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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목소리에 응답하다

“이 글은 상담심리학자로서 수많은 내담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동행하며,

그들의 감정 여정을 상징적으로 재구성한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마음이 허락하는 순간, 치유는 시작된다

처음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괜찮아,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어.”

마치 주문처럼 스스로에게 되뇌며 버텼다.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몸은 솔직했다.

밤마다 깊은 잠에 빠지지 못하고 뒤척였고,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이유 모를 분노와 서운함이 올라왔다.

마음은 이미 신호를 보내고 있었는데, 나는 끝내 그 소리를 외면했다.


어느 날, 가까운 사람이 말했다.

“넌 왜 그렇게까지 참으려고 해?”

순간 억울함과 동시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참는 게 미덕이라고, 그래야 인정받는다고 믿어왔는데

그 말은 나의 무너진 틈을 정확히 짚어냈다.


그제야 마음속에서 작은 속삭임이 들렸다.

“나, 이제 힘들다고 말하고 싶어.”

처음엔 그 소리가 낯설었다.

하지만 점점 더 크게, 분명하게 다가왔다.

그것이 바로 마음이 허락하는 순간이었다.


억압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것.

많은 내담자들이 이 단계에 도달하기까지 긴 시간을 걸어간다.

스스로를 설득해야 하고, 때로는 주위의 인정이 있어야 한다.


실제로 상담 현장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선생님, 이제야 제 감정이 맞다고 느껴져요.”

이 말은 단순한 깨달음이 아니다.

자신을 믿지 못하고 늘 외면했던 마음이

처음으로 ‘괜찮다’는 허락을 얻는 순간이다.

그때 비로소 사람은 회복의 길을 내딛는다.


울음을 터뜨릴 수도 있고,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표출될 수도 있다.

겉으로 보기엔 혼란스러운 과정 같지만,

실은 치유의 신호다.

억눌린 감정이 흘러나와야만

그 자리에 새로운 힘이 채워질 수 있다.


마음이 허락하지 않으면 치유는 시작되지 않는다.

하지만 단 한 번의 허락이 있으면,

그 순간부터 사람은 조금씩 달라진다.

눈빛이 바뀌고, 숨이 가벼워지고,

자신의 삶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여유가 생긴다.


그리고 나는 이제 알게 되었다.

치유는 거창한 의식이나 특별한 사건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내 마음이 나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는 순간,

“그래, 이제 괜찮아. 너도 좀 쉬어도 돼.”

그 속삭임이 들릴 때,

그때부터 이미 회복은 시작된 것이다.



외면했던 감정이 나를 다시 찾았다


그는 늘 “괜찮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회사에서 무리한 요구를 받아도, 친구에게 서운한 일이 생겨도, 가정에서 억울한 순간을 겪어도,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야, 나 괜찮아.”


하지만 속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밤마다 불쑥 치밀어 오르는 생각들,

쓸데없는 장면이 자꾸 떠올라 잠을 깨우는 날들.

분명히 하루는 끝났는데 마음은 끝내지 못한 채 계속 달리고 있었다.


억눌린 감정은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그는 애써 외면했지만, 감정은 다른 모습으로 돌아왔다.

작은 소음에도 예민해지고, 누군가의 무심한 한마디가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손끝이 차가워지는 순간, 그는 깨달았다.

“아, 내가 괜찮지 않았구나.”


심리학적으로 보면, 감정은 억압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회로’를 통해 나타난다.

불안은 몸의 긴장으로, 분노는 무기력이나 피로로, 슬픔은 이유 모를 눈물로 모습을 바꾼다.

그가 자꾸 피곤하고 무기력하다고 느낀 것도 사실은 감정이 다른 옷을 입고 자신을 찾아온 것이었다.


상담실에서 그는 처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화가 나는데, 화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냥 웃었어요. 그런데 집에 와서 괜히 울컥하고, 이유도 모르겠는데 너무 힘들어요.”


그 말은 그가 감정을 직면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억눌렀던 감정이 다시 표면으로 떠오르자, 그는 당황했지만 동시에 안도했다.

“적어도 내 마음이 아직 살아있구나.”

이 깨달음은 회복의 첫 단추였다.


누구나 살면서 감정을 외면한다.

‘이 정도는 참아야지’, ‘별일 아닌데 예민한가 봐’, ‘남들도 다 이러고 사는데’ 라는 생각으로 덮어버린다.

그러나 외면한 감정은 다시 찾아온다.

때로는 몸의 신호로, 때로는 인간관계의 갈등으로, 때로는 갑작스러운 눈물로.

그것은 불청객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지켜내려는 내면의 목소리다.


그는 이제 조금씩 감정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고 있다.

화가 나면 작은 소리라도 내뱉고, 서운하면 글로 적어본다.

때로는 눈물이 흘러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 과정에서 그는 알게 되었다.

외면했던 감정이 나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조용히 안아준 시간의 힘

그는 오랫동안 마음을 혼자 붙들고 버텨왔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거라 믿었지만, 정작 누구도 그의 마음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았다.

겉으로는 잘 지내는 척,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지만 속은 늘 허전했다.


어느 날, 힘겹게 흘려보낸 이야기를 들은 누군가가 그를 조용히 안아주었다.

“괜찮다”는 말도 없었고, “힘내라”는 말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안아주었을 뿐인데,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쉽게 울 수는 없었다.

늘 강해야 한다는 압박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 말 없이 이어진 그 따뜻한 안아줌이 방파제처럼 작용했다.

억눌러 두었던 감정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흘러나왔다.


사람은 종종 말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에서 힘을 얻는다.

조용히 곁을 지켜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랫동안 갇혀 있던 감정은 조금씩 틈을 찾아 나온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비언어적 지지라고 설명한다.

눈빛, 고개를 끄덕이는 작은 반응, 그리고 따뜻한 포옹 같은 행위는

말보다 더 강력하게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내담자들이 상담 속에서 종종 경험하는 것도 바로 이런 순간이다.

누군가의 곁에서 비로소 안전하다고 느끼는 경험.


그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치유는 거창한 말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 말 없는 시간,

조용한 동행 속에서 시작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날 이후 그는 조금 달라졌다.

혼자 버티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던 생각이 서서히 흔들렸다.

누군가의 안아줌이 자신을 살려낸 것처럼,

이제는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까지 품게 되었다.


조용히 안아주는 시간의 힘.

그것은 단순히 위로가 아니라,

삶을 다시 붙잡게 하는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말하지 못한 마음이 나를 아프게 했다

그녀는 늘 말을 아꼈다.

불편한 마음이 올라와도, 누군가에게 서운함이 생겨도,

그냥 속으로 삼키곤 했다.


“괜히 꺼내면 상대방이 힘들어하지 않을까.”

“내가 잘못 느낀 걸 수도 있잖아.”

“말해봤자 달라질 것도 없는데.”

“말해서 상대방이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들이 입술을 막았다.

그렇게 말하지 못한 마음은 매번 가슴속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침묵은 오히려 그녀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

겉으론 늘 밝아 보였지만, 혼자 있을 땐 작은 일에도 쉽게 무너졌다.

누군가의 무심한 눈빛, 사소한 한마디가 오래도록 마음을 파고들었다.


말하지 못한 감정은 단순히 사라지지 않는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표현되지 못한 감정은 ‘억압된 정서’로 남아

비슷한 상황에서 다시 되살아나곤 한다.

그녀가 괜히 작은 일에도 불안해지고 화가 났던 건,

사실 과거에 말하지 못한 순간들이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담 장면에서,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는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땐 아무 말도 못했어요.”

그 말이 나온 순간, 눈물이 터져 나왔다.

마치 오래된 상처에 숨겨진 고름이 빠져나오는 듯한 울음이었다.


그때 알게 되었다.

말하지 못한 마음이 나를 아프게 했구나.

그 아픔은 누군가에게 인정받을 때, 비로소 이름을 얻었다.

“아, 그때 나는 충분히 상처받을 만했구나.”

이 자각은 회복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종종 “말 안 해도 다 알겠지”라거나,

“차라리 내가 참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침묵을 택한다.

그러나 말하지 못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마치 작은 조각처럼 남아 계속해서 우리를 찌른다.


그렇기에 표현하지 못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단순한 말하기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스스로의 고통을 인정하는 행위이자,

다시 나 자신과 연결되는 과정이 된다.


그녀는 이제 조금씩 연습하고 있다.

아주 짧게라도, 아주 서툴게라도,

자신의 마음을 말해보는 것.

그 순간마다 몸은 여전히 긴장하지만,

마음은 예전보다 덜 무겁다.


말하지 못한 마음이 나를 아프게 했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다.

그 마음을 말하는 순간,

내 안의 고통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그는 늘 주변 사람들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다.

“이 정도는 참아야지.”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뭐.”

“너만 힘든 거 아니잖아.”


이런 말들이 쌓일수록,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조용한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밤늦게 혼자 있을 때, 출근길 버스 창가에 앉아 있을 때,

아주 낮은 울림으로 그를 불러냈다.


“나, 지금 힘들어.”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아.”

“누구한테라도 말하고 싶어.”


그는 그 속삭임을 애써 무시했다.

들어주면 더 약해질 것 같았고,

꺼내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무시할수록 몸은 더 무거워지고,

감정은 알 수 없는 불안으로 바뀌어 일상 곳곳에 스며들었다.


상담 장면에서, 그는 처음으로 이런 고백을 했다.

“사실, 제 안에서 계속 뭔가 말하는 소리가 있어요.

근데 그게 뭐라고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 말에 상담자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그 목소리를 무시하지 말고, 그냥 들어주세요.

좋다, 나쁘다 판단하지 말고, 그냥 어떤 말을 하는지 들어주는 겁니다.”


그 순간 그는 조금 당황했다.

“그게… 그냥 생각 아닌가요?”

“생각일 수도 있고, 마음의 언어일 수도 있어요. 중요한 건 그걸 존중하는 겁니다.”


며칠 뒤, 그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그냥 들려오는 말을 적어내려갔다.

“나는 서운했어.”

“너무 힘들었어.”

“이제는 좀 쉬고 싶어.”


글자로 옮겨진 마음은 낯설면서도 선명했다.

그제야 그는 알았다.

자신이 무시했던 것은 단순한 ‘잡생각’이 아니라,

오랫동안 돌봄 받지 못했던 자기 자신의 목소리였다는 것을.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기 인식의 과정’이라 부른다.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순간,

우리는 외부의 평가나 기준이 아니라

진짜 나의 욕구와 감정을 만나게 된다.

그 만남이 때로는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거기서부터 치유가 시작된다.


그는 이제 종종 혼잣말을 한다.

“그래, 지금 너 많이 힘들었지.”

“오늘은 그냥 이 정도만 해도 돼.”

예전 같으면 유약하다고 다그쳤을 말이,

지금은 스스로를 지켜주는 다정한 위로가 되었다.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삶은 바깥의 기준이 아니라

내가 나를 살아내는 길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내 감정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회복은 시작된다

그녀는 늘 바쁘게 움직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손과 발은 쉬지 않았다.

사람들의 부탁에 “네”라는 대답이 먼저 나왔고,

그 속에서 자기 마음은 점점 뒤로 밀려났다.


언제부턴가 웃는 얼굴 뒤에,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거움이 자리 잡았다.


어느 날, 우연히 카페 한쪽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지금 괜찮은 걸까?”


순간 가슴이 묘하게 쿵 내려앉았다.

괜찮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그녀가 상담실을 찾은 건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다.

상담자 앞에 앉은 그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눈물이 먼저 떨어졌다.

말을 꺼내기 전부터, 마음은 이미 쏟아지고 있었다.


상담자는 조용히 말했다.

“지금 느끼는 그 마음, 억누르지 마세요.

그게 바로 시작이에요.”


그녀는 처음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감정을 그냥 인정한다고 해서

무슨 변화가 있겠느냐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됐다.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순간,

그동안 쌓아 올린 억지웃음이

조금씩 무너지고,

대신 숨이 트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사람은 힘든 마음을 애써 무시하려 할수록

그 무게가 더 커진다.

그러나 “그래, 내가 지금 이런 마음이구나” 하고

조용히 받아들이면,

그 무게는 조금씩 줄어든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모든 순간을 밝게 덮으려 하지 않는다.


슬프면 “슬프다”라고,

두려우면 “두렵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 간단한 인정이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다시 일어설 힘을 준다.


회복은 거창하게 시작되지 않는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라는

목소리가 울릴 때,

그 순간이 바로 첫걸음이다.



울지 못했던 나에게 이제 울어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오랫동안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슬퍼도, 억울해도, 가슴이 미어져도

눈물은 늘 목구멍에서만 맴돌다

다시 깊숙이 삼켜졌다.

강해 보여야 한다고,

흔들리면 안 된다고,

누군가에게 폐가 되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러다 어느 날,

누군가가 조용히 내 옆에 앉아 말했다.

“이제 울어도 돼요.”

그 말은 마치 얼어붙은 강 위에

따뜻한 봄빛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처음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라는 말이 입에 먼저 붙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사람이 아무 말 없이

그저 내 곁을 지켜주자,

억눌렀던 감정이 한 줄기 숨처럼 새어 나왔다.


그날, 나는 오래 참아온 울음을 터뜨렸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를 때

그동안 붙들고 있던 모든 힘이 풀려나갔다.

이상하게도, 울고 나니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한구석이 가벼워졌다.


사람은 누구나 울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눈물은 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오래 닫아 두었던 마음을 열어주는 문과 같다.

울지 못했던 시간 동안

나는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이제 나는 안다.

누군가가 “울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순간,

그건 허락이 아니라,

내 마음이 회복으로 향하는 첫 걸음이라는 것을.



울음 이후 찾아오는 변화

사람은 누구나 울지 않으려 애쓰는 순간이 있다.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아도,

차마 울어버리면 더 약해질 것 같아서

꾹꾹 눌러 담는 시간들.


하지만 눈물은

그저 감정의 무게를 흘려보내는 일이 아니라,

오래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살짝 열어주는 행위다.

한 번 울고 나면

숨이 가빠졌던 가슴이 조금은 느슨해지고,

목에 걸려 있던 말들이 비로소 밖으로 나올 수 있다

.

울음은

마치 비가 온 뒤 땅에 스며드는 물처럼,

내면 깊은 곳까지 적셔준다.

그 과정에서 묵혀 있던 감정의 먼지가 씻겨 나가고,

자신도 몰랐던 상처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상처를 처음엔 두려워하지만,

바로 그 순간부터 치유가 시작된다.


울고 나면

세상이 조금 달라 보인다.

빛이 예전보다 부드럽게 느껴지고,

사람의 목소리와 온기가 더 가깝게 다가온다.

견고하게 닫아 두었던 마음의 벽이

조금은 투명해져,

바람이 스며들 수 있는 틈이 생긴다.


물론 울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단번에 바뀌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울음은 변화의 첫 걸음이다.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던 그 순간이

사실은 새롭게 서기 위한 준비였음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


그래서 이제는,

울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약함이 아니라,

다시 살아가려는 용기의 증거이니까.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던 마음이 이해되었을 때

그녀는 늘 ‘괜찮다’는 말을 먼저 꺼내는 사람이었다.

마음속에 거센 파도가 일어도,

겉으로는 잔잔한 호수를 연기했다.

누군가 걱정할까 봐,

혹은 ‘예민하다’는 말을 들을까 봐,

감정을 꾹 눌러 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런데 그 습관은

언젠가부터 무거운 갑옷이 되어

그녀를 숨 막히게 하고 있었다.

마음속엔 여전히 서운함, 억울함, 슬픔이

뒤엉켜 있었지만

그 감정을 꺼내놓을 자리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담 장면에서 그녀는 조심스레 과거를 이야기했다.

아무도 관심 없었던,

그녀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순간들.

말을 하면서도

‘이건 별일 아닌데…’라며 스스로 축소했다.

하지만 상담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때 정말 많이 힘드셨겠어요.”


그 한마디에

그녀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었다.

마치 오랫동안 참았던 숨을 내쉬듯,

어깨에 힘이 풀렸다.

그 순간,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것은 단순한 공감이 아니었다.

자신의 감정이 ‘맞다’는 확인,

자신의 경험이 ‘존중받는다’는 확신이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정서적 인정(emotional validation)이라고 부른다.

이는 단순한 위로를 넘어,

사람이 자기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치유의 문을 열게 만드는 강력한 심리적 자원이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사람은 자기 마음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이건 그냥 넘겨야 하는 일인가?’

그렇게 자기 감정을 폄하하는 습관이 생긴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 감정을 그대로 인정해 주는 순간

그동안 굳게 잠겨 있던 문이 열린다.

그 문을 통해

서운함, 분노, 슬픔 같은 감정이

조심스럽게 바깥으로 나온다.

그리고 비로소,

그 감정의 무게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진다.


그녀는 상담을 마치며 말했다.

“처음이에요.

내 이야기가 이렇게 ‘그럴 수 있는 일’로 들어진 건.”


그날 이후,

그녀는 감정을 숨기기보다

조금씩 드러내는 연습을 했다.

그 과정이 완벽하진 않았지만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이

그녀를 지탱해 주었다.



다정한 말 한마디가 나를 다시 살아나게 했다

그녀는 한동안 사람들의 말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힘내”라는 말도,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도

마음속에서는 공허하게 울렸다.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지만,

속으로는 ‘그게 그렇게 쉬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로의 말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다.

중간에 끼어들지도, 가르치려 들지도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때로는 짧게 “그랬구나” 하고 받아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제 알겠어.”


그 순간,

그녀는 가슴 한켠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말이 신기하게도

그동안 쌓였던 응어리를 조금씩 풀어냈다.

누군가가 내 마음을 ‘이해하려 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숨을 쉴 수 있게 된 것이다.


심리상담 현장에서도 이런 장면은 자주 일어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가

가볍게 취급되거나, 쉽게 판단되는 경험을 한다.

그럴수록 마음속의 문은 더 단단히 잠긴다.

하지만 그 문은

누군가의 다정한 한마디,

그리고 진심 어린 태도 앞에서 서서히 열린다.


그녀는 그날 이후,

자신이 받은 그 한마디를 오래 품었다.

다시 힘들 때면

그 말이 마음속에서 작은 등불처럼 켜졌다.

완벽하게 상황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그 말 덕분에,

그녀는 하루를 버틸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그것은 화려한 문장도,

거창한 위로도 아니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주는 말.

그 말 한마디가

그녀를 다시 살아나게 했다.



고요해지는 날, 삶은 다시 시작된다

그녀는 한동안 마음이 소란스러웠다.

작은 일에도 쉽게 예민해지고,

사람들의 말과 표정 하나하나가

날카롭게 가슴에 박혔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를 어떻게 버틸까부터 계산하게 되었고,

밤이 되면

그날의 대화를 몇 번이고 되짚으며

스스로를 괴롭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소리가 멀어지는 날이 찾아왔다.

누군가와 다투지도 않았고,

특별히 좋은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조용해진 것이었다.


창문을 열어놓고 앉아 있으니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

간간이 스치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마치 처음 듣는 음악처럼 느껴졌다.

그 소리 속에

복잡했던 생각들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심리상담에서는 이런 상태를

‘정서적 안정의 회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감정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시기가 지나

마음이 숨을 고르고,

다시 세상을 바라볼 여유가 생기는 순간이다.


그녀는 그 고요 속에서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쉼 없이 달려왔는지 깨달았다.

누구를 위해서든,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든

늘 긴장하고 대비하느라

정작 자기 자신을 위한 시간은 없었다는 걸.


고요함은 단순히 소리가 사라진 상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더 이상 자신을 몰아세우지 않겠다는

조용한 선언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알게 되었다.

삶이 다시 시작되는 순간은

큰 사건이나 드라마틱한 변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조용히,

마음이 다시 숨 쉬기 시작할 때 찾아온다는 것을.


그 고요 속에서,

그녀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머릿속에 무겁게 내려앉는 생각이 있었다.

오늘도 해야 할 일이 많다는 부담감.

그리고 어제 누군가의 말이 남긴 찜찜한 기분.

예전 같으면 이런 감정들을 그냥 밀어냈을 것이다.

“일단 움직여야지, 생각하지 말자.”

그렇게 스스로를 다그치고,

기분이 나쁜 이유를 분석하기보다는

그냥 ‘기분 탓이겠지’ 하고 덮어버렸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방식을 멈추기로 했다.

감정을 억누르기보다, 그냥 ‘바라보기’를 시작했다.

마치 창문 앞에 앉아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듯,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다.

아침의 불안은 어디서 왔는지,

어제의 찜찜함은 왜 아직 남아 있는지.

그걸 해결하려 애쓰지 않고,

그냥 느끼고 관찰했다.

“아, 이게 불안이구나.”

“아직 서운함이 있네.”

이렇게 이름을 붙여주는 것만으로도

감정은 조금씩 힘을 잃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판단 없는 자기 관찰’이라고 한다.

명상이나 마음챙김에서도 강조하는 원리다.

감정을 통제하려고 애쓰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이 과정은 생각보다 단순하지만,

해본 사람만 안다.

그 단순함 속에 얼마나 깊은 변화가 숨어 있는지를.

관찰을 시작하면

감정은 이전보다 훨씬 빨리 지나간다.

불안이 오래 머물 것 같아도,

그 불안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 사라지는 순간이 온다.

마치 아이가 울다 지쳐 스스로 잠드는 것처럼.

물론 여전히 어떤 날은 쉽지 않다.

감정을 바라보는 대신,

그 안에 휩쓸려 들어가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예전과 다른 점은,

이제는 내가 돌아올 수 있다는 걸 안다는 것이다.

관찰로 돌아오는 길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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