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상담심리학자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동행하며 그들의 감정 여정을 상징적으로 재구성한 가상의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요즘 들어 자꾸 말끝이 날카로워진다.
아무 의도도 없이 툭 뱉은 말인데,
상대는 조용히 표정을 바꾸고
나도 그제야 깨닫는다.
“아, 또 그렇게 들렸겠구나.”
억울한 마음보다 먼저 드는 건,
어쩐지 나조차 내 말투가 낯설다는 감각이다.
사실은 나도 안다.
내 말끝이 왜 그렇게 되어가는지.
그건 화가 나서가 아니라,
속에 오래 쌓인 서운함이 자꾸 넘치기 때문이다.
늘 참았고, 괜찮은 척했고,
말해봐야 소용없을 거란 생각에
대화보단 침묵을 선택했던 날들.
그렇게 쌓인 감정이 어느 순간
‘투명한 말’이 아닌 ‘단단한 말’로 굳어버린 것이다.
말끝은 마음의 모서리다.
둥글지 못하고 날카로워졌다는 건,
내 마음 어딘가가 다쳤거나, 지쳐 있다는 뜻이다.
자기표현을 억눌러온 사람일수록,
감정을 삭이기만 해온 사람일수록
무심한 듯 내뱉는 말속에
억눌린 정서가 스며든다.
그래서 나는 요즘
말끝보다 먼저 ‘마음의 시작점’을 살피려 한다.
내가 지금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뭘까?
그 말에 담긴 감정은 왜 생겼을까?
조금만 더 솔직해지면,
조금만 더 따뜻하게 꺼낼 수 있다면,
나도 그렇게 날을 세우지 않아도 될 수 있을 텐데.
말이 다정해지려면
사람이 무조건 착해야 하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을 알아차릴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무슨 말을 할지가 아니라
왜 그 말을 하게 되는지를 먼저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
그때 비로소,
말은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고
마음을 건네는 언어가 된다.
별 의도 없이 한 말이
상대에게는 상처처럼 들릴 때가 있다.
그럴 땐 스스로도 당황스럽다.
“나, 그런 뜻 아니었는데...”
마음속으로 해명하지만
이미 흘러나온 말은
표정보다 먼저 거리를 만든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요즘, 내 말끝이 부쩍 날카로워졌다는 걸.
화가 나서 그런 것도 아니다.
누군가를 미워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저 마음속에 쌓인 감정들이
말이라는 틈을 타
조금씩 스며 나온 것뿐이다.
서운했던 일들,
지나간 대화에서 묻은 애매한 감정들,
그때는 참았지만
남아 있던 말들이
시간이 지나
다른 말에 섞여버린 것이다.
사람은 늘 온전히 제 감정을 알고 있는 게 아니다.
그저 “왜 이렇게 예민하지” 싶을 뿐,
그 밑에 깔린 이유들은
제때 꺼내지 않으면 흐릿해진다.
그러다 보면
감정은 말로 나오지 못하고, 말끝으로 튀어나온다.
딱딱하고 짧아지고,
표현이 아니라 단절처럼 들리게 된다.
결국,
나는 내 감정을 전하고 싶었는데
그 말은 다툼처럼 도착해 버린다.
요즘 나는 조금씩 멈추는 연습을 한다.
말을 하기 전에
한 발 먼저 내 마음을 바라보는 일.
“지금 나, 지친 걸까?”
“이 말은 꼭 지금 해야 할까?”
“혹시 내 말이, 내 감정보다 먼저 앞서가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질문 하나만으로도
말의 결이 달라진다.
목소리는 낮아지고,
표현은 부드러워진다.
말끝이 아니라
마음 끝을 가다듬는 연습.
지금의 나는,
그걸 다시 배우는 중이다.
“괜찮아.”
“진짜 괜찮아.”
“이 정도쯤이야 뭐.”
나는 자주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그 말이 내 입에 너무 잘 붙어 있다는 걸
문득 깨달을 때면
어딘가 마음이 서늘해진다.
언제부터였을까.
괜찮지 않은 날에도
‘괜찮다’고 말하는 게 익숙해져 버린 건.
누군가의 기대에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감정을 드러내는 게 귀찮고 피곤해서,
혹은 내 아픔이 누군가에게 민폐처럼 보일까 봐
나는 나보다 타인의 반응을 먼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매번 감정을 눌러 삼키고,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다 보니
이제는 나조차
내가 진짜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없게 됐다.
괜찮다고 말하는 순간,
내 감정은 멈춰버린다.
어딘가에 갇혀서 흐르지 못하고
점점 쌓이고 굳어져 간다.
그리고 언젠가
사소한 일에도 터질 듯이 무너진다.
그건 그 일이 커서가 아니라,
쌓인 감정이 너무 많아서이다.
요즘 나는
조금 다른 연습을 시작했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을 때,
그 말 대신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을 꺼내보기.
“조금 지쳤어.”
“이건 나한텐 좀 힘들었어.”
“말은 안 했지만, 사실 서운했어.”
그렇게 말하고 나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덜 아프다.
내가 나를 속이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로도
내 마음은 나를 다시 믿기 시작한다.
“괜찮아, 뭐 그런 일도 있지.”
“아니야, 나 진짜 별일 없어.”
“에이, 그냥 웃고 넘겨야지 뭐.”
이런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이 있다.
늘 웃으며 말하고,
어색한 분위기는 농담으로 풀고,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
그런 사람은
항상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짜 그런 걸까?
웃으며 넘기는 데 익숙한 사람은
사실 많은 말을 삼켜온 사람이다.
서운했지만 말하지 않았고,
상처받았지만 ‘별일 아니야’라고 눌렀다.
그리고 그렇게 오래 참다 보면,
결국 감정은 표현이 아니라 회피의 방식으로 굳는다.
괜찮은 척이 습관이 되면,
어느 순간 진짜 감정을 꺼내는 게
더 어색하고, 더 무서워진다.
그래서 그 사람은 오늘도 웃는다.
상대가 당황하지 않도록,
자신이 무너져 보이지 않도록.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가장 외로운 순간에도 혼자 견디는 데 익숙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웃는 얼굴은 밝아 보이지만
그 안에 쌓인 말들은 깊고 무겁다.
한 번도 꺼내지 못한 말들이
농담처럼 희석돼 사라져 버릴 때,
그 사람의 마음은
조금씩 투명해진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나는 그런 사람을 안다.
아니, 어쩌면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씩 연습하려 한다.
웃음으로 넘기지 않고
그 자리에 잠시 머무는 연습.
"그 말, 사실은 좀 서운했어."
"나 요즘, 그냥 좀 그래."
그 말 한마디 꺼내는 일이
생각보다 멀리 데려다주는 걸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
"됐어, 신경 쓰지 마."
"알아서 할게."
"별로 기대 안 했어."
그 말들은 겉으로 보기엔 차갑고,
어쩐지 벽을 세우는 것처럼 들린다.
툭툭 내뱉는 말투에
진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말들 사이엔
조용히 삐져나오는 간절함이 숨어 있다.
사람은 마음이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말이 조심스러워진다.
그 마음이 다 닿지 않을까 봐,
말하다가 상처를 입을까 봐
차라리 단단한 말로 마음을 감싼다.
“기대 안 했어”라는 말은
사실 “기대했는데, 실망할까 봐 미리 접었어”라는 뜻이고,
“알아서 할게”는
“내가 도와달라고 해도 진심으로 들어줄까?” 하는
두려움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말투가 차가운 사람은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이 깊고 복잡해서 쉽게 꺼내지 못하는 사람이다.
상처 입지 않기 위해
말의 온도를 낮춘다.
마음이 들킬까 봐
표정을 감추고,
어색한 틈을 딱딱한 말로 메운다.
그렇게 만들어진 문장들은
누구보다 간절한 마음을
겉으로는 가장 멀리 돌려 말하는 방식이 된다.
나는 그런 사람을 안다.
아니, 나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말 한마디에 너무 많은 마음이 섞여 있어서
도저히 평온한 목소리로 내놓을 수 없을 때가 있었다.
그래서 차라리 무심하게 말했고,
그 뒤엔 혼자 남아
“나는 왜 또 그렇게밖에 못했을까”
스스로를 자책하곤 했다.
그래서 요즘은 조금씩 연습한다.
말의 표면보다
그 말이 태어난 마음의 배경을 먼저 들여다보는 일.
말이 날카로워질수록
그 안에 있는 말하지 못한 간절함이 더 많다는 걸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됐어. 이 얘긴 그만하자."
"지금 말해봤자 뭐가 달라지겠어."
"그냥 좀 혼자 있고 싶어."
이런 말들이 익숙한 사람들.
그들은 다투기보다는 입을 다문다.
감정을 터뜨리기보다는
그냥 문을 닫는다.
누가 봐도 무심하고 차가워 보일 수 있지만,
그 침묵 안에는
말하지 못한 말들이 가득 차 있는 경우가 많다.
말로 다투는 건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지만,
문을 닫는 건 감정을 포기하는 일에 가깝다.
그 사람은 말하지 않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마지막 방법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말을 해봤고,
기다려봤고,
설명해 봤다.
하지만 그 말들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더 상처가 되었던 경험 끝에
입을 닫기로 결심한 것이다.
문을 닫은 사람은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너무 많이 상처받아서, 다시 여는 게 두려운 것뿐이다.
그 안엔 여전히 감정이 있고,
말이 있고,
기다림이 있다.
단지,
그 기다림을 꺼내는 일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고 느낀 것뿐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눈빛이 매번 흔들리는 사람.
"괜찮다"라고 말하지만
표정 끝이 조용히 젖어 있는 사람.
그래서 나는,
그 문 앞에서 다그치기보다
그저 조용히 앉아 있어주고 싶다.
"말하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릴게."
그 말 한마디가,
닫힌 문 너머로 가장 멀리 가닿는 말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길을 앞에 두고도
자꾸만 한 발 물러서게 되는 날이 있다.
지금 있는 이 자리가 아주 편한 건 아니지만,
덜 불안하고, 덜 낯선 곳.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그 자리에 오래 머문다.
사람은 누구나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변화는 늘 불안을 동반한다.
가보지 않은 길,
해보지 않은 감정,
예측할 수 없는 반응들.
그 모든 게 마음을 긴장시키고
결국, ‘그냥 지금 이대로 괜찮아’라고 자신을 설득하게 만든다.
그건 게으름이 아니라,
어쩌면 너무 자주 흔들렸던 마음의 피로일지도 모른다.
변화가 싫어서가 아니라,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도전이 싫어서가 아니라,
한 번 더 무너지는 게 무서워서.
그래서 우리는
‘안전해 보이는 곳’을 선택한다.
관계든, 일상이든, 감정의 반응이든.
새로운 선택은 자꾸 미뤄지고
머물던 방식이 몸에 배어간다.
하지만, 정말 안전할까.
변하지 않기로 선택한 그 자리가
정말 내 마음을 지켜주는 곳일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자리 역시 나를 조금씩 깎아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 속도가 느릴 뿐.
내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
마음은 점점 무뎌지고, 작아지고, 움츠러든다.
나는 요즘 조금씩 연습한다.
완전히 뛰어들지 않아도 되니까,
한 걸음만 옮겨보는 연습.
안전한 곳에 머무는 자신을 탓하기보다
그 마음 안의 두려움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두려움이 있다는 건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특별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오늘도 평소처럼 일어나고,
일하고, 밥을 먹고, 사람들과 안부를 나눴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는데
왠지 불안하고,
괜찮은 하루였는데도
어딘가 마음이 허전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럴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미래를 걱정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조금 늦게야 알아차린다.
무언가 잘못될까 봐,
지금의 평온이 오래가지 않을까 봐,
혹은 아직 오지도 않은 상황을
미리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하며
마음은 그날을 먼저 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보다 자주,
실제로 일어나는 일보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더 오래 걱정한다.
그건 나약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삶이 그렇게 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기대했던 일이 어그러졌던 기억,
믿었던 관계가 무너졌던 순간,
잘 될 거라 믿었던 선택의 후회들.
그런 일들이 마음속에 작은 그늘이 되어
미래를 기대하기보다
조금씩 두려워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불안은
결코 내가 나를 믿지 않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더 잘 살아내고 싶은 마음,
무너지지 않고 싶다는 바람이
불안이라는 이름으로 얼굴을 드러낸 것일지 모른다.
나는 여전히
지금의 삶을 지키고 싶은 사람이고,
더 나아가고 싶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 마음이 걱정이라는 방식으로 움직였던 것뿐이다.
나도 모르게 미래를 걱정하고 있을 때,
나는 나에게 조용히 말해준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낸 너라면,
그날도 무사히 건널 수 있을 거야.”
불안은 멈추지 않지만,
그 말 한마디가
불안 속에 있는 나를 다시 끌어안게 해 준다.
처음엔 몰랐다.
그게 불안이었다는 걸.
단지 마음이 조금 가라앉은 것 같고,
사소한 일에도 괜히 예민해지고,
딱히 슬픈 일도 없는데
이상하게 기운이 빠졌다.
사람들과 대화하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해야 할 일 앞에서 이유 없이 멈칫하고,
아무 일도 없는 밤인데
혼자 괜히 마음이 서늘해지는 순간.
그런 날이 반복되다 보면
문득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왜 이러지, 나?”
그제야 조용히 다가온 감정의 이름을 부른다.
불안.
불안은 생각보다 요란하지 않다.
삶을 집어삼킬 듯 덮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조용하게,
익숙한 틈 사이로 스며든다.
겉으론 평온한 일상인데
속으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번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별것 아닌 일 앞에서도
미리부터 긴장하게 된다.
그건 지금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무언가를 알려주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불안은 종종
“아직 해결되지 않은 감정”이
자리를 바꿔 다시 얼굴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게 슬픔이었든, 분노였든, 상실이었든.
내가 미처 다 안아주지 못한 감정이
조용히 돌아와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불안을 없애려 하기보다
그 감정의 기원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
그게 내가 나를 지키는 첫걸음이 된다.
요즘 나는 마음이 가라앉는 날이면
이렇게 말해본다.
“괜찮아. 불안할 수 있어.”
“이 감정은 내가 무너지기 직전이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아직 느낄 줄 안다는 뜻이야.”
불안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조용히 살아가는 감정 중 하나임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이는 중이다.
“괜찮아.”
“이 정도쯤은 뭐.”
“나보다 더 힘든 사람도 많은데.”
나는 자주 그렇게 말한다.
어떤 날은 정말 괜찮기도 했고,
어떤 날은 괜찮지 않았지만,
괜찮다고 말하는 게 익숙해져 버렸다.
그렇게 마음을 눌러두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상하게 마음은 더 자주 흔들렸다.
작은 말에도 예민해지고,
사소한 일에도 무너지는 느낌.
겉은 말끔한데 속은 휘청이는 날들.
괜찮은 척은
마음이 견고해서 하는 게 아니다.
흔들리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나 스스로라도 붙들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억지로 만든 단단함이다.
하지만 그 단단함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부드럽게 풀어내지 못한 감정은
결국 마음 어딘가에
굳은살처럼, 혹은 균열처럼 남는다.
나는 안다.
괜찮은 척할수록
마음은 더 외로워지고,
감정은 갈 곳을 잃고
더 깊은 곳에 숨어버린다는 걸.
그러다 어느 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그 감정이 터져버린다.
그리고 나조차 놀란다.
“내가 왜 이 정도 일에 이렇게 무너졌지?”
그래서 이제는 조금씩 연습한다.
괜찮은 척 말고,
괜찮지 않다고 조용히 말하는 연습.
그 한 문장을 꺼내는 데
긴 용기가 필요하지만,
막상 말하고 나면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고요해진다.
누군가가 나를 구해주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속이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마음을 살짝 놓아준다.
다른 사람의 말은 믿는다.
그들의 가능성도, 감정도, 아픔도 이해하고 지지해 준다.
“당신은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괜찮아요, 잘 해내고 있어요.”
그런 말은 내 입에서 쉽게 흘러나온다.
그런데 막상 내게는 잘 닿지 않는다.
누군가 내게 같은 말을 해도,
마음 한구석에서 늘
“아니야, 난 아직 부족해.”
그 목소리가 먼저 들려온다.
나는 왜 나를 믿지 못할까.
그 물음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 안에 조용히 머물러 있었다.
결과가 좋아도
“운이었어”라고 말하고,
칭찬을 들어도
“아니야, 그냥 한 거야”라며 슬쩍 피하고,
누군가 진심으로 나를 바라봐도
그 시선 안에 의심을 섞는 버릇.
스스로를 몰아세우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도
나는 나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건 어쩌면
한때 믿었다가 실망했던 나 자신에 대한 상처일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해보려다 실패했을 때,
기대했다가 좌절했을 때,
기억 저편에 남은 “내가 나를 배신한 경험들.”
그게 반복되다 보면
마음은 스스로에게 점점 거리를 둔다.
그리고 결국
자기 확신보다 자기 의심이 먼저 반응하는 사람이 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를 믿지 못하는 건
내가 잘못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내 마음을 너무 오래 외면해 온 결과였다는 걸.
내가 어떤 순간에도 나를 믿어주지 않으면
그 누구의 위로도
그 어떤 성취도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을 수 없다는 걸.
그래서 나는 이제
조금 느리게라도,
다시 나를 믿는 연습을 시작한다.
잘하지 않아도,
완벽하지 않아도,
실패한 적이 있어도,
내가 나를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게 회복의 시작이고,
그 믿음이 쌓일 때
비로소 나는 조금씩 흔들림 없이 나를 살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날은 이유 없이 가슴이 조인다.
별다른 일이 없었는데도
숨이 얕아지고, 생각은 멀리 달아난다.
말 한마디에 마음이 철퍼덕 무너지고
지나간 장면 하나가 자꾸만 돌아온다.
그럴 땐 안다.
불안이, 또 나를 붙잡고 있다는 걸.
불안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손처럼 다가온다.
소리 없이 나를 조이고,
멀쩡하던 일상 속 균열을 만든다.
사람들이 다 괜찮다고 말해도,
나는 괜찮지 않다.
어깨를 펴고 웃는 얼굴 뒤로
내 마음 한구석은 이미 무너지고 있다.
불안은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설명하려 들수록 더 깊이 빠져든다.
스스로 납득시키려 애쓰다 보면
마음은 점점 더 멀어진다.
왜냐하면 불안은 설득이 아니라,
이해받고 싶어 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불안을 이겨내야 한다는 말보다
이제는 불안과 함께 있어주는 연습이 더 필요하다는 걸
나는 천천히 배워가고 있다.
마음이 흔들릴 때
억지로 버티기보다
그 흔들림을 그대로 느끼고,
그저 지금 이 자리에 나를 붙들어 두는 일.
물 한 잔을 천천히 마시고,
깊은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지금 발이 닿아 있는 바닥을 느끼는 일.
그 작은 동작 하나하나가
보이지 않는 손을 살며시 놓게 만든다.
불안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어쩌면 살아 있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지키고 싶은 마음,
사랑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
내 삶을 진심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
그 마음이 있기에 우리는 두렵고,
그래서 더 살아 있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괜찮았을 텐데, 생각이 조금만 깊어지면 그 안에서 이상한 이야기들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 생기지도 않을 상황들, 말조차 꺼내지 않은 사람들의 반응까지도
머릿속은 마치 미래의 편집장이 된 것처럼 모든 장면을 상상하고, 예측하고, 해석한다.
그러고 나면 남는 건 하나다.
두려움.
두려움은 언제나 '이야기'의 형태를 하고 온다.
“혹시 그 사람이 날 싫어하게 되면 어떡하지?”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닐까?”
“다들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그 목소리는 마치 내 안에서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척 말한다.
그럴듯한 말투로, 조용하지만 끈질기게, 이성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결국 나를 멈춰 세운다.
해야 할 말을 미루게 만들고, 가야 할 자리를 피하게 하고,
사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이미 나는 충분히 지쳐버린다.
두려움은 말한다.
“너를 지키기 위해서야.”
하지만 실상은,
지켜주겠다고 말하면서 나를 가두는 감옥이다.
생각해 보면, 두려움은 무언가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때,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불행의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마치 스스로를 괴롭히는 반복된 연습처럼.
하지만 그 어떤 예측도, 그 어떤 걱정도
실제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지는 못한다.
진짜 나를 지켜주는 건,
모든 시뮬레이션을 멈추고
‘지금 여기’를 살기로 결심하는 일이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이 아닌,
지금 눈앞의 사람, 지금의 감정, 지금의 숨에 집중하는 것.
그 순간, 두려움은 잠시 침묵한다.
그리고 그 틈으로 진짜 내 마음이 고개를 든다.
무섭고, 서툴고,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살아보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을 따라 한 걸음 내딛을 때,
비로소 나는
두려움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살아가기 시작한다.
불안은 언제나 ‘지금’보다 한 발 앞서 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말하지 않은 대화, 결정하지 않은 선택에
그 누구보다 먼저 반응하고 걱정하고 상상한다.
불안은 늘 미래형이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먼저 가 닿아
그곳의 그림자를 가져와 지금의 감정을 흔든다.
결국 나는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들 때문에
숨이 막히고, 가슴이 조여 온다.
불안은 나를 살게도 하고,
나를 갉아먹기도 한다.
누군가는 불안이 있어야 준비된 삶을 산다고 말하지만,
나는 준비를 하려다가
끝내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 날들이 많았다.
불안은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삶의 방향을 바꿔놓는다.
더디게 걷게 만들고,
지레 겁을 먹게 하고,
때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만든다.
가장 무서운 건,
불안은 논리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괜찮을 거야”라는 말보다
“혹시라도 안 되면 어쩌지?”라는 말이
훨씬 쉽게 믿어진다.
불안은 내 안에서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척 말하고,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내 과거를 꺼내오고,
이성이라는 탈을 쓰고 내 감정을 흔든다.
그래서 한 발 내딛는 일이,
말 한마디 꺼내는 일이,
그렇게 어렵다.
불안은 시간의 틈에 머무른다.
지나간 후회와
다가올 걱정 사이의 회색지대.
그곳에서 사람은 자주 길을 잃는다.
마음은 지금 여기에 있지 않고,
몸은 한참 전에 멈춰 있거나,
머리는 멀리 앞서 달려가 있다.
그렇게 분열된 시간 속에서
내 마음은 늘 어딘가 허공을 딛고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나는 알게 되었다.
불안을 없애려 할수록
그것은 더 또렷해진다는 것을.
불안은 없애는 감정이 아니라,
살펴보고 다독여야 할 감정이라는 것을.
그때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불안이 몰려올 때마다
“또 왔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이번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거야?” 하고
조용히 들어주기 시작했다.
그제야 조금씩, 아주 조금씩
불안이 자리를 줄였다.
나도 모르게 한 칸, 한 호흡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지금도 불안은 여전히 나를 찾아온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 감정은 나를 망가뜨리려는 게 아니라
나를 지키려는 방식이었음을.
어쩌면 서툴고, 조급하고,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살아내고 싶은 마음이
그 이름으로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한 가지 생각에 갇힐 때가 있다.
처음에는 가볍게 스친 생각이었는데,
곧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이내 멈추지 않고 맴도는 회전목마처럼
생각은 계속 원점으로 돌아오고,
나는 그 위에서 자꾸만 같은 자리에 선다.
‘내가 왜 그 말을 했지?’
‘그 사람은 왜 그런 표정을 지었을까?’
‘혹시 내가 실수한 건 아닐까?’
‘앞으로 어떻게 될까…’
생각은 사건을 복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의심하고, 공격하고, 약하게 만든다.
심장은 현실보다 더 빠르게 뛴다.
이미 일어난 일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상이
더 나를 괴롭힌다.
사람은 불안을 통제하려고 생각을 시작하지만,
생각이 불안을 통제하는 순간
그 안에서 갇히게 된다.
생각의 회전목마는 멈출 줄 모르고,
나는 그 위에서 점점 지쳐간다.
혼자 있는 시간이 고요해지지 않고,
말없이 앉아 있는 순간조차 시끄러워진다.
가끔은 생각을 이기려 들지 않고
그저, 생각을 흘려보내는 게 낫다.
모든 문장을 끝까지 따라가지 말고,
그저 ‘지금 생각이 많아지고 있구나’ 하고
한 발 떨어져 바라보는 것.
생각과 나 사이에 약간의 거리를 두는 일.
그게 처음에는 잘 되지 않지만,
연습하다 보면,
회전목마는 어느 순간
조금씩 느려지고,
결국 멈추기도 한다.
회전목마에서 내려야만
눈에 보이지 않던 풍경이 보인다.
머릿속이 아닌
몸의 감각으로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
손끝의 온기, 눈앞의 햇살,
작은 숨결 하나에도
삶은 담겨 있다.
그러니 생각이 나를 몰고 갈 때,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이렇게 말한다.
“이건 생각일 뿐이야. 진짜 현실은 아직 여기에 있어.”
불안은 예고 없이 온다.
시간을 가리지 않고, 장소를 가리지도 않는다.
그저 가슴이 답답해지고,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어떤 말도, 위로도 들리지 않을 때.
그럴 땐 큰 위로보다는
작고 익숙한 의식이 필요하다.
창문을 열고 바람을 한번 맞는 일.
물 한 컵을 천천히 마시는 일.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고 손끝을 바라보는 일.
낡은 노트에 무작정 단어를 써 내려가는 일.
이건 별것 아닌 일처럼 보이지만,
불안에 휩쓸리는 걸 잠시 멈추게 하는
아주 조용한 닻 같은 일이다.
불안은 흔히 ‘마음의 문제’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몸의 감각이 무너질 때 더 크게 밀려온다.
몸이 무너질 때, 감정도 그 균열을 따라 쏟아진다.
그래서 작은 의식들이 중요하다.
몸을 단단히 이곳에 붙잡아두는 루틴,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
몸이 먼저 기억하게 해주는 행위.
향기 좋은 핸드크림을 바르는 일,
커피잔을 양손으로 감싸 쥐는 일,
익숙한 음악을 반복해서 듣는 일,
베개를 털어 햇볕 냄새를 입히는 일.
이 모든 것이 의식이 되고,
그 의식은 곧 안정을 낳는다.
불안은 말로 이길 수 없다.
논리로도 설득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움직임은 다르다.
몸이 먼저 안정되면, 마음도 따라오니까.
나는 요즘, 이런 의식들을 애써 챙긴다.
세상이 어지럽고, 하루가 짧게 느껴질수록
의식의 시간은 더욱 중요해진다.
의식은 나를 통제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나를 돌보는 방식이다.
나를 다그치지 않고,
다독이며 살기 위한 작고 반복적인 선택.
그건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내 마음을 살려주는 작은 마법이다.
두려움은 생각보다 더 가까운 곳에 있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는 일상 속,
말 한마디, 선택 하나, 관계의 틈 사이에
조용히 몸을 숨긴 채 살아간다.
누군가는 말한다. “난 겁이 없어.”
하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두려움을 안고 산다.
거절당하는 게 두렵고,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렵고,
실패할까 봐, 또는 성공 이후에 감당할 수 없을까 봐
또 다른 두려움을 만들어낸다.
두려움은 약한 사람이 느끼는 게 아니다.
오히려 살아 있다는 증거다.
무언가를 소중히 여길수록,
잃는 것에 대한 상상은 더 커진다.
그 마음은 나약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진심이기 때문에 아픈 것이다.
문제는 두려움 그 자체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두려움을 피해만 가려할 때 시작된다.
피하고, 외면하고, 모른 척하다 보면
두려움은 점점 커져서 결국 우리를 압도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두려움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조금은 작아진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정말 그렇다.
두려움을 제대로 바라보면
그 안에 내가 지키고 싶은 것,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건 내가 여전히 살아 있고,
소중한 무언가를 품고 있다는 증거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두려움과 함께 걸어가는 능력이다.
‘두렵지만 해보는 것.’
그게 어른이 되어도 가장 어려운 일이지만,
가장 가치 있는 훈련이기도 하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두려움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과거에 갇히지 않고
미래를 피해 다니지도 않게 된다.
그저 오늘의 나로,
오늘의 용기로,
한 걸음 내딛는 것.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단단한 용기다.
불안은 처음부터 내 안에 있었다.
어릴 적, 엄마의 표정이 달라지면 마음이 움츠러들었고
누군가의 말투가 조금만 낯설어도
머릿속은 벌써 수십 가지의 반응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건 예민함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내기 위한 생존의 감각이었다.
불안은 나를 힘들게 했지만,
한편으론 나를 지켜주는 감시자이기도 했다.
조심하게 만들고,
상처받지 않도록 대비하게 하고,
언제나 한발 먼저 눈치를 챘다.
하지만 문제는,
불안이 내 삶을 통제하려 들 때부터 시작된다.
삶을 조심만 하다 보면
정작 살아내는 순간은 줄어든다.
그래서 나는 이제
불안을 없애려 하지 않는다.
그건 애초에 사라질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대신 천천히,
조금씩 나만의 방식으로 길들이기로 했다.
불안이 찾아오면
“그래, 또 왔구나” 하고 반갑게 맞이한다.
“이번엔 어떤 생각을 안고 왔어?”
그렇게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 물음 하나만으로도
불안은 잠시 주춤한다.
길들이기란
억누르거나 버리는 일이 아니다.
그 존재를 인정하고,
공존할 방법을 찾는 일이다.
불안을 억지로 없애려 들면
그 감정은 그림자처럼 더 짙어지고
결국 내 안에서 폭발한다.
하지만 받아들이고 다독이면
불안은 점점 목소리를 낮춘다.
그제야 내 안의 다른 감정들이
조심스럽게 다시 고개를 든다.
이제 나는 안다.
불안은 내 적이 아니다.
다만 말이 통하지 않을 땐
잠시 야생처럼 날뛰는 존재일 뿐.
그러니 천천히,
내 안에서 이 감정을 알아가고
조율하고, 때로는 쉬어가며
내 삶의 속도에 맞춰
오래 함께 걸어가는 일.
그게, 불안이라는 이름의
오래된 동반자를 길들이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