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괜찮지 않다는 걸 말할 수 없어서
어릴 적, 나는 친구들 앞에서 크게 넘어졌던 기억이 있다.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다 발이 엉켜 얼굴부터 바닥에 닿았고,
무릎은 까졌고, 사람들 웃음이 내 귀에 박혔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뭔가를 할 때마다 ‘혹시 또 실수하면 어쩌지’,
‘사람들이 비웃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기 시작한 건.
그 부끄러움은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렸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삼키는 게 익숙해졌고,
가끔 칭찬을 받아도 겉으로만 “고맙습니다” 하고 속으론
‘나를 오해한 게 아닐까’ 의심하곤 했다.
부끄러움은 그저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나를 한 켠으로 물러서게 하는 힘이 되었다.
한 발짝 앞으로 나가고 싶은 순간마다
‘넌 아직 아니야’라는 목소리가 울렸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런 감정을 ‘내면화된 시선의 감옥’이라고 부른다.
외부의 평가가 내 안으로 들어와
자기 자신을 감시하고 검열하게 만드는 구조.
부끄러움은 나쁜 감정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나의 존재 전체’를 덮어버릴 때,
문제가 된다.
내가 ‘실수를 한 사람’이 아니라
‘실수 그 자체인 사람’처럼 느껴질 때,
자신에게 기회를 주지 못한다.
상담실에서 마주한 많은 이들이 말했다.
“제가 너무 소심해서요.”
“사람들 앞에 서는 게 두려워요.”
“자꾸 숨고 싶어요.”
그리고, 그 아래엔 언제나
‘부끄러웠던 순간’이 있었다.
그 순간에 얼어붙은 마음이,
아직도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부끄러움을 품은 채 앞으로 나아가는 법은
그 감정과 대화를 시작하는 데서부터다.
왜 나는 그때 그렇게 창피했는지,
왜 아직도 그 장면이 잊히지 않는지,
그 기억을 꺼내 보고,
그 아이의 손을 잡아주는 일.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때때로 숨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부끄러움 뒤에는
사람들에게 이해받고 싶었던 마음이 있다는 걸.
나를 드러내고, 받아들여졌던 경험이
얼어붙은 감정을 천천히 녹여준다는 걸.
감정을 바꿀 순 없지만,
그 감정을 대하는 태도는 바꿀 수 있다.
부끄러움은 나를 숨게 만들었지만,
이제는 그 감정을 감싸 안으며
천천히 밖으로 걸어나오는 연습을 하고 있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치를 본다.
어떤 표정을 짓는지, 그 말에 어떻게 반응할지
늘 ‘상대’가 먼저다.
나는 왜 이렇게 신경을 많이 쓸까?
왜 사람들 앞에만 서면 위축되고,
내 생각조차 불분명해지는 걸까?
어릴 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기억을 더듬으면, 나도 잘 웃고, 잘 말하던 아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꾸만 작아졌다.
누군가의 짜증 섞인 말투,
'그건 좀 아닌 것 같아'라는 표정 하나에도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지금 이 말이 이상했나?”
생각이 머릿속을 돌고 또 돈다.
그렇게 위축되는 내 모습이 싫었고,
그래서 더 잘해보려고 애썼다.
더 착하게, 더 조심스럽게, 더 친절하게.
그런데도 불편한 표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는 거리낌 없이 말하는데
나는 아직도 한 마디 꺼내기가 어렵다.
상담실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전 왜 사람 앞에서만 작아지는 걸까요?”
그 질문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상담심리학에서는 이것을 ‘관계에서의 자기 위축’이라 부른다.
특히 정서적 안전감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관계 안에서 자신을 ‘작게’ 만들어 살아남으려는 방식.
사실 그건 자신을 보호하려는 전략이었다.
싫은 소리를 듣기 싫어서,
상처받기 싫어서,
있는 그대로의 내가 거절당할까 봐
조심스럽게 만든 마음의 갑옷.
하지만 그 갑옷은 너무 무거워서
나조차 나를 못 알아볼 때가 있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입니다.”
그 말을 듣던 날,
나는 처음으로 ‘내가 잘못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작아진 게,
성격이 이상해서도,
의지가 부족해서도 아니라는 것.
그저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그런 나름의 생존 방식이었다는 것.
그러자 마음이 조금 느슨해졌다.
내가 나를 이해하기 시작하니
사람들 앞에서 덜 흔들렸다.
작아지는 나를 미워하기보다
그런 나를 안아주는 쪽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지금도 긴장되는 순간은 많다.
말할 때 숨이 가빠지고,
괜한 걱정이 앞설 때도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렇게 중얼거린다.
“괜찮아. 지금 너는 너를 지키고 있어.”
“천천히 해도 돼. 잘하고 있어.”
나를 키워가는 건,
결국 내가 나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였다.
문득 생각났다.
나는 어릴 때부터 유독 "미안해"라는 말을 많이 했다.
누가 나를 부딪쳐도, 내가 미안하다고 했고
친구가 늦게 와도,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했다.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넌 왜 네가 잘못하지 않아도 그렇게 자주 사과해?”
그 말에 웃으며 넘겼지만,
속으론 왠지 울컥했다.
왜였을까?
왜 나는 그렇게 자주, 이유 없이
죄송하다고, 미안하다고 말했던 걸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말은 사과가 아니라 방어였다.
상대가 나를 오해하지 않도록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나를 싫어하지 않도록
미리 던지는 말.
‘미안해’는 내 마음을 보호하는 울타리였고,
동시에 나를 더 작아지게 만드는 주문이기도 했다.
물론 사과는 중요하다.
사과는 관계를 회복하는 데 꼭 필요한 태도다.
하지만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일에까지
죄책감을 덮어쓰는 것은 다르다.
누군가의 불편한 감정까지
모두 내 탓이라고 여기는 순간,
나는 점점 더 나를 불신하게 된다.
나의 말, 행동, 존재 자체가
늘 실수투성이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깨달았다.
내가 불편하게 했다고 해서
그게 곧 나의 잘못은 아니라는 것.
상대의 감정은 그 사람의 몫이다.
내가 그 상황에서 책임질 만큼의 태도를 보였다면
그 이상은 더는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
그건 무책임이 아니라,
건강한 경계다.
그리고 그 경계는
내 마음을 건강하게 지키는 데 필요하다.
“사과하지 않아도 돼요.”
어느 상담 장면에서
내담자에게 이 말을 전했던 적이 있다.
그 말에 울먹이던 그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나도 그랬다.
내가 용서를 구할 일이 아니었는데도
늘 눈치를 보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모든 불편함이 내 책임은 아니다.
불편한 감정이 생겼다고 해서
그게 죄가 되지는 않는다.
마음이 그런 경계선을 스스로 허락해주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안도의 숨을 쉬었다.
내가 나에게 말해주었다.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사과하지 않아도 돼.”
“괜찮아요.”
“아니에요, 전 정말 괜찮아요.”
그 말이 입버릇이 되어버린 사람이 있다.
눈가에 눈물이 고여도, 입꼬리는 늘 올라가 있다.
참 신기한 일이다.
마음은 울고 있는데, 얼굴은 웃고 있는 모순.
그건 위로받기 위한 웃음이 아니었다.
그보다 먼저,
자신이 무너져버릴까 두려워서 짓는 웃음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런다.
한 번 울기 시작하면
끝이 날 것 같지 않아서
아예 눈물을 금지해버렸다고.
한 번 주저앉아버리면
다시는 못 일어날 것 같아서
기댈 곳 없이 꿋꿋한 척 버텼다고.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낸 사람들의 웃음은
가볍지 않다.
웃음 하나에
억눌린 말들, 삼켜버린 감정들,
도망치듯 걸어온 발자국들이
모두 묻어 있다.
상담실에서 그런 분을 만난 적이 있다.
모든 걸 농담으로 넘기던 분.
힘들다고 말할 줄 몰라서
끝내 ‘힘들다’는 말 대신,
“뭐, 다 그런 거죠.”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웃음 뒤엔
항상 깊은 외로움이 숨어 있었다.
그 외로움은
누군가에게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쉽게 허락받지 못한다.
약해도 된다는 것,
잠시 멈춰도 된다는 것,
힘들면 기대도 된다는 것.
그래서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못한 채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자꾸만 웃는다.
표정은 괜찮은 사람처럼
행동은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하지만 결국 마음은 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한 그 웃음이
얼마나 외롭고 지치는 일인지.
웃고 돌아선 밤,
홀로 남은 방 안에서
텅 빈 가슴을 안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
지금 그 웃음 뒤에 있는 마음,
나는 안다고.
그리고, 당신은 괜찮다고.
웃지 않아도 된다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당신으로
충분하다고.
처음엔 용서라는 단어가 너무 커보였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도 어려운데
나 자신을 용서한다는 건 더더욱 막막했다.
뭘 용서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계속 내 안에서 어떤 죄의식이
모양을 바꾸며 웅크리고 있었다.
실수했던 일들.
상처 줬던 말들.
도망쳤던 기억들.
그때 그러지 말 걸,
그 말을 하지 말 걸,
왜 그랬을까.
그런 마음의 찌꺼기들이 마음 구석구석에 쌓여
나조차 나를 좋아할 수 없게 만들었다.
“왜 그때 그랬어요?”
“그걸 왜 그렇게밖에 못했어요?”
그 말은 늘 내 안에서 내게 먼저 날아왔다.
누군가 나를 비난하기도 전에
나는 나를 먼저 단죄하고 있었다.
마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벌을 주는 것처럼.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조금씩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알게 됐다.
용서란 잊는 게 아니라
이해하고 다시 믿어보는 일이라는 걸.
그때의 나는,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거였다고.
내가 미워했던 그 선택들조차
사실은 그 순간의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
어떻게든 나를 지키려는 몸부림이었을 수도 있다는 걸.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던 시간은
결국, 나 자신을 전혀 믿지 못하고 있던 시간이었다.
“넌 또 그렇게 할 거잖아.”
“넌 늘 후회만 하는 사람이잖아.”
그렇게 믿어버리면
나는 나의 가능성을 스스로 막아버리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용서라는 건
결국 다시 믿는다는 뜻이었다.
실수할 수 있어도,
때로는 망설이거나 멈출 수 있어도
내가 나를 다시 믿기로 결심하는 순간부터
회복은 아주 천천히, 조용히 시작되었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내가 나를 다시 믿기 시작했을 때,
그제야 주변 사람들의 말이
따뜻하게 들리기 시작했다는 걸.
이제야 비로소 누군가의 온기가
마음에 닿을 수 있었다는 걸.
가끔은 여전히 흔들린다.
어디선가 ‘그때 넌 왜 그랬냐’는 마음속 질문이
불쑥불쑥 올라온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괜찮아.
나는 이제 나를 믿어보기로 했으니까.”
나는 늘 무언가 잘못한 것 같은 기분 속에서 살아왔다.
별일 아닌데도, 괜히 내 탓 같고,
내가 잘못한 건 아닐까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곤 했다.
누군가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으면,
그 이유가 설령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도,
속으로는 ‘혹시 내가 뭘 잘못했나’부터 떠올랐다.
아무도 나를 탓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스스로를 탓하고 있었다.
그 감정은 아주 오래 전부터 몸에 배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작은 실수 하나에도 “너 때문이야”라는 말을 들었고,
누군가 아프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내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이 자동으로 따라왔다.
어쩌면 그 순간부터 나는 내 안에 감옥을 하나 짓고,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둬두었던 것 같다.
죄책감이라는 감옥은 이상하게도 문이 열려 있어도 나올 수 없게 만든다.
이미 죄수가 되어버린 마음은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행복한 순간에도 마음 한쪽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네가 행복할 자격이 있니?”
웃으면서도 괜히 미안해지고,
즐거운 일 앞에서도 눈치를 보게 된다.
그런데 상담을 통해 알게 된 건,
그 죄책감의 상당 부분은 사실 근거 없는 것이었다는 거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그냥 그 상황에서 아이였던 내가 감당할 수 없었던 감정들을 대신 짊어졌던 거였다.
부모의 불화, 가족의 아픔, 어른들의 무심한 말.
아이였던 나는 그걸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결국 다 내 잘못이라고 결론 내리고 말았던 거다.
그걸 알게 되자, 조금씩 감옥의 벽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건 아니다.
여전히 어떤 순간에는 괜히 내 탓 같고, 이유 없는 미안함이 올라온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목소리에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충분히 잘하고 있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과정을 내적 작업이라고 부른다.
내 안에 자리 잡은 잘못된 믿음, 오랜 죄책감을 하나하나 다시 들여다보고,
진짜 주인을 찾아 돌려주는 일이다.
그 작업은 쉽지 않지만, 분명히 해방으로 이어진다.
이제는 안다.
죄책감은 나를 지키는 방법이 아니었다.
그건 오히려 나를 가두는 감옥이었다.
그리고 그 감옥의 문은 애초에 열려 있었다는 것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는 그 문을 나와 걷고 있다.
미안함 대신 책임을, 죄책감 대신 자유를 배우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때 그 말은 정말 별일 아니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였고,
누구도 그걸 오래 기억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말이 마음에 남아,
자꾸만 다시 떠오르고,
밤에 누워 뒤척이는 이유는 뭘까.
"왜 그랬을까."
"그때 그러지 말 걸."
"괜히 내 탓인 것 같아."
그 문장들은
이미 지나간 일을 붙잡고
계속해서 마음 안에서 커지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아주 작은 실수가
커다란 죄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들었던 말이 있다.
"남에게 피해 주지 마라."
"착한 아이가 돼야 해."
"네가 조심했어야지."
그 말들이 반복되다 보면
조심이 습관이 되고,
조심이 지나쳐 자기 비난이 되고,
어느 순간부터는
사소한 잘못에도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괜찮다고 해도
나는 자꾸 머릿속으로
그 장면을 되돌리게 되고,
누가 상처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으로
계속 나를 죄인처럼 몰아간다.
죄책감은 반드시 나쁜 감정이 아니다.
잘못을 인식하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건강한 정서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죄책감이
'지나치게 부풀려지고 고착화될 때' 생긴다.
그럴 땐
실수보다도
'실수한 나' 전체를 부정하게 된다.
그래서 자꾸 움츠러들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조심스러워지고,
어떤 말이나 행동도 쉽사리 나올 수 없게 된다.
상담실에서도 자주 만난다.
"그때 제가 너무 잘못한 것 같아요."
"그냥 아무 일도 아닌데 자꾸 제 탓 같아요."
그러나 이야기를 함께 따라가 보면
그 잘못은 대부분
혼자서 너무 크게 키워온 상상 속 그림자에 불과하다.
누구도 탓하지 않았고,
누구도 기억하지 않았던 일인데도,
그 안에서만큼은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죄책감에 빠졌을 땐
먼저 그 감정이
내가 지금 내 안에 있는 과거의 기준에 부딪히고 있다는 신호라는 걸 알아차리는 게 필요하다.
‘정말 그렇게까지 잘못한 걸까?’
‘내가 나를 너무 가혹하게 몰아붙이는 건 아닐까?’
때로는 이런 질문들이
그 무거운 마음에 작은 숨구멍을 만들어준다.
우리는 모두 실수를 한다.
그리고 그 실수는,
반성으로 이어질 수는 있어도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 되어선 안 된다.
“사소한 잘못이 거대한 산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건 내가 너무 착하게 살았다는 반증일지도 모릅니다.”
그 말을 어느 내담자에게 들려주자
그는 울듯 웃으며 말했다.
"그런 말, 처음 들어봐요.
그냥…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날도 그랬다.
조금이라도 말이 어긋나면
"내가 말을 잘못했나?"
"혹시 기분 상했을까?"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누군가 표정이 조금만 달라져도
나 때문인가 싶어 눈치를 보고,
메시지 답이 늦어지면
또 나 혼자만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키웠다.
이쯤 되면 너무 예민한 거 아닐까 싶다가도,
‘혹시 진짜 내가 뭘 잘못한 건 아닐까?’
끝없는 자책으로 마음은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렇게 살았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먼저 살피고,
상대의 반응을 내가 다 짊어졌다.
어떤 관계든 나만 더 많이 신경 쓰는 기분.
무언가 불편한 일이 생기면
늘 내 탓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상담실에서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선생님이 말했다.
"그건… 정말 당신의 잘못일까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질문을 누군가 내게 해준 건 처음이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될 일까지
짊어지고 살아왔다.
부모가 늘 불안정했던 것도,
친구가 감정을 함부로 던졌던 것도,
회사에서 누군가 나에게 무례했던 것도.
그 모든 것을
‘내가 더 잘했더라면 달라졌을까?’ 하며
자책하고 있었던 거다.
그렇지만 그건 내가 만든 잘못이 아니었다.
단지 그 상황 속에 있었을 뿐이고,
누군가의 부족한 말과 행동이
내 탓이 아닌데도
나는 죄의식처럼 껴안고 있었다.
‘내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
처음엔 너무 낯설고 조심스러운 생각이었다.
그걸 인정하면
무책임한 사람처럼 보일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그 작은 깨달음은
내 마음 안에 부드럽게 파문을 일으켰다.
그 말은 나를 변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정당하게 바라보게 해주는 말이었다.
죄책감은
내가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는 증거다.
하지만 지나친 죄책감은
나를 지키는 힘까지 잃게 만든다.
그 경계를 알아차릴 수 있어야
비로소 숨을 돌릴 수 있다.
이젠 조금씩
내가 책임져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연습을 한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이런 말을 조용히 되뇐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닐 수도 있어.”
그 문장은 나를 자유롭게 했다.
"쟤는 왜 저래?"
초등학교 3학년 때, 체육 시간이었다.
나는 달리기를 하다 넘어졌고,
무릎이 까진 것보다 더 아팠던 건
친구들의 웃음소리였다.
그 이후였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두려워졌고,
작은 실수도 ‘망신’처럼 느껴졌다.
그땐 몰랐다.
그때 내 안에서 수치심이 자라기 시작한 줄은.
수치심은 참 이상한 감정이다.
명확한 이유 없이 찾아오고,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든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무너진다.
무언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내가 틀렸어. 내가 부족해.’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리고 그 감정은,
누군가의 시선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어릴 때 부모가 한숨을 쉬며 던졌던 말,
"너는 왜 항상 그렇게…"
칭찬은 아껴도 지적은 쉽게 하던 선생님,
단체 사진에서 혼자 겉돌던 느낌.
이 모든 것들이 마음속에서 ‘나’에 대한 기준을 만들었다.
그 기준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남들이 정한 기준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나 자체가 부끄럽다’는 감정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수치심의 정체다.
"내가 뭔가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존재하는 방식 자체가 틀렸다"는 감각.
수치심은 무서운 감정이다.
그것은 사람을 조용히 움츠리게 만든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하고,
시선을 피하게 하며,
관계에서 한 걸음 물러서게 만든다.
그런데 상담실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 감정을
죄책감과 혼동한 채 살아간다.
“내가 잘못한 것 같아요.”
“그때 제가 그랬던 게 아직도 마음에 걸려요.”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그 감정은 종종 이렇게 바뀐다.
“그때, 내가 너무 부끄러웠어요.”
수치심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라나지만,
그것을 치유하는 건
나 자신의 시선이다.
"나는 그때 최선을 다했어."
"그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었어."
"그 순간의 나도 괜찮았어."
그렇게 자신에게 말해줄 수 있을 때,
조금씩 마음이 펴진다.
타인의 평가 대신
내 안의 목소리를 믿게 된다.
수치심은 줄어들고,
대신 자존감이 조용히 숨을 쉰다.
이제는 안다.
누구의 시선도,
내 존재를 부끄럽게 만들 권리는 없다는 걸.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다.
누군가 내 이름을 크게 부르거나
갑자기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리는 순간이면
속으로 작은 파도가 일었다.
‘아, 나 지금 너무 이상하게 보이진 않을까.’
‘괜히 주목받는 건 아닐까.’
그럴 땐, 얼른 시선을 피했다.
웃어야 할 타이밍에 괜히 입을 다물고,
말해야 할 순간에 목이 막히는 것처럼.
이해 못 받을까 봐,
조금만 어긋나도
사람들이 날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그게 부끄러움의 얼굴이었다.
부끄러움은 조용한 감정이다.
크게 드러나진 않지만,
한 사람을 안에서부터 살며시 접어버린다.
말을 줄이게 만들고,
표정을 가리게 하고,
가슴속 하고 싶은 말을 조심스레 닫아버린다.
누군가에게는
"그냥 성격이 조용하구나" 싶을지 모르지만
내면에서는 수없이 많은 말과 감정이
“그건 말하면 안 돼.”
“그러면 바보 같아 보여.”
라는 검열 아래 갇혀 있는 경우가 많다.
상담실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도 그랬다.
"저는 원래 낯가려요."
"그냥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요."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안에는 아주 오래된 상처가 숨어 있었다.
누군가 앞에서 무안했던 기억,
내가 한 말에 다들 웃었던 순간,
어떤 실수를 했을 때 누군가의 시선이
너무 차갑게 느껴졌던 그때.
그런 경험은 마음속에
'나는 들키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깊은 감각을 남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감정을 “부끄러움”이라 부른다.
하지만 말하고 나면,
들켜도 아무 일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내가 느낀 감정을 꺼내도,
내가 한 실수가 있다고 말해도,
사람들은 생각보다 괜찮게 들어준다.
그걸 처음 경험한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생각보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게 그렇게 창피한 일은 아니었더라고요.”
그리고 그때,
비로소 숨지 않아도 되는 나를
조금씩 허락하게 된다.
우리는 누구나
완벽하지 않고,
어딘가 서툴고,
때론 상황에 어울리지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그건 그냥 사람의 모양일 뿐이다.
조금씩 그걸 인정하면서
숨었던 나를 꺼내 보는 연습.
그게 어쩌면 회복의 시작이다.
어떤 일은 시간이 흘러도 마음속에 오래 남는다.
남은 감정이 꼭 크거나 격한 건 아닌데,
문득 떠오르면 가슴 한켠이 조용히 조여온다.
"그땐 내가 좀 더 따뜻했어야 했는데."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 그냥 넘어가지 말고 도왔어야 했어."
말로 꺼내면 별거 아닌 것처럼 들리지만,
이런 생각들은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안에서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때때로
우리를 머뭇거리게 하고,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만들고,
또 다른 선택 앞에서 자꾸 움츠러들게 한다.
죄책감은, 어쩌면 가장 오래된 감정 중 하나다.
어릴 적 부모님의 얼굴을 살피며
"내가 뭘 잘못했나?" 하고 스스로를 탓하던 그 순간부터
이미 우리 마음엔 죄책감이 자리 잡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죄책감은 본질적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거나,
중요한 가치를 어겼다고 느낄 때 생긴다.
그만큼 양심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죄책감이 자리를 떠나지 않을 때다.
이미 지나간 상황이고,
그 순간의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때의 나’를 자꾸 비난하는 일.
그럴 땐 죄책감을 없애려고 애쓰기보단,
그 감정이 남아 있는 이유를 들여다보는 것이
회복의 시작일 수 있다.
“내가 왜 아직도 이 일에 마음이 걸릴까?”
“내가 진짜 원했던 건 뭐였을까?”
“그때의 나, 그 상황에서 정말 잘못한 걸까?”
이렇게 묻다 보면
죄책감 뒤에 숨어 있는
슬픔, 외로움, 후회 같은 감정들이
조금씩 그 얼굴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감정들을 하나하나
차분히, 천천히,
무릎 꿇고 앉아 보듬어줄 수 있다면
죄책감은 차츰 우리를 놓아주기 시작한다.
죄책감을 완전히 지워낼 순 없다.
하지만 그 흔적을
비난이 아닌 이해의 눈빛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해지고
조금 더 다정해진다.
과거의 내가 놓쳐버렸던 마음을
지금의 내가 보듬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회복의 길 위에 있다.
가끔은, 누군가를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아프다.
문득 떠오르면 입술을 깨물게 되고,
괜찮다고 넘겼던 그 장면이
몇 년이 지나도 또다시 내 앞에 선다.
그럴 땐, 나도 모르게
그 사람에게 화가 난 줄 알았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실은 그때 아무 말도 못 했던 내 자신에게
더 미안하고, 더 화가 나 있던 거였다.
우린 늘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다 괜찮다고 넘기고,
사소한 일로 오해 사지 않으려 조심하고,
실은 아파도
“내가 예민한 건 아닐까?” 하며 스스로를 눌렀다.
그러다 보니 상처를 준 사람이 아니라
그 상황을 참고 넘긴 내가 문제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건 진짜 이상한 일인데,
그렇게 스스로를 탓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참 많다.
그래서 진짜 ‘용서’는
그 사람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때의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일이다.
그때 왜 울지 못했는지,
왜 아무 말도 못 했는지,
왜 참아야만 했는지.
그 모든 이유를 다 들어준 뒤에
“그럴 수 있었지” 하고
내 어깨를 툭 건드려주는 일.
용서는
그렇게 돌아가는 일이다.
상대를 향하던 마음을 걷어
내 안으로 천천히 돌려주는 일.
지나간 일인데 왜 아직도 마음이 아프냐고
누군가 말하면
이제는 웃으며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의 나는
혼자서 감당해야 했거든요.
그래서 지금이라도
그 마음을 꼭 안아주고 싶어요.”
그게 바로
진짜 용서의 시작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