보내는 마지막 경고음일 수도 있다.


이젠 알겠다.

기운을 찾으려면

무리한 에너지 보충이 아니라

감정의 회복이 먼저라는 걸.


마음을 살피지 않으면

아무리 쉬어도

아무리 먹어도

아무리 운동해도

다 소용없다는 걸.


그러니 이제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기운이 없는 게 아니야.

지금은 마음이 조금 아픈 거야.

그러니 잠시 멈추고,

그 마음부터 안아줘야 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


가끔은 그런 날이 있다.

분명히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눈앞의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숨이 턱 막힌다.


책을 펴도 글자가 들어오지 않고,

전화벨이 울려도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뭔가 잘못된 걸까?

아니, 그냥 내가 게으른 걸까?

그 생각만 자꾸 맴돈다.


하지만 이상하게

몸은 느리고, 머리는 무겁고, 마음은 텅 비어 있다.

조금만 더 버티면 괜찮아질 것 같아서

억지로 움직이려 해도

바닥에 깔린 무게가 쉽게 일어나게 두질 않는다.


어느 날, 내담자가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요즘은 양치하는 것도 힘들어요.

그게 그렇게 큰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힘들까요.”


나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혹시, 마음이 지쳐 있는 건 아닐까요?”


사람은 신체 에너지가 다 떨어져도 눈에 보이지만,

마음의 에너지가 고갈되었을 땐

대부분 스스로 알아채지 못한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

그건 게으름이 아니라

몸이 보내는 마지막 신호일 수 있다.


그럴 땐 억지로 일하려 애쓰기보다

잠시 멈추는 용기가 필요하다.


의자를 뒤로 밀고 창밖을 바라보거나,

마실 물 한 잔을 천천히 입에 머금고,

‘이대로 괜찮다’고

속으로 조용히 말해주는 거다.


무언가를 해내야만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해도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감정과 리듬을 가진 생명이기에

때론 멈추기도 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 오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날,

그건 마음이 숨 쉬려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저 그 시간을

조용히 지나가게 두면 된다.






무기력은 게으름이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기조차 버거운 아침이 있었다.

핸드폰 알람을 끄고, 다시 눈을 감았다.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에서 줄줄이 떠오르는데도

몸은 이불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되지’

수없이 다그치면서도

몸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내가 게을러서 그런 줄 알았다.

의지가 약해서, 성실하지 못해서

내가 나를 망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속은 여전히 바빴다.

‘지금 해야 해. 빨리 일어나. 미뤄지면 더 힘들어질 거야.’

머리는 그렇게 소리치는데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심지어 며칠간 잘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기분도 울적하고, 이유 없는 죄책감이 자꾸 따라붙었다.

그때서야 알았다.

이건 게으름이 아니구나.


심리학에서는 이 상태를 ‘무기력’이라고 부른다.

에너지가 바닥나고, 마음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사람은 자연스럽게 멈춘다.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을 탓한다.

“나는 왜 이렇게 안 되지?”

“다들 잘만 사는데, 왜 나만 이래?”

자기 비난은 무기력을 더 깊게 만든다.


내담자 중 어떤 이는 이런 말을 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근데 머리가 너무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고… 죄책감이 들었어요.”


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 하루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당신이 애써 버텨낸 하루였어요.”


무기력은 게으름이 아니라,

마음이 ‘그만하자’고 보내는 마지막 경고일 수 있다.


그 뒤로 그는

자신의 무기력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기지개조차 켜기 싫은 날이면

억지로 움직이기보다

잠시 창밖을 바라본다.


햇살이 스며드는 유리창 틈,

길고양이가 하품을 하고 지나가는 모습,

내 앞에 놓인 따뜻한 물 한 잔.

그것들 안에서 아주 작은 감각이 깨어날 때가 있다.


그 순간이 무기력을 뚫고

다시 삶으로 돌아가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무기력한 날이 올 때면

이제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괜찮아. 지금은 그냥 쉬어도 돼.”

“이건 나약함이 아니라,

지금 내 마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야.”


그 말을 반복하며

나는 아주 조금씩,

나를 다시 꺼내오는 연습을 한다.






몸이 먼저 알려주는 마음의 신호


가끔 몸이 먼저 아프기 시작한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자꾸 두통이 오거나

어깨가 단단하게 굳고

숨을 깊게 쉬는 게 어렵다.


그럴 때면 처음엔 이렇게 생각한다.

“잠을 잘 못 잤나?”

“요즘 일이 많았지.”

“피곤해서 그렇겠지.”


맞는 말이다. 피곤해서일 수도 있다.

그런데 자꾸 반복된다면,

몸이 먼저 ‘뭔가’를 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상담실에서 종종 듣는 말이 있다.

“몸이 너무 안 좋아요. 그런데 병원에 가도 이상이 없대요.”

“피검사, MRI, 다 해봤는데도 아무 문제없대요.”


그럴 때 나는 조심스럽게 묻는다.

“요즘, 마음은 괜찮으세요?”

그러면 대부분 눈을 피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건... 잘 모르겠어요.”


사람은 마음보다 몸의 이상을 먼저 알아차리곤 한다.

특히 ‘말하지 못한 감정’이 많을수록 그렇다.

화났지만 꾹 참았던 날,

슬펐지만 아무 일 없던 척했던 순간들.

그 감정들은 어딘가로 흘러가야 하는데

그게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면

대신 몸이 신호를 보낸다.


소화가 안 되고,

가슴이 답답하고,

몸에 힘이 없고,

자꾸 잠이 오거나, 반대로 잠을 못 자거나.


이를 심리학에서는 ‘신체화’라고 부른다.

하지만 꼭 용어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삶 속에서 이런 경험을 한다.


몸이 자꾸 말을 걸어올 때,

그건 단순한 통증이 아니라

“지금 마음이 좀 지쳤어요.”라는

몸의 방식으로 표현된 언어일 수 있다.


나는 그런 신호를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평소보다 이유 없이 더 피곤하면,

아무리 바빠도 10분이라도 멍하니 쉬어본다.


잠깐이라도 내 몸에 물어본다.

“너 지금 뭐가 불편해?”

“혹시… 나, 무시하고 있었니?”


그러면 때때로,

눈물이 날 만큼 피곤했던 마음이

살짝 얼굴을 내민다.

그제야 알게 되는 거다.

아, 내가 내 마음을 돌보지 못하고 있었구나.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보다 더 정직하게

지금의 나를 보여준다.


그 신호를 애써 무시하거나

“이 정도는 다들 겪는 일이지”라며 넘기지 말자.

그건 몸이 보내는 다급한 편지다.

아직 마음이 말로 꺼내기 어려운 걸

대신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반복된 실패감이 영혼을 짓누를 때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고 기대했던 결과가

또다시 아무 일 없던 듯 무너질 때가 있다.


‘이번엔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 말은 마음속에서만 맴돌고, 입 밖으로는 못 나왔다.

괜히 꺼냈다가 위로랍시고 돌아오는 말이

또 다른 짐이 될까 봐.


“괜찮아,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

“네가 뭘 그렇게까지 신경 써.”

“그 일 말고도 잘한 게 얼마나 많은데.”


그런 말들이 위로가 되지 않는 날도 있다.

괜찮다는 말을 들으면 더 괜찮지 않아 지는,

그런 날들.


무언가를 계속 시도했지만

결국 똑같은 지점에서 멈추고

그게 반복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도전’은

희망이 아니라 두려움이 된다.


실패는 어떤 때는 사건이지만

어떤 때는 정체성이 되어버린다.


‘나는 왜 항상 이 모양일까.’

‘이제 그만하면 됐지 않았나.’

‘더 이상 뭘 해야 하지...’


그런 마음이 하루하루 쌓이면

처음에는 단지 피곤했던 마음이

나중엔 깊은 무력감으로 변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고

하고 싶은 마음조차 사라지고

꿈이나 목표 같은 건

그저 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럴 땐, 그냥 거기까지 오는 것도 대단한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실패를 마주하고도 그 자리에 서 있었던 시간.

그 모든 감정의 무게를 혼자 견뎠던 용기.

비록 결과는 원하지 않았던 것일지라도

시도하고 버텼던 그 마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상담심리학에서는

이런 감정의 누적을 '자기 효능감의 침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신에 대한 신뢰가 점점 옅어지면서

결국 ‘나는 못하는 사람’이라는 낙인을

스스로 찍는 단계에 이른다.


하지만, 모든 실패가 자격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실패했다고 해서, 존재의 무게까지 가벼워지는 건 아니다.

우리는 무너지면서도 견디는 사람들이다.


어떤 날은,

그저 이 말을 마음에 새기며 하루를 견디면 된다.

"나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내가 실패한 것이지, 실패가 나인 건 아니다."






작은 성취가 불씨가 되는 순간


별일 아니었다.

정말 별거 아니었다.


책상 위에 며칠째 쌓아뒀던 서류를 정리한 것,

어영부영 미뤄두었던 이메일 하나를 보낸 것,

그리고 늦은 밤, 물끄러미 바라만 보던 그 식탁 위 화분에 물을 준 것.


그런 사소한 일들을 마치 큰일이라도 한 듯

“그래, 오늘 이 정도면 잘했지” 하고

스스로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밤은 좀 다르게 느껴졌다.

몸은 여전히 피곤했고, 내일은 또 올 텐데도

무기력하게 무너지던 마음이 조금 덜 흔들렸다.

마치 어디선가 작게 타오르는 불씨 하나가 생긴 것처럼.


우리는 보통,

크고 눈에 띄는 성취만을 ‘의미 있다’고 여긴다.

그렇지 않으면 “이걸 뭐 잘했다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든다.

작은 성취는 금세 잊히고,

때로는 스스로 비웃기도 한다.


그런데 상담을 하다 보면

그 작고 보잘것없다고 느껴지는 성취가

정말 중요한 시작이 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일어나서 세수를 한 것,

제때 식사를 챙겨 먹은 것,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들어준 것,

감정을 참고 넘기지 않고 말해본 것…


이런 일상의 순간들이

자기 자신을 회복시키는 불씨가 되곤 한다.


작은 성취는 '나를 다시 믿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 믿음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축적되며 자란다.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자라고 있는 중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이 정도로 뭘… 내가 얼마나 무너졌었는데."


하지만 그게 바로 출발점이 된다.

넘어졌던 사람에게 ‘다시 걷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지

스스로만이 알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조용히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당신도, 오늘 그랬을 것이다.

크게 티는 안 났지만,

작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안갯속에도 빛은 남아있다


한동안, 마음이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왜 그런지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별일 없이 흘러가는 하루였지만,

속은 자꾸만 무겁고 답답했다.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큰 상처를 받은 것도 아닌데,

그냥 모든 게 흐릿했다.

마치 안개 낀 유리창 너머로 세상을 보는 기분.


그럴 때면 자꾸만 멈춰 서게 된다.

한 발자국 떼는 것도 조심스러워지고,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지도 의심하게 된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무슨 의미였는지

괜히 혼자 묻고 또 묻게 된다.


상담실에서 마주한 어떤 분도

비슷한 말을 했다.


“아무리 나아가려고 해도, 앞이 안 보여요.

계속 제자리인 것 같고, 괜히 불안해요.”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 안갯속에도, 빛이 전혀 없었나요?”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아니요… 아주 멀리서, 희미하게 보이긴 했어요.”

라고 답했다.


그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희미하더라도, 어딘가에 빛이 있다는 것.

그건 절망과는 다른 감각이다.

어둠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희망의 조각.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버틸 수 있다.


삶에는 그런 시간이 분명히 있다.

매일을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고, 가슴이 먹먹한 날들.

하지만 그 속에도

분명히 빛은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가 못 본 게 아니라,

너무 흐려서 잘 안 보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모든 날이 쨍할 수는 없으니까.


안개는 결국 걷힌다.

때로는 천천히,

어떤 날은 무심하게,

어떤 날은 눈치도 없이 사라진다.


안갯속을 묵묵히 걸어왔다는 것.

그 자체로 당신은 충분히 잘해온 거다.


지금은 잘 안 보이지만,

당신 안의 빛은 여전히 거기 있다.

희미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그 빛을

오늘도 조용히 따라가 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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