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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다정해지는 연습

“이 글은 상담심리학자로서 수많은 내담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동행하며,

그들의 감정 여정을 상징적으로 재구성한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나를 인정하는 연습


가끔은 그런 날이 있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뭔가 마음이 무겁다.

대단히 힘든 일도 없었고,

누가 상처 주는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왠지 내가 나를 깎아내리는 기분이 드는 날.


‘왜 이렇게 아무것도 못했지.’

‘다른 사람들은 잘만 하는데.’

‘난 왜 이 모양일까.’


혼잣말이 칼처럼 날아와

내 마음을 툭툭, 베고 간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문득 거울을 본다.

거기엔

어깨가 굳어 있고,

입꼬리가 처져 있고,

어딘가 기운 빠진 내가 서 있다.


어디서부터 틀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하루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지는 날.


그럴 땐,

예전엔 억지로 일어나서

일에 몰두하거나

아무렇지 않은 척

바쁘게 하루를 채우곤 했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르다.

그냥 인정해 보기로 했다.

‘오늘 나는 좀 무기력하다.’

‘기운도 없고, 의욕도 없다.’

‘마음이 뚝 하고 꺾여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그럴 수도 있지.”

“오늘은 그런 날이구나.”


별일 아닌 것 같지만

이건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이다.

기분이 가라앉았다고

내 존재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마음이 흐리다고 해서

내가 실패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자신에게 매정하다.

조금만 실수해도,

조금만 나태해도

바로 스스로를 탓한다.


하지만 삶은 하루로 결정되지 않는다.

기분도, 감정도 흐르고 변한다.

오늘 내가 느슨한 건

내가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내가 지쳐 있었다는 신호일 수 있다.


그러니

오늘의 나를 다그치지 말고

조용히 인정해주자.

“오늘 너, 많이 애썼다.”

“괜찮아, 쉬어도 돼.”


그 말 하나가

다음 날의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든다.

자기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든든한 일이다.

그게 내가 나를 지켜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조금 덜 채워도,

조금 느려도,

충분히 괜찮은 사람인지 모른다.


오늘의 나,

있는 그대로 참 잘 버티고 있다고

말해주자.




내 마음을 지켜내는 작은 경계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누군가의 말에 쉽게 흔들릴까?"

좋은 말이어도, 나를 위한다는 말이어도

자꾸만 마음이 뻐근하고

나도 모르게 내 쪽을 먼저 의심하게 되는 그 순간들.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싶었다.

눈치도 빠르고,

불편함도 없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조금 불편해도 웃었고,

속이 쓰라려도 “아냐, 괜찮아” 하고 넘겼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게 자꾸 마음에 남기 시작했다.

내가 나를 설득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속에서는 자꾸 다른 말이 들려왔다.

"사실 싫었어."

"그 말, 나한테 상처였어."

"왜 난 이걸 계속 참지?"


그제야 알았다.

나는 나를 지키는 경계선을

한 줄 한 줄 지워가며 살아왔다는 걸.


사람 사이의 경계는

거절이 아니라 ‘존중’이라는 걸

한참을 지나서야 이해했다.


조금 늦게 답장해도 괜찮고,

가끔은 하기 싫은 약속을 미뤄도 괜찮고,

그 자리에서 바로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리고 내 마음이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그 마음을 지킬 이유가 된다.


처음에는

그걸 나 자신에게 허락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다.

경계가 이기적인 건 아닐까.

거절이 관계를 깨트릴까 봐 걱정됐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내가 나를 조금씩 지켜주기 시작하자

관계도 조금씩 달라졌다.


더 이상 억지로 웃지 않아도

상대가 나를 불편해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내 마음을 인정하고 지켜주니까

오히려 더 건강하게 관계가 이어졌다.


경계는 마음의 담장이 아니라,

내가 나를 보호하는 작은 울타리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이 경계가 오히려 관계를 망치지 않게 해준다.


요즘은 아주 사소한 것도

마음에 물어보려고 한다.

"지금 너, 괜찮아?"

"이건 조금 힘든 거 아니었어?"

"그 말, 안 듣고 싶었지?"


그리고 마음이 작게라도

끄덕이는 것 같으면

그 순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나를 먼저 존중해주는 일이

익숙해지려면

아직 시간이 더 걸릴지 모르지만,

그 연습이 내 마음을 조용히

지켜주는 건 분명하다.




불안전해서 더 따뜻한 나


사람들은 말한다.

단단한 사람이 되라고.

흔들리지 않고, 상처받지 않고,

제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나도 한때는 그렇게 되고 싶었다.

쉽게 울지 않고,

상처받았다 티 내지 않고,

누가 뭐래도 웃으며 넘기는 사람.


근데 그걸 따라하려다 보니

자꾸 나를 잃었다.

속에서는 자꾸 소리가 나는데

겉으론 아무 일도 없는 척.


그게 멋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조금 슬펐다.


내가 가장 나답지 않은 순간들이

바로 그런 때였으니까.


요즘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나는 좀 불안정한 사람이다.

상처에 오래 머물기도 하고,

별거 아닌 말에도 마음이 쿡 찔리고,

때로는 혼자 밤새도록

한마디 말을 곱씹기도 한다.


근데 이상하게도

그런 내가 싫지 않다.


그만큼 나는

사람에게 마음을 쓰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만큼 진심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상처를 겪은 사람은

타인의 상처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자기가 아팠던 만큼

누군가의 아픔을 더 조심스럽게 다룬다.


단단하지 않아도 괜찮다.

모서리가 둥글고,

때로는 투명하게 깨지는

그 불안정한 마음들이

오히려 나를 더 사람답게 만들어 준다.


심리학에서는

‘회복탄력성’이라는 말을 쓴다.

넘어지지 않는 사람보다,

넘어진 후 다시 일어나는 힘.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흔들린 후에 중심을 찾는 사람.


나는 이제 안다.

완벽하지 않아도,

마음이 매일 다르더라도,

그 모습 그대로 따뜻할 수 있다는 걸.


어쩌면 사람은

그 불안전함 덕분에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있어줄 수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그런 마음도

이제는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조금 모자라고,

조금 서툴러도,

그게 나니까.




내가 나를 위로하는 법을 배웠다



예전에는 위로라는 게 꼭 누군가에게 받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힘들 때 찾아갈 누군가가 있고,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줄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한마디 해주면

마음이 좀 나아지는, 그런 거.


근데 살다 보면 그런 장면이

늘 있는 것도 아니고,

딱 그 타이밍에 누군가 내 옆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때마다 느꼈다.

기댈 어깨가 없을 땐,

나라도 나를 안아야겠구나.


처음엔 서툴렀다.

“괜찮아”라는 말조차

입 밖으로 꺼내는 게 어색했다.

혼잣말을 하면 괜히 초라한 기분이 들고,

괜히 눈물이 더 나기도 하고.

그런데 그 시간이 쌓이고 나니까,

조금씩 마음이 달라졌다.


처음엔 그냥 나 자신에게

“많이 힘들었지?”라고 말해주는 연습부터 시작했다.

정말 연습이었다.

습관처럼 나를 다그쳤던 마음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었으니까.


지하철에서 괜히 우울해질 때,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서도

혼자라는 느낌이 들 때,

그럴 때마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이 감정, 그냥 있어도 돼.”


이게 위로였구나.

누가 뭘 해주는 게 아니라,

내가 나에게 공간을 내어주는 것.


조금 지쳐 있으면 커피 하나 사서

벤치에 앉아 가만히 쉬어도 보고,

책 한 줄 넘기지도 않고 멍하니 앉아있는 시간도 허락해주고.

그걸 하면서,

조금씩 내가 나에게 친절해졌다.


누군가가 말해줬다.

“우리가 어릴 때 원했던 말들,

이제는 스스로 해줄 수 있으면 좋아요.”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지금은 알 것 같다.

아이처럼 울고 싶을 때,

아무 이유 없이 외롭고 허무한 날엔

내가 나에게 해주는 그 말들이

정말 힘이 된다는 걸.


“그렇게까지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 많이 애썼구나.”

“이만큼 왔으면 잘한 거야.”


이런 말들.

누군가 나에게 해줬다면 좋았겠지만,

지금은 내가 해줘도 충분하다는 걸

알게 됐다.


요즘의 나는

더는 내 감정을 숨기지 않으려 한다.

위로받고 싶다는 마음조차도

그대로 인정하는 것부터가

스스로에게 주는 큰 선물 같아서.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이제는 내가 나를 알아준다.




삶을 느리게 걸을 때 더 잘 보인다


한때는 매일이 달리기 같았다.

뒤처지면 안 된다는 조급함.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는 압박.

아침에 눈 뜨자마자 떠오르는 건 오늘의 할 일 목록이고,

밤에는 그걸 다 채우지 못한 자책감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문득,

그렇게 바쁘게 달려왔는데

정작 무엇을 보고 지나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가끔은 멈춰 서서

지금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무엇을 지나쳤는지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는데,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멈추면 안 돼. 지금은 달려야 할 때야.’

그게 내 마음속 구호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감기가 심하게 걸려서

일주일 정도 누워만 있었던 적이 있었다.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그냥 창밖만 멍하니 바라봤다.

하늘의 색이 시간에 따라 변하고,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고,

햇빛이 바닥을 천천히 옮겨 가는 게 보였다.


그때 처음 알았다.

느리게 산다는 건 단지 ‘늦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느끼며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걸.


걸음을 늦추면

마음이 따라온다.

놓치고 있던 감정,

무심코 지나쳤던 소중한 사람들,

내가 그토록 애쓰던 이유조차

천천히 떠오른다.


요즘은 하루에 한 번,

일부러 걸음을 느리게 해보려 한다.

퇴근길에 한 정거장 먼저 내려서 걷는다든가,

계단을 한 칸씩 꼭 밟아 올라간다든가.

말도 조금 덜 하고,

생각도 굳이 정리하지 않고 그냥 흘려보내 본다.


느리게 걷는 그 길 위에서,

나는 종종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나’와 마주친다.


“너 요즘 많이 힘들었지?”

“그만 좀 달려도 괜찮아.”

“여기까지 잘 왔잖아.”


그런 속삭임이 들리는 시간.

그게 바로 내 삶의 방향을

조금씩 다시 잡아가는 순간인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날은 이상하게

커피 한 잔도,

하늘의 구름도,

동네 나무 위에 걸린 노을도

다 조금 더 따뜻해 보인다.




나는 나의 보호자입니다



그날도 하루가 길게 느껴졌다.

사람들 틈에 서 있었지만,

마음속은 한없이 멀어져 있었다.


말 한마디를 꺼내기 전에

머릿속에서 수십 번 돌려보는 버릇.

혹시 누군가 상처받을까,

혹시 나를 오해할까 하는 불안.

그게 내 일상이었다.


어릴 적부터 배운 건

조심하는 법이었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건 위험하다는 걸,

남의 눈치를 먼저 살피는 게 안전하다는 걸,

몸으로 익혔다.


그래서 내 안에서 올라오는 분노나 슬픔은

늘 조용히 눌렀다.

“지금 이건 꺼내면 안 돼.”

그렇게 스스로를 단속하는 게

마치 나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 같았다.


그런데 상담실에서

처음으로 이런 말을 들었다.


“당신 안에도 늘 곁을 지키는 보호자가 있습니다.”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랐다.


나는 늘 혼자였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알게 됐다.

그 보호자는 다름 아닌,

상처받지 않도록 애써 나를 지켜온 ‘나’였다는 것을.


비록 그 방식이

감정을 억누르고,

마음을 닫아버리는 것이었을지라도

그건 나를 지키기 위해 배운 생존 방식이었다.


그걸 깨달으니

억눌렀던 감정에 조금 미안해졌다.

그리고 보호자를 향해

작게나마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동안 고마웠어.

하지만 이제는 다른 방법으로 나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아.”


그날 이후로

감정이 올라오면 예전처럼 무조건 막지 않는다.

대신 잠깐 멈춰서

그 감정이 나에게 무슨 말을 전하려는지 들어본다.


마치 오래전부터 내 옆에 있던 친구처럼,

그 보호자와 나란히 앉아

같이 세상을 바라본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안다.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늘 스스로를 평가하며 살아왔다.

“이 정도 성과는 내야지.”

“다른 사람들은 저만큼 하는데, 나는 왜 여기일까.”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 말하려면 뭔가 증명해야 하는 거 아닐까.”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다 보면, 내 존재는 언제나 시험대 위에 놓여 있다.

성적, 학교, 직장, 관계, 성과… 끝없는 조건들이 ‘괜찮은 사람’의 기준이 된다.


한 내담자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괜찮은 사람이 되려면 더 노력해야 할 것 같아요.

지금의 저는 여전히 부족해요.”


나는 잠시 멈추어 그에게 되물었다.

“그럼, 지금의 당신은 괜찮지 않다는 뜻인가요?”


그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보니, 늘 누군가의 기준으로만 저를 바라봤던 것 같아요.”


사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성취를 했을 때만 비로소 자신을 괜찮다고 느끼고,

무언가 실패하거나 부족할 때는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긴다.

그러다 보니 존재 자체로 괜찮다는 말이 낯설고, 심지어는 억지 위로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진실은 간단하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괜찮은 존재였다.

갓난아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랑스럽듯,

사람의 가치는 성과나 조건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무조건적 자기 수용이라 한다.

나의 결핍과 부족함까지 포함해서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나는 완벽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가치 없는 존재도 아니다.”

이 단순한 인식이, 스스로를 무너뜨리던 자기 검열의 고리를 끊어낸다.


이 수용이 가능해지면, 삶의 태도도 달라진다.

실패해도 금세 회복할 수 있고,

남과 비교하는 대신 내 걸음을 천천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더 이상 적대하지 않고,

따뜻한 동반자가 되어준다.


나 역시 이런 말을 스스로에게 해본다.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다.

성공을 해서가 아니라, 남보다 나아 보여서가 아니라,

그냥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


이 말은 거창하지 않다.

오히려 지친 마음을 붙잡아 주는 가장 단순한 숨결 같다.

그리고 그 단순한 인정 속에서

삶은 조금 더 부드럽고 단단하게 이어진다.




나로서 살아가는 연습


살다 보면 우리는 종종 ‘나’로 사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기대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곤 한다.

회사에서는 성실한 직원으로, 집에서는 책임감 있는 가족으로, 친구들 사이에서는 늘 힘이 되어주는 사람으로.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속에서는 자꾸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 걸까?”


이 질문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멈칫한다.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누군가의 기준’에 맞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라는 사람을 다시 찾으려면, 작은 연습이 필요하다.

바로 ‘나로서 살아가는 연습’이다.


처음엔 쉽지 않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늘 하던 습관대로 타인의 시선을 먼저 떠올린다.

오늘은 어떻게 보여야 할까,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러다 문득, 잠깐이라도 멈춰서 마음속에 묻는 것이다.


“나는 지금 어떤 기분이지?”

“오늘 하루를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을까?”


이렇게 자기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연습을 하다 보면,

낯설지만 따뜻한 발견을 하게 된다.

내가 억눌렀던 감정들, 감히 꺼내지 못했던 욕구들이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민다.


상담 현장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도 처음에는 이런 연습을 두려워한다.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이면 어쩌죠?”

“나만 편하자고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는 건 아닐까요?”

그런 말을 할 때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나답게 산다는 건 다른 사람을 외면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오히려 자기 마음을 정직하게 돌볼 때, 타인도 진심으로 존중할 수 있게 되죠.”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자기 정체성의 회복 과정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감정, 욕구, 한계를 인정하는 순간부터 비로소 진짜 관계가 가능해진다.

억지로 맞추며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나로서’ 존재하는 삶.

그것이 오래도록 건강하게 살아가는 힘이 된다.


나로서 살아가는 연습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

마치 근육을 단련하듯, 작은 순간들을 쌓아야 한다.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하고 싶은 걸 시도해보는 선택,

그리고 실패했을 때조차 스스로를 탓하지 않고 다독이는 태도.


그렇게 천천히 쌓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고백을 하게 된다.

“이제야 진짜 나로서 숨 쉬는 것 같아요.”




이제는 나를 미루지 않겠다



살다 보면 늘 다른 사람을 먼저 챙기느라

정작 나 자신은 늘 뒷순위로 밀려날 때가 많다.


“오늘도 나중에 해야지.”

“이건 급하니까 먼저 처리하고, 내 일은 그다음에…”


이런 식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언제부턴가 나의 자리는 늘 마지막이 된다.


상담실에서 만난 한 내담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늘 다른 사람 눈치를 보느라, 하고 싶은 걸 뒤로 미뤘어요.

그러다 보니 정작 제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더라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그건 어쩌면, 자신을 존중하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자신의 필요를 뒤로 미루는 습관은 오래되면, 결국 ‘나는 중요하지 않다’라는 믿음으로 굳어져 버리거든요.”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조용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맞아요. 사실은 저도 이제는 저를 미루고 싶지 않아요.”


나 자신을 미룬다는 건

작은 일에서부터 드러난다.

피곤해도 억지로 약속을 지키러 가는 것,

분명히 쉬어야 할 시간에 일을 붙잡고 있는 것,

하고 싶었던 일을 늘 “다음에”라고 미루는 것.


이런 선택들이 쌓이면, 결국 나라는 사람은

내 삶에서 늘 두 번째, 세 번째 자리로 밀려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를 미루지 않는다는 건

결국 나를 존중하는 일이다.

내 감정을 인정하고, 내 욕구를 돌보는 일이기도 하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과정을 ‘자기 돌봄(Self-care)’이라고 부른다.

이는 단순히 좋은 음식을 먹고, 여행을 다니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가장 본질적으로는, “나는 소중한 사람이다”라는 인식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작은 선택에서부터

“오늘은 내가 쉬어도 괜찮아.”

“이건 내가 원하는 거니까 해볼 거야.”

“다른 사람보다 나를 먼저 챙겨도 된다.”

이런 말을 스스로에게 해주는 게 바로 자기 돌봄이다.


나를 미루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건

결코 이기적인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단단해져야만,

내 옆의 사람들에게도 더 건강한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다.


오늘 하루, 우리는 수많은 일정을 소화하지만

그중 단 한 순간이라도 나를 우선순위에 두어 보자.

따뜻한 차 한 잔을 천천히 마시는 시간이 될 수도 있고,

하고 싶었던 책 한 권을 읽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그 작은 순간들이 쌓여

“나는 중요한 사람이다”라는 믿음으로 자라날 때,

비로소 삶은 다시 균형을 찾아간다.


이제는 나를 미루지 않겠다.

나 자신을 존중하는 이 다짐이,

내일의 나를 더 단단하게 지켜줄 것이다.




작은 기쁨이 삶을 지키는 힘이 된다는 걸 알았다


살다 보면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는 날들이 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피로, 쉽게 사라지지 않는 걱정,

그리고 설명하기 힘든 허무함이 몰려올 때.


그럴 때 문득, 아주 작은 순간이 나를 지켜준다.

따뜻한 햇살이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아침,

익숙한 길에서 갑자기 들려온 새소리,

혹은 친구가 건넨 “괜찮아, 네 잘못 아니야”라는 짧은 말.


예전의 나는 이런 순간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게 뭐 대단하다고.”

“이런 걸로 달라질 게 있나.”

그렇게 흘려보내곤 했다.


하지만 상담실에서 만난 내담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작은 기쁨이 삶을 버티게 하는 거대한 힘이 된다는 걸 배웠다.


한 내담자는 이렇게 고백했다.

“하루 종일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퇴근길에 아이가 달려와 안아주는데… 그 순간 숨을 쉴 수 있었어요.”


또 다른 이는 말했다.

“커피를 마시는데 향이 너무 좋아서… 그 순간만큼은 살고 싶었어요.”


그들의 말 속에서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삶을 지켜내는 건 위대한 성취나 드라마 같은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순간들이

우리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것을.


기쁨은 단순히 즐거움이 아니다.

그건 삶을 지탱하는 힘이고,

끝없이 흔들리는 마음을 잠시라도 붙잡아 주는 닻이다.


이제는 기쁨을 흘려보내지 않으려 한다.

아침 공기의 선선함을 느끼고,

낯선 이의 미소에 마음을 담고,

짧은 대화 속에서 따뜻함을 기억한다.


그렇게 작은 기쁨을 곱씹다 보면,

삶이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이어지는 것을 알게 된다.




감정을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살다 보면 마음속에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점점 쌓여간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분위기를 망칠까 봐 참은 적.

속이 타들어 가는데, 괜히 예민해 보일까 봐 웃어넘긴 적.

그런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마음속에 돌덩이처럼 남는다.


“그때 그냥 말했어야 했는데…”

뒤늦게 떠오르는 생각은 늘 아쉽다.

말하지 못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이 숨어, 나를 괴롭힌다.


감정을 말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어릴 적부터 ‘울면 안 된다’, ‘화를 내면 안 된다’, ‘착해야 한다’는 말들을 들으며 자란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말하는 순간, 누군가 나를 오해하거나, 나를 거절할까 두려운 거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을 억누르고, 괜찮은 척하며 버틴다.


하지만 상담실에서 만난 많은 내담자들이 말하듯,

감정을 말하지 못할 때 진짜 괴로움은 커진다.

속으로 삭히면 괜찮아질 것 같지만, 오히려 그 감정은 형태를 바꿔 다시 나타난다.

몸의 긴장으로, 이유 모를 두통으로, 혹은 관계의 거리감으로.


감정을 말할 줄 안다는 건 단순히 솔직해지는 게 아니다.

그건 나를 지켜내는 방법이다.

“나는 지금 서운해.”

“이건 좀 힘들었어.”

“내가 바라는 건 이런 거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관계 속에서 나 자신을 잃지 않는다.


처음부터 잘할 필요는 없다.

말이 매끄럽지 않아도 된다.

때론 어색하고, 상대가 바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 순간, 내 마음을 무시하지 않고 꺼내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정서 표현’이라고 부른다.

표현된 감정은 관계 속에서 다뤄지고, 해석되고, 때로는 공감받으며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

바로 그때 치유가 시작된다.


어쩌면 “감정을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은,

곧 “내 마음을 존중하며 살고 싶다”는 바람일지도 모른다.

그 바람이 한 번의 용기와 함께 작은 변화로 이어질 때,

삶은 조금씩, 하지만 분명히 달라진다.




지금 내 마음은 어떤 색일까



가만히 앉아 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금 내 마음은 어떤 색일까?”


어릴 적 미술 시간에 크레파스를 꺼내 들던 기억이 난다.

무슨 색으로 칠해야 할지 몰라서, 손에 잡히는 대로 색을 섞어 바르던 순간들.

그때는 그냥 그림일 뿐이었는데, 지금은 마음도 그렇다.

그날의 기분, 그날의 생각들이 내 안에서 색이 되어 칠해지는 것 같다.


어제는 회색에 가까웠다.

무겁고, 뿌옇고, 조금은 답답한 기운이 돌았다.

마음이 어두워지니 세상도 같이 탁해 보였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더 크게 흔들리고, 작은 일에도 예민해졌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다르다.

아침에 창문을 열었을 때 들어온 햇살이 내 마음에 노란색을 칠해놓은 것 같았다.

큰 변화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냥 그 빛 하나로 마음이 조금 따뜻해졌다.

누군가의 안부 문자 한 줄, 따뜻한 차 한 잔이 은근히 색을 덧입히는 걸 보면 참 신기하다.


마음의 색은 늘 고정되지 않는다.

어제는 회색이라도, 오늘은 연한 초록일 수 있고, 내일은 파란 하늘빛일 수도 있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건, 내 마음의 팔레트에 어떤 색이 올라오는지 지켜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어떤 색이든 그걸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이다.

검은색이라고 해서 나쁜 것도 아니고, 밝은 노랑만이 좋은 것도 아니다.

검은색은 나를 쉬게 하고, 노랑은 나를 움직이게 하고, 초록은 나를 숨 쉬게 한다.

그 모든 색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나를 만든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정서 인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내 감정을 색깔처럼 인식하는 순간, 나는 내 마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그것이 곧 회복의 시작이 된다.


오늘 내 마음은 무슨 색일까.

이렇게 묻고 답하는 작은 연습이,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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