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나는 늘 조용한 아이였다.
조용히 눈치를 보고, 조용히 말을 줄이고, 조용히 상처를 삼켰다.
집 안에선 작은 물소리조차 긴장감을 만들었고, 누군가의 한숨이나 문 닫는 소리 하나에도 내 심장은 토끼처럼 쿵쾅였다.
문제가 생기면, 누가 화를 내면, 언제나 내 마음속에 먼저 떠오른 말은
"내가 뭔가 잘못했나 보다."
이 문장은 마치 오래된 주문 같았다. 그 말만 되뇌면 세상이 잠시 조용해질 것 같았다.
나를 지키는 말이면서, 동시에 나를 무너뜨리는 말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선생님이 내 숙제를 분실한 날도 그랬다.
내가 안 냈던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고, "죄송해요. 제가 다시 해올게요."
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나중에 선생님이 본인 실수였다고 말했지만, 그 순간에도 내 안엔 어떤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래도 네가 뭔가 부족했을 거야."
이 목소리는 자라서도 계속 함께였다.
연인과 다툰 어느 날, 나는 이유도 모른 채 먼저 사과했다.
"내가 예민했나 봐. 미안해."
그 사람은 내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안에는 이해도, 따뜻함도 없었다.
내 안에 어린 내가 작게 속삭였다. "넌 늘 미안해야 해."
이런 말들을 너무 오래 믿고 살아왔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게.
그런데 상담을 받으며,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은 내가 만든 게 아니라, 내가 배운 말이었구나."
누군가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네 탓이야"라고 말했기에,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믿는 법을 익힌 것이다.
어릴 적, 부모의 말투나 표정, 말하지 않아도 감지되던 기류들 속에서 나는 해석하는 법을 배웠다.
해석은 생존의 기술이었다.
그래서 '내 잘못이야'는 해석이자 방패였다.
하지만 이제 그 방패는 너무 무겁다. 나를 더 이상 지켜주지 못하는 방패. 오히려 내 가슴을 눌러 숨이 막히게 하는 방패.
그 방패를 내려놓는 연습을 나는 지금도 하고 있다.
조심스럽게 자기 탓을 멈추는 순간, 그 안에 숨겨졌던 이야기들이 피어난다.
누군가 말해주지 않았던,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지 않았던 순간들이 말이 된다.
그리고 그 말들이 숨이 된다.
말을 배워야 숨을 쉴 수 있다는 걸, 나는 상담실에서 배웠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일찍 눈이 떠졌지만, 이불 속에서 한참을 나오지 못했다.
몸이 무겁다기보다, 마음이 망설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루를 또 어떻게 견딜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피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커피를 내리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누군가의 반가운 연락은 없었고, 몇몇 광고 문자만 화면을 채웠다.
창밖으로 햇살이 스며들었다. 그렇게 따뜻한 햇살이었는데도, 마음은 이상하게 싸늘했다.
그 순간, 내담자였던 한 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분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냥 피하고 싶었어요. 그 상황도, 사람도, 그리고 저 자신도요."
그는 늘 밝고 명랑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관계 안에서 늘 눈치를 보고, 갈등을 피하며 살고 있었다.
어린 시절, 화를 내거나 속상해하는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던 환경 속에서 자란 그는, 언제부턴가 마음을 숨기고 피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지켜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회피형이라 불렀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단순히 '회피'가 아니라, 버티기였구나.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기에, 멀어지는 방식으로 살아낸 시간이었구나.
그것이 어쩌면 그가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말을 듣고 난 후, 나는 내 안에서도 비슷한 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때로는 일부러 다른 생각으로 덮어버림으로써, 감정을 느끼지 않는 척, 괜찮은 척 살아왔던 날들이 있었다.
나 역시도, 그것이 생존 방식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감정은 피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말해지지 않은 마음은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 자리를 잡고, 어느 날 갑자기 울컥하는 감정의 파도로 되살아나기도 한다.
무언가가 나를 건드리기라도 하면, 그 감정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터져나온다.
그분은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조금씩 말해보고 싶어요. 제가 뭘 느끼고 있는지, 저도 알고 싶고요."
그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피는 피하고 싶은 마음만이 아니었다.
그건 나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선택이, 더 이상 나를 숨기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살아남기 위해 배웠던 회피가, 이제는 살아가기 위한 '말걸기'로 바뀔 수 있다면.
그게 회복의 시작이 아닐까.
밤늦게 퇴근하고,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가방을 내려놓을 때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지?"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그 말은 너무 낯설지 않았다.
습관처럼 삼켜온 감정들이 있었다.
화가 나도, 서운해도, 억울해도, 늘 먼저 참는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스스로를 달래는 말이었지만, 사실은 아무도 나의 마음을 물어주지 않는 현실에 익숙해지고 싶었던지도 모른다.
감정이라는 건 나에게 사치였고, 어릴 적부터 익숙한 건 '느끼지 않기'였다.
누구에게 슬프다고 말하면, 괜히 더 민망해졌던 기억도 있다.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래?"라는 반응은 내 감정이 틀린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그 이후로, 말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한 내담자가 조용히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 슬퍼도 괜찮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 말을 듣는데, 어쩌면 나도 같은 말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은 타인의 반응을 통해 길들여진다.
감정을 꺼냈을 때 누군가가 무시하거나 불편해하면, 그 감정은 마음 깊숙이 숨어버린다.
하지만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말해지지 못한 감정들은 몸 어딘가에 남아 뭉치고, 결국엔 무거운 피로감이나 알 수 없는 울컥함으로 되살아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슬퍼도 괜찮아"라는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감정을 존재하게 해주는 선언 같은 것이다.
그 말을 처음 들은 날, 울어버린 사람도 있다.
그동안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살았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던 거다.
누군가 내 감정을 이해해주는 단 하나의 말, "그래도 괜찮아"가 마음의 벽을 녹이는 데는 충분했다.
"감정을 말해도 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마음이 다시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살면서 어떤 감정들은 강하게 흔들고 지나간다.
그러고 나면, 남는 게 있다.
비워진 마음이라든가,
아니면, 이상하게 낯선 정적 같은 거.
나는 감정이라는 게 지나가고 나면, 뭔가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길 줄 알았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더라.
예전엔 분노가 지나간 자리엔 후회가 남았고,
슬픔이 머물렀던 자리는 괜히 어수선했다.
“그땐 진짜 감정이 너무 북받쳐서…”
“아, 내가 왜 그랬지?”
혼잣말로 자주 이런 말들을 내뱉곤 했다.
대학 시절, 친구랑 크게 싸운 적이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걸로 다투다가 결국 서로 연락을 끊었다.
한참 뒤에야 내가 그때 무슨 감정에 휘둘렸는지 돌아볼 수 있었는데,
그때는 그냥 ‘이 사람은 날 몰라준다’는 서운함 하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감정은 나를 위한 방어였던 것 같다.
상처받기 싫어서, 먼저 화를 냈던 거지.
감정은 무섭도록 생생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무력해진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 감정이 남기고 간 건 늘 뒤늦은 해석뿐이다.
이제는 누가 내게 묻는다.
“그 감정, 지나가고 나니까 뭐가 남았어?”
나는 가끔 이렇게 대답한다.
“음... 알아차림? 아, 그리고 가끔은 허무함.”
감정을 느끼는 건 인간의 특권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특권에는 늘 책임이 따른다.
그 감정을, 그때 나는 어떻게 표현했는지.
누군가를 찌르진 않았는지.
혹은, 스스로를 더 다치게 하진 않았는지.
요즘 나는 감정을 다루는 데 있어서
예전보다 훨씬 조심스러워졌다.
감정은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표현하는 방식’은 더 중요하다는 걸 배웠다.
그래서 감정이 지나간 자리를 살핀다.
거기엔 관계가 무너졌을 수도 있고,
내가 나를 미워했던 기억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혹은, 더 단단해진 나도 있을지 모른다.
지금도 가끔은 말한다.
“아, 그 감정 지나가고 나니까 참... 뭐랄까. 그냥, 내가 보이더라.”
감정이 지나간 자리에는 결국,
나 자신이 남는 것 같다.
나는 그걸, 조금은 받아들이고 있다.
조금은, 안아주는 법도 배우는 중이다.
어릴 때 나는 화를 잘 못 냈다.
아니, 사실은 낼 줄 몰랐다.
누가 밥을 먼저 먹어도,
내 물건을 허락 없이 가져가도,
그냥 참는 게 ‘착한 아이’라고 배웠다.
그래서 그런가.
나는 나중에도 어떤 감정이 생기면
그걸 꼭꼭 눌러 담는 습관이 생겼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에서는 온갖 말들이 웅크리고 있었다.
"진짜 왜 저래?"
"말은 왜 그렇게 해?"
"나 지금 무시당한 거 맞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사라진 줄 알았지.
그때는.
나는 한동안 그게 ‘감정조절’이라고 생각했다.
분노도 삼키고, 슬픔도 무시하고,
서운함은 ‘별일 아니야’라고 스스로 타이르면서.
근데 그게 아니었다.
30대 중반쯤, 갑자기 사람들과 관계가 버거워졌다.
친구의 농담에도 욱하고,
회사에서 회의 중에 쓸데없이 눈물이 날 뻔했고.
심지어 별일 아닌데도 잠이 안 오는 날이 많아졌다.
“그거 억눌렀던 감정 때문일 수도 있어요.”
상담실에서 상담선생님이 그렇게 말했을 때,
처음엔 ‘설마’ 했다.
나는 참는 게 익숙한 사람이었고,
그게 나쁘다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으니까.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수십 번, 감정을 무시한 끝에
몸이 먼저 반응한 적도 많았다.
복통, 두통, 이명, 불면…
그건 다, ‘말을 못 한 내 마음’이 보낸 신호였던 것 같다.
감정은 억누른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더 조용하고 더 깊은 방식으로 돌아온다.
문득,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급식시간에 반 아이 하나가 내 도시락을 흘려버렸는데
그날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닦고 조용히 앉아 있었던 기억.
그리고 그날 저녁, 이유도 없이 어머니한테 짜증 냈던 나.
그때부터 감정이 돌아오는 길을
나는 몰래 만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요즘은 감정을 밀어내지 않으려고 한다.
불편한 감정이 올라오면
“어, 왔네” 하고 맞이해본다.
그게 쉽진 않다.
아직도 누군가 내 감정을 불편해할까 봐 망설이기도 하고.
표현하고 나서 후회할까 봐 주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그 감정이 나도 모르게 쌓이고, 돌아오는 거다.
돌아올 때는 더 크고, 더 무겁게.
그리고 예고 없이.
그래서 요즘은 스스로에게
자주 이렇게 말한다.
“지금 느끼는 감정, 지금 느껴도 돼.”
“지금 표현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더 크게 되돌아올 수 있어.”
감정을 억누른다고 성숙해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감정을 들여다볼 때
진짜 내가 조금씩 자라난다는 걸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아, 또 괜히 울컥했네.”
그날도 그랬다.
지하철 안에서 우연히 들은 어떤 노래 한 구절에
목이 메고, 눈이 뜨거워지는데
이유를 모르겠는 거다.
“나, 왜 이래?”
그 말이 입 밖으론 안 나왔지만, 속으론 수없이 되뇌었다.
사실 그 전날에도 비슷했다.
회사에서 회식 자리에 늦었다는 이유로
괜히 쏘아붙인 선배 말에
표정도 안 바뀌고, 웃으면서 넘겼는데.
집에 와서 샤워기를 틀다가
갑자기 눈물이 났다.
그땐 그게 감정인지 몰랐다.
그냥 피곤한 줄 알았다.
다들 그렇게 산다고, 나도 그렇게 넘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근데 이상하게…
그날 이후로 뭔가 계속 맺히는 기분이었다.
회사에서, 카페에서, 심지어 마트에서도
말 한 마디, 눈빛 하나에 내가 너무 쉽게 흔들리는 느낌.
너무 감정적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스스로가 싫었다.
그래서 또 감정을 눌렀다.
“지금은 울 때가 아니지.”
“이 정도로 상처받는 건 너무 유약한 거야.”
“지나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닐 텐데.”
그렇게 말하면서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상담을 받고 나서야
처음으로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해줬다.
“감정은 배신하지 않아요.
지금 이 감정은, 당신이 무언가를 제대로 겪었다는 증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늘 감정을 의심했다.
이 정도로 화가 나는 내가 너무 예민한 건 아닐까.
이렇게 서운한 건 내가 이기적인 건가.
이렇게 힘든 건 나만 이상한 건가.
늘 그런 식이었다.
감정이 올라오면
그걸 믿지 못했다.
그런데 감정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매번 말해줬다.
“여기 아파.”
“지금 힘들어.”
“너 좀 쉬어야 돼.”
“지금은 더 듣지 말고 나가야 해.”
이제는 알겠다.
감정은 날 곤란하게 하려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날 지키려던 거였다.
마치 어릴 때부터 내 곁을 지켜주던
말 없는 친구처럼.
내가 무시할수록 더 조용히
더 단단하게, 거기 있었다.
지금도 어떤 날은 그런 감정이 올라온다.
갑자기 이유 없이 슬퍼지기도 하고,
누가 나를 오해한 것 같으면 불쑥 화가 나기도 한다.
예전 같으면
그걸 억누르고, 혼자 참고, 잊으려고 했을 텐데.
지금은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래, 너 또 왔구나.
이번엔 뭐가 불편했는지 말해봐.”
감정은 그렇게 다정하게 찾아온다.
그 말을, 이제는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마음이 복잡했다.
별 일 아닌 것처럼 보였을 텐데
왠지 모르게 하루 종일 뭔가 걸려 있었다.
기분이 꾹 눌린 듯하고,
사람 말에 괜히 예민하게 반응하고.
‘왜 이렇게 별 것도 아닌 일에 예민하게 굴지…’
‘내가 너무 유난인가…’
‘이렇게까지 힘들 이유가 있었나?’
생각은 계속 나를 몰아붙였다.
기분보다 먼저,
판단이 앞섰다.
그러다 문득,
상담 때 상담선생님께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감정은 판단하지 말고, 그냥 느껴주세요.”
그게 무슨 말인지
그땐 잘 몰랐는데,
그날 처음으로
그 말을 곱씹어보게 됐다.
그래서 처음으로
아무 말 없이 앉아서
내 기분을 그대로 느껴보기로 했다.
그냥,
아무 평가 없이.
‘왜’도 묻지 않고.
‘이러면 안 돼’도 말하지 않고.
그냥, 그런 나로 가만히 있어보기.
조금 낯설었고,
처음엔 잘 안 됐다.
습관처럼
“너 왜 그래”
“그만 좀 해”
“이제 그만 잊어”
그런 말들이 튀어나왔지만,
그럴 때마다
살짝 눈을 감고
손바닥을 한번 꽉 쥐었다 펴면서
마음을 다독였다.
“그래. 그냥, 이 기분이 있구나.
그냥 있네.
조금 무겁고, 좀 서운하고,
왠지 슬픈 것도 같고…
그런 기분이 있네.”
그렇게 가만히 인식만 해주니
이상하게도
감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꼭 ‘어디로 사라졌다’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내가 ‘그걸 안아줬다’는 느낌.
그 이후로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조금 멈추게 됐다.
기분이 나쁠 때,
예전엔 바로
“내가 이상한가?
왜 이렇게 또 민감하지?”
이렇게 반응했지만,
요즘은 가끔 이렇게 말한다.
“그래, 또 왔구나.
잠깐 앉아 있어봐.”
감정을 손님처럼 대하니까
덜 무서워졌다.
감정은 무조건 사라져야 할 대상이 아니고,
해결해야 할 문제도 아니고,
때로는 그냥
그 자리에 있도록 두면 되는 거였다.
울컥하는 감정,
설명할 수 없는 외로움,
말할 수 없는 짜증까지도.
그저
‘있다’고만 인식해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감정은 조금씩 조용해졌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오늘도
사실 뭔가 마음 한켠이 묵직했다.
그래서 일부러
카페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살짝 귀를 기울여보았다.
느린 템포의 재즈 피아노.
커피 향기.
그리고
지금 이 감정.
내 안의 감정은
이렇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걸 판단하지 않고
그냥 느껴주는 순간,
조금은
괜찮아졌다.
나는 오래 울지 못했다.
아니, 울 수 없었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어린 시절부터 울면 혼났다.
“그 정도 일로 왜 우냐”
“울면 더 혼난다”
그 말이 내 마음에 깊게 박혀 있었다.
그래서 눈물이 차올라도 삼켰다. 숨으로, 목으로, 그리고 마음 속 깊은 곳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다르지 않았다.
회사에서 힘든 말을 들어도, 친구에게 서운한 일이 생겨도, 울면 뭔가 패배하는 기분이 들었다.
괜히 더 연약해 보이고, 더 불리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웃었다.
웃는 게 안전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웃고 돌아선 후,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했다. 목 안쪽이 꽉 막히는 기분.
그게 슬픔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몇 년 전, 상담실에서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많이 참으셨네요. 이제 울어도 괜찮아요.”
그 순간, 숨이 걸려왔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눈물이 터졌다.
그날 이후로 나는 조금씩 울기 시작했다.
억지로 울지 않았다.
다만, 울고 싶을 때 참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뜨거운 물에 손을 담그고 있다가,
가끔은 지하철 창밖을 보다가.
눈물이 났다.
눈물은 단순한 물방울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스스로 균형을 잡기 위해 내보내는 ‘정서적 배출’이다.
눈물 한 방울에는 말로 다 하지 못한 이야기와 기억이 녹아 있다.
그래서 울음은 회복의 시작이 된다.
울지 못하는 시기는, 내 마음이 나를 지키려고 ‘동결(freezing)’ 모드에 들어간 상태일 수 있다.
하지만 회복은 동결에서 해빙으로 넘어갈 때 시작된다.
얼었던 마음이 녹을 때, 그 물이 바로 눈물이다.
나는 울면서 알게 됐다.
울음은 나를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나를 다시 세우는 과정이라는 걸.
내 안의 진짜 나가 하고 싶었던 말이, 울음 속에서 들린다는 걸.
이제 나는 예전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때 울어도 괜찮았어.
울어야 네가 하고 싶었던 말을 알 수 있었을 거야.
울음은 네 편이야.”
살다 보면, 우리는 수없이 많은 조언을 듣는다.
“그렇게 하면 안 돼.”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내가 해봐서 아는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들이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
귀에는 들어오지만 마음에는 박히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말도, 그때의 나는 받아들일 마음이 닫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정말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아무도 내 상황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군가의 조언이 오히려 부담스럽고, 때로는 나를 판단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때는 나를 위로하는 말조차, 왠지 나를 밀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같은 말을 들었는데… 이상하게 다르게 들렸다.
“괜찮아. 이제는 네 마음을 먼저 챙겨야 해.”
이 말이, 그날은 이상하게 부드럽게 다가왔다.
마치 오래 기다린 편지가 도착한 것처럼.
아마 그때의 나는, 마음을 조금 열 준비가 되었던 것 같다.
상담심리학에서는 ‘조언’의 효과가 타이밍과 관계의 안전감에 크게 좌우된다고 본다.
아무리 옳은 말이어도, 듣는 사람이 심리적으로 방어 상태에 있으면 그 말은 벽에 부딪혀 튕겨 나간다.
반대로, 마음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건네진 말은, 아주 작은 한 문장이어도 마음 깊이 들어간다.
회복과 성장은, 조언을 듣는 기술이 아니라
조언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나를 돌보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상태는 ‘나를 비난하지 않는 관계’에서 더 잘 만들어진다.
돌아보면, 나를 살린 건 그 말 자체가 아니었다.
그 말을 듣기 위해 내가 걸어온 시간, 견뎌온 밤들, 그리고 나를 조금씩 열게 만든 몇 번의 작은 경험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누군가에게 조언을 건넬 때, 그 사람이 준비되었는지를 먼저 살피려고 한다.
내가 그때처럼, 아직은 준비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혹시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누군가의 조언이 무겁게 느껴진다면
그건 당신이 틀렸거나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아직 마음이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어서 그렇다.
그럴 땐 조언을 억지로 붙잡으려 하지 말고, 대신 나를 회복시키는 일에 먼저 집중하면 된다.
그게 준비다.
그리고 준비가 되었을 때, 그 말은 자연스럽게 들릴 것이다.
그녀는 한동안 앞만 보고 달렸다.
하루를 버티는 것이 전부였고, 미래를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잠시라도 속도를 늦추면, 무언가가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장 힘든 순간은 달리는 중이 아니라
멈춰 섰을 때 찾아왔다.
멈춘 자리에서, 그동안 외면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왔기 때문이다.
상담 장면에서도 이런 경우를 자주 본다.
위기를 헤쳐가는 동안에는 울지도, 크게 흔들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상황이 조금 안정되면, 그제야 눈물이 터진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지연된 감정 반응(delayed emotional response)’이라고 부른다.
몸과 마음이 위기 모드에서 빠져나왔을 때, 억눌렸던 감정이 표면으로 올라오는 것이다.
그녀도 그랬다.
달리기를 멈추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 알았다.
그때 들려온 한마디가 있었다.
“이제 울어도 돼요.”
그 말은 단순한 허락이 아니라, 안전의 신호였다.
울어도 괜찮고, 무너져도 괜찮은 공간에 있다는 확신.
그 안에서 비로소 감정은 흘러가고, 회복은 시작된다.
회복과 성장은 언제나 ‘속도’가 아니라 ‘타이밍’의 문제다.
달리는 중에도 성장할 수 있지만, 깊은 회복은 멈춤 속에서 일어난다.
그 멈춤이 가능해지려면,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 환경과 관계가 필요하다.
심리적으로 안전한 관계가 곁에 있을 때, 사람은 비로소 숨을 고르고 다시 걸을 힘을 얻는다.
혹시 지금 달리는 중이라면,
잠깐 멈추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멈춤은 포기가 아니라, 다음을 위해 숨을 고르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보여준다.
그는 오랫동안 자기 마음을 드러내는 데 서툴렀다.
속으로는 수많은 말을 삼키고 살았지만, 겉으로는 괜찮은 척이 습관이 됐다.
상처를 드러내면 약해 보일 것 같았고, 그 약함이 또 다른 상처가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 알고 지낸 사람 앞에서 이상하게 말이 흘러나왔다.
그저 일상의 대화를 이어가던 중이었는데, 묻어두었던 기억과 감정이 불쑥 튀어나왔다.
말하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이게 나를 숨기지 않는다는 거구나.’
상담심리학에서는 이런 과정을 정서적 개방(emotional disclosure)이라 부른다.
억눌린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뇌는 그 경험을 재구성한다.
그 재구성이 바로 회복의 시작이다.
말을 꺼내는 행위 자체가, 상처를 과거의 한 장면으로 만들어 준다.
그 후 그는 더 이상 완벽하게 포장된 모습만 보여주지 않았다.
가끔은 한숨도 내쉬고, 때로는 웃기 힘든 날엔 웃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때, 주변 사람들과의 거리는 조금씩 좁혀졌다.
관계는 솔직함 위에서 자라난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음의 문을 여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하지만 한 번 경험한 그 해방감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그 기억이, 다음번에도 용기를 내게 만든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눈물이 많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울고 싶어도 울지 못했다.
마음 한구석에서 무언가 차오르더라도, 그 감정을 눈물로 내보내는 법을 잊고 살아왔다.
울면 약해 보일까, 혹은 울면 무너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도 그 습관은 변하지 않았다.
좋지 않은 일을 겪을 때마다 감정을 꾹 눌러 담았고, 결국 그 눌림이 몸과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녀는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라 믿었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가두는 벽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상담 장면 속에서 뜻밖의 순간이 찾아왔다.
조용한 대화를 나누던 중, 오래 묻어두었던 상실의 기억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물이 번졌다.
그녀는 스스로 놀랐다.
‘내가… 울고 있네.’
상담심리학에서 울음은 단순한 감정 배출이 아니다.
누르고 있던 감정이 안전한 환경에서 풀릴 때, 뇌와 몸은 새로운 방식으로 그 경험을 저장한다.
이 과정을 ‘정서의 해소(emotional catharsis)’라 부른다.
그 순간부터 상처는 더 이상 현재형이 아니라, 지나간 과거의 이야기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날 이후, 그녀는 울음을 나쁜 것으로 보지 않게 되었다.
눈물이야말로 마음이 회복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라는 것을, 몸으로 배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