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별로 사고 안 치는 아이였어요. 그냥, 잘 웃고, 말 잘 듣고, 분위기 안 망치려 했죠.” 이 말을 하는 그녀는 어느새 쉰을 넘긴 중년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투는 마치 아직도 어린아이 같았다. 애써 웃고 있었지만, 그 눈빛엔 오래된 질문 하나가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착하게 살았는데… 왜 나는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안 들죠?”
열등감은 비교에서 시작되기도 하지만, 더 깊은 뿌리는 “사랑받기 위한 전략”으로서의 착함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어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울면 짜증이라고 하고, 화내면 버릇없다고 하고, 싫다고 말하면 눈빛이 차가워진다는 걸. 그래서 그 아이는 선택한다. 감정을 누르고, 입을 닫고, 웃는 아이가 되기로.
가상의 인물 '하윤'은 초등학생 때부터 ‘어른들이 좋아하는 아이’였다. 학교에선 모범생이었고, 집에선 동생을 잘 돌보았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혼자 울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 “그냥 피곤해서요”라고 대답했다. 성인이 된 하윤은 인간관계에서 늘 긴장하고, 실망당할까봐 끊임없이 맞춘다. 감정이 차오를 때조차 상대의 기분부터 살핀다. “내가 이래도 괜찮을까?” 그 질문이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 속 '기쁨이'는 슬픔이를 밀어내며 아이의 감정을 통제한다. 슬픔이의 역할이 뭔지 이해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밝고 긍정적으로 만들려 한다. 그 결과 주인공 라일리는 자신의 진짜 감정을 외면하게 되고, 결국 정서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한다. 기쁨만을 강요받은 아이는 슬퍼할 줄 모르는 채로 무너진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주인공도 이 흐름을 품고 있다. 영우는 비범한 지능을 가졌지만, 끊임없이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애쓴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는 사람들에게 불편한 존재일 수 있어요”라고 말한다. 그 말에는 슬픔과 동시에 오래된 배려가 묻어 있다. “내가 문제를 만들지 않아야,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줄 거야.” 바로 그것이 착한 아이의 내면이다.
이런 아이들은 대체로 ‘문제행동’이 없다. 그렇기에 어른들은 말한다. “얘는 손이 안 가. 참 고마운 아이야.” 하지만 그 말은 때로 아이에게 이렇게 들린다. “네가 괜찮은 애니까, 나는 널 힘들게 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너도 절대 나를 힘들게 하면 안 돼.”
문제는, 그 착함이 아이의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었다는 점이다. 사랑받고 싶어서, 버려지기 싫어서, 혼나지 않기 위해 감정을 숨긴 결과가 ‘착함’이었다면 그 아이는 결국 자신의 감정이 틀렸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자란 어른은 자신에게조차 진심을 허락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가상의 인물 ‘재혁’은 회사에서 늘 “착한 사람”이었다.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무례한 상사의 말도 웃으며 넘긴다. 그러다 어느 날, 아무 일도 아닌 듯한 말에 주먹을 쥐고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대를 부여잡고 울었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착한 게 아니라, 참아온 거였구나.”
착한 아이는 어른이 되면 두 가지 길로 나뉘곤 한다.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맞추는 사람, 혹은 아예 관계를 피하고 혼자인 게 편한 사람. 왜냐하면 둘 다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내 감정은 누군가에게 짐이 될 수도 있어.” 그 믿음이 마음 깊이 자리할 때, 사랑받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두렵다.
하지만 감정을 숨긴 아이는 결국 자기 자신을 잃는다. 기쁘지 않아도 웃고,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다 보면 정작 ‘진짜 내 마음’이 뭔지 모르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절실해지면서도 동시에 멀어진다. 왜냐하면 진짜 나로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의 사랑도, 신뢰도, 전부 ‘조건 위의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네가 싫다고 말해도 괜찮아.” “화내도 돼. 실망시켜도 돼. 그렇게 해도 넌 여전히 사랑받을 수 있어.” 착한 아이는 사실, 사랑받고 싶은 아이일 뿐이다.
어릴 적 나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아이였다.
혼날까 봐서가 아니라, 싫은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무엇보다, 미움받는 게 두려웠다.
엄마가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아빠가 무표정하게 TV를 보고 있을 때,
나는 조용히 눈치를 봤다.
장난감이 부서졌을 때도, 속상한 일이 생겼을 때도,
그저 내 안에서 꿀꺽 삼켰다.
조용한 아이만이 사랑받는다고 믿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말을 줄이는 방식'으로
나를 지켜내는 법을 익혀갔다.
감정을 말하지 않으면 덜 미워질 거라 믿었고,
상처받을 확률도 줄어들 거라 여겼다.
누군가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침묵은 내가 쥘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무기였다.
하지만 그 전략은
어른이 된 나의 삶에서 이상한 방식으로 되돌아왔다.
회사에서 부당한 요구를 들어도 “네, 알겠습니다”라며 웃었고,
친구가 내 마음을 상하게 해도 “괜찮아, 네가 힘들었나 보네”라며
스스로를 설득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다툰 날에도
“내가 좀 예민했지?”라고 말하는 쪽은 늘 나였다
.
내 감정보다 상대의 기분을 먼저 살피는 버릇은
이제 내 몸에 깊숙이 달라붙은 습관이 되었다.
어느 날, 연인에게 울먹이며 말한 적이 있다.
“나 요즘 너무 힘들어.”
그때 돌아온 말은 이랬다.
“너는 항상 괜찮다며? 난 네가 그런 줄 몰랐어.”
순간, 서글펐다.
항상 괜찮은 척을 한 건 바로 나였다.
괜찮지 않다고 말하면,
상대가 나를 피하거나 멀어질까 봐.
그러면 사랑이 멀어질까 봐.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어릴 적 나와 닮은 눈빛이 있었다.
말하지 못한 감정을 눈빛 속에 꼭 쥐고 있는 아이.
그 아이는 조심스럽게 묻고 있었다.
“이 말을 해도, 나를 싫어하지 않을까?”
“내가 솔직해지면, 나를 떠나지 않을까?”
나는 그 아이에게 처음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이제는 괜찮아.
너는 말해도 되는 사람이야.”
심리학에서는 이를
‘조건적 사랑에 대한 두려움’이라 말한다.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 감정을 억제했던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마음을 ‘보류’하는 데 익숙해진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관계를 지켜내려 한다.
하지만 그건 관계를 지키는 길이 아니라,
스스로를 잃어가는 길이었다.
표현하지 않으면 오해는 쌓이고,
관계는 얕아진다.
말하지 않으면,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도 생기지 않는다.
이제는 안다.
정말 깊은 관계는 침묵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감정의 파동이 솔직하게 드러날 때,
관계는 그제야 비로소 진짜가 된다.
그래서 나는 이제 배운다.
표현하는 법을.
“지금은 좀 힘들어.”
“그 말에 마음이 아팠어.”
“난 지금 사랑받고 싶어.”
이 말들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나 자신에게 정직해지는 것이다.
사랑받기 위해 침묵했던 그 시절의 나에게,
나는 지금도 계속 속삭이고 있다.
“괜찮아. 네 감정은 충분히 말할 가치가 있어.
넌 언제나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야.”
나는 종종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왜 이렇게 둔감할까? 혹은, 왜 이렇게 예민할까?
하나의 몸 안에 이토록 상반된 감정이 함께 존재한다는 게 때로는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진다.
어떤 상황에서는 무덤덤하게 넘어가면서도, 어떤 말 한마디엔 작은 가시처럼 마음이 오래도록 찔린다.
둔한 듯 예민하고, 예민한 듯 둔한 내가 나조차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감정에 대한 내 감각은,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어긋나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 나는 울면 혼났고, 짜증을 부리면 나쁜 아이라는 말을 들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대신 억누르고 조절하는 법을 먼저 배웠다.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속마음을 숨기는 게 먼저였고, 그 과정에서 감정은 사라진 게 아니라
무의식의 깊은 곳으로 밀려나 버렸다.
그렇게 밀려난 감정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되살아나곤 했다.
화를 내야 할 상황에서도 나는 웃었고, 누군가의 따뜻한 말 앞에서도 별다른 감흥 없이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한 것이 아니라, 감정을 허용하는 일이 두려웠던 것이다.
마음을 열면 무너질 것 같은 불안이 내 안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감정을 재빨리 차단하거나, 반대로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반응하며 나를 보호했다.
지금 돌아보면, 둔감함도 예민함도 결국은 나를 지키기 위한 방식이었다.
둔감함은 상처로부터 나를 마비시키는 생존 전략이었고,
예민함은 다가올 위험을 미리 감지하려는 경계심의 다른 이름이었다.
서로 정반대처럼 보이는 두 감정이 공존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건 내가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낸 나만의 방어 방식이자, 생존의 언어였다.
하지만 이제 나는, 감정의 온도를 다시 배우는 중이다.
속상할 땐 “속상해”라고 말하고, 두려울 땐 그 감정 안에 잠시 머물러보려 애쓴다.
여전히 어색하고 서툴지만, 감정을 회피하지 않을수록 내 마음에 대한 이해는 조금씩 깊어진다.
감정도 근육과 같아서, 오랫동안 쓰지 않으면 굳는다.
조금씩 익숙해져야 다시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다.
나는 이제야 조금 알게 되었다.
무딘 나도, 예민한 나도 모두 내가 살아온 방식의 결과라는 것을.
그러니 그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일이
나를 회복과 성장으로 이끄는 첫걸음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누군가가 다가왔을 때,
감정을 억지로 감추거나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표현할 수 있다면,
그때 나는 비로소 나로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오랜 시간 기다려온 감정의 회복이자 성장이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그런 말을 자주 들었다. 연인에게도, 친구에게도. 심지어 가족에게서도.
처음엔 억울했다. 나름대로는 표현하고 있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돌아보면, 진짜 내 감정을 말한 적은 거의 없었다.
아니, 말할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감정을 드러내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울면 혼났고, 화내면 미움받았다.
그래서 나는 점점 감정을 접어두는 쪽을 택했다.
슬퍼도 웃고, 화가 나도 넘기고, 외로워도 괜찮은 척하며.
그렇게 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자란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어렵다.
특히 사랑 앞에서.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면,
마음속 혼란과 상처, 불안정한 나의 모습이
그대로 들킬까 봐 두려워진다.
누군가 “너의 진짜 모습을 보여줘도 괜찮아”라고 말해줘도,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 말을 믿는 순간, 나라는 사람이 무너질까 봐.
그래서 자꾸 멈추고, 물러나고, 도망쳤다.
감정은 끝내 꺼내지 못한 채, ‘괜찮은 사람’처럼 웃었다.
나는 늘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길 원했다.
티 내지 않고, 기대하지 않고, 스스로도 괜찮은 척.
그런데 문득, 이런 질문이 튀어나왔다.
“나는 정말,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었을까?”
심리상담 장면에서 반복해서 마주하는 문장이 있다.
감정을 억누르며 자란 사람일수록, 관계 안에서
사랑을 ‘받는 법’도, ‘주는 법’도 익히지 못한 채,
그저 버티는 법만 배우고 자란다.
그래서 누군가 다가오면,
그 사랑이 고맙기보다… 두렵다.
그게 어쩌면 지금, 사랑 앞에서 자꾸 숨는 내 모습이다.
사랑이 올 때마다, 나는 도망쳤다
사랑은 다정한 언어로 다가오지만,
나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그 사랑조차 경계하게 된다.
하지만 요즘은 조금씩 연습해보고 있다.
내 감정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일.
그게 서툴러도 괜찮다고,
아직 다 말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내 안의 나에게 말해주는 연습을.
그리고 언젠가 다시 사랑하게 된다면,
이제는 감춰진 내가 아니라, 느낄 줄 아는 나로,
그 사랑 앞에 서고 싶다.
세 살 무렵이었다.
내가 무심코 던진 나무 블록이 엄마의 이마에 맞았고, 엄마는 고개를 돌려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 이유도 모른 채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다시는 엄마를 울리지 않겠다고.
그 다짐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었다.
그건 내 삶을 지탱한 생존 전략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엄마의 감정을 먼저 살피는 아이가 되었다.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담긴 기색을 민감하게 감지했고, 내 마음보다 엄마의 반응을 먼저 헤아렸다.
그렇게 나는 자신을 지우는 법을 배웠다.
사람들은 그런 나에게 “참 착하다”고 말했다.
그 칭찬은 달콤했지만, 동시에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감정의 우선순위는 바뀌지 않았다.
“나는 괜찮아”라는 말은 내 마음을 보호하는 주문이 되었고,
감정의 결핍은 ‘배려’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그러나 그런 배려는 종종 자기 상실이라는 그림자를 남겼다.
어느 날 문득, 마음속에서 이런 질문이 올라왔다.
“엄마가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살았을까?”
이 질문은 금세 사라지지 않는다.
한 번 마음을 울린 사람에겐, 다시는 잊히지 않는다.
거울 속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도,
타인의 기대 안에서 나를 억눌러온 시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나는 엄마를 사랑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엄마를 사랑하는 것과 내 감정을 사랑하는 일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을.
누군가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건 진짜 사랑이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분리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시작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엄마의 딸’이라는 역할 이전에,
‘나 자신’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엄마의 눈물이 더 이상 내 삶의 방향이 되지 않도록,
내 감정에도 이름을 붙이고, 더는 숨기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타인이 아닌 나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중이다.
사람은 누구나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가 그것을 안전하게 느끼며 살아온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감정을 꺼내는 일이 곧 위험의 신호였고,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곧 이별을 불러오는 일이었다.
감정을 표현하던 순간에 벌어진 외면, 조롱, 혹은 무관심. 그 기억은 사람을 조용히 굳게 만든다.
이야기를 들으며 눈동자가 자꾸 아래로 향하는 사람들이 있다.
말의 의미보다는 표정의 흐름을 먼저 살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감정보다 분위기를 먼저 읽으며 자란 사람일 확률이 높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껴도 괜찮았던 시절이 없었던 이들.
누군가가 화를 낼까 두려워 먼저 웃고, 누군가가 울까 봐 먼저 침묵하는 사람들.
이들은 종종 스스로를 ‘감정이 무딘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딘 것이 아니라, 감정을 너무 오랫동안 눌러온 결과일 뿐이다.
위험하지 않은 말투로, 안전한 분위기로, 자기 안의 감정을 천천히 꺼내본 기억이 없다면
감정을 표현하는 일은 곧 자기 붕괴에 가까운 공포로 다가온다.
“그냥 뭐… 괜찮아요.”
“그런 일쯤은, 다 그러고 사니까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사실 누군가 말없이 손을 잡아주기를 기다리는 바람이 있다.
그 바람은 ‘도와달라’는 말조차 낯설게 만들어버린 고요한 절망 속에서 자라난다.
그래서 그들은 차라리 말없이 무너진다.
아무 말도 없이 울지 못하고, 아무 말도 없이 떠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도 변화는 온다.
그것은 거창한 다짐이나 ‘이제는 행복해질 거야’ 같은 외침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작은 연습에서 시작된다.
조금 울컥할 때 울컥했다고 말하는 것.
“속상해요”라는 말을 처음 꺼내보는 것.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누군가가 조용히 “응, 속상했겠다”고 말해주는 것.
그 단순한 경험 하나가
평생 막혀 있던 감정의 통로를 조금씩 넓혀준다.
감정은 느끼는 것만큼이나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경험 속에서 회복된다.
어떤 이는 상담실에서 처음으로 감정을 표현해보고,
어떤 이는 친구와의 늦은 밤 통화에서
“그땐 정말 외로웠어”라는 말을 처음 꺼낸다.
말하는 순간 떨리고 낯설고 부끄럽지만,
그 다음엔 자기도 몰랐던 무게가 스르르 녹아내린다.
감정을 회피했던 사람들이 감정과 다시 연결되는 순간,
삶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같은 풍경인데도 훨씬 부드럽고,
같은 하루인데도 덜 피곤하다.
왜냐하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기 때문이다.
감정을 모른 척하고 외면하며 살아가는 일은
생각보다 큰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그래서 조심스러운 감정 연습은
결국 내면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문이 된다.
그 문을 여는 데는 거창한 용기보다,
하루에 한 줄, 한 문장, 한 숨의 정직함이면 충분하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감정을 느끼는 건 약함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그걸 느끼고 싶다는 마음 하나면, 이미 회복은 시작되고 있다고.
조금 울컥했던 날이 있었다.
그 순간, 누군가가 물었다.
“왜 그렇게 울컥했어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감정의 이름을 나도 모르겠어서였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감정을 꺼내지 않고 살아왔다.
속상해도 괜찮다고 하고,
눈물이 나도 웃으며 넘긴다.
그러다 보니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부끄럽고, 민망하고,
어쩐지 ‘민폐’처럼 느껴진다.
‘나약하게 보일까 봐’,
‘괜히 분위기 흐리는 사람 될까 봐’
감추고 삼키며 살아간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정을 말하는 연습조차 해보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감정은
말하지 않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마음속에서 천천히 곪아갈 뿐이다.
외면하고 억누를수록
그 감정은 오히려 나 자신을 향해 칼끝을 겨눈다.
“왜 너는 나를 그렇게 오래 무시했느냐”고.
그래서 지금이라도
조심스럽게 꺼내보아야 한다.
말이 서툴러도 괜찮고,
표현이 어색해도 괜찮다.
처음엔 이렇게 말해도 좋다.
“나, 좀 불편했어.”
“사실, 섭섭했어요.”
“이 말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속상했어요.”
그 말이 나왔을 때,
누군가가 진심으로 이렇게 말해준다면
“응, 그런 마음 들 수 있어요.”
그 한마디가
얼어붙은 내 마음을 녹이는 첫 햇살이 된다.
감정은 표현되는 순간,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이해받은 감정은
우리 안에서 서서히 정리되며 떠나간다.
감정을 말하는 일은
갈등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관계를 지키는 기술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작은 회복의 시작이다.
감정을 말하는 당신은,
결코 약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감정을 꺼낼 수 있게 된 그 순간부터
당신은 이미, 회복의 길 위에 서 있다.
“내가 그때 그렇게 말하지만 않았어도…”, “그 사람에게 너무 미안해서 얼굴을 못 보겠어.”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겪는 이런 감정들, 그것이 바로 죄책감이다. 죄책감은 단순한 후회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내면에 오래전부터 형성된 ‘어떤 목소리’와 충돌하며 생겨나는 정서다. 한 번 떠오르면 쉽게 사라지지 않고, 반복해서 우리를 괴롭히거나, 때로는 성장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심리학적으로 죄책감은 타인에게 해를 끼쳤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감정이다. 그런데 그 타인이 진짜로 존재하는 누군가일 수도 있지만, 대개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내면의 누군가’ 즉, 어릴 적 엄마, 아빠, 선생님, 형제의 그림자일 때가 많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양육자에게 의존하는 동시에, 분노나 실망을 느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다섯 살 지후(가상의 아이)는 엄마가 장난감을 사주지 않자 “엄마 나빠!” 하고 울면서 방문을 쾅 닫았다. 하지만 그날 밤 지후는 혼자 “내가 엄마한테 나쁜 말을 해서 엄마가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하고 속으로 울었다. 이때 지후가 느끼는 마음이 바로 ‘죄책감’이다.
대상관계 학자인 멜라니 클라인은 이런 감정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녀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공격적인 감정을 갖는다는 사실 자체가 아이에게 큰 불안을 준다고 보았다. 그래서 아이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상처 준 사람을 '수선(repair)'하려는 충동을 갖는다. 즉, 잘못을 만회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이 잘 작동하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책임감을 갖게 되지만, 반복적으로 실패하거나 사랑을 돌려받지 못한 경우에는 죄책감이 ‘고착’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죄책감을 ‘초자아(superego)’의 작동 결과로 본다. 초자아는 우리가 어릴 때부터 내면화한 부모의 규범, 도덕, 명령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초자아가 너무 강하거나 비판적일 경우, 죄책감은 합리적 판단이 아닌 자기학대적 정서로 변한다.
예를 들어, 30대 후반의 은주(가상의 인물)는 직장에서 작은 실수를 한 뒤 집에 돌아와 “난 항상 문제를 일으켜. 왜 이렇게 못났지?” 하며 자신을 몰아세운다. 상사는 별말 없었고, 동료들도 위로해줬지만, 은주는 죄책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 경우, 죄책감은 실제 행동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나는 늘 잘못된 존재’라는 존재 수준의 자기부정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종종 불필요하게 사과하거나, 모든 문제를 자기 책임처럼 느끼며, 정작 자기 감정은 억누른다. 이는 방어기제 중 하나인 내사(introjection)의 결과다. 자신을 향한 타인의 비난이나 분노를 고스란히 자기 안에 들여와 자아를 공격하는 것이다.
이런 죄책감이 대인관계 전체를 왜곡시키는 경우가 많다. 40대 중반의 정민(가상의 인물)은 늘 타인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지쳐 있었다. 그는 “거절하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아.”라는 말을 자주 했다. 왜냐하면, 어릴 때 그의 엄마는 늘 “다른 사람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고, 정민이 무언가를 거절하면 “너는 왜 그렇게 이기적이니?”라고 꾸짖곤 했다.
그 결과 정민은 ‘나의 욕구 = 이기적 = 죄’라는 공식이 무의식에 새겨져 있었다. 그는 항상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밤이 되면 모호한 분노와 우울에 시달렸다. 이는 자신의 경계를 지키지 못한 채 타인을 만족시키려는 죄책감의 역설적 결과였다.
죄책감에서 회복하는 첫 걸음은 그것이 왜 생겼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행동에 대한 죄책감’인지, ‘존재에 대한 죄책감’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핵심이다. 행동에 대한 죄책감은 변화와 수선의 에너지가 될 수 있지만, 존재에 대한 죄책감은 자신을 좀먹는 독으로 작용한다.
심리상담에서는 내면의 초자아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작업이 중요하다. 상담자는 내담자가 스스로를 더 부드럽게 대하도록 도우며, “너는 괜찮아. 그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라는 새로운 목소리를 내면에 심어준다. 이는 엄격한 내면 부모를 ‘온화한 조언자’로 바꾸는 과정이며, 이로써 죄책감은 더 이상 자기를 공격하는 무기가 아니라, 인간다운 성찰의 한 방식으로 전환된다.
죄책감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증거다. 그것이 없었다면 우리는 타인을 해쳐도 아무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감정이 너무 깊고 오래 머물며 자신을 학대하게 만든다면, 그때는 죄책감과 거리를 둘 시간이다. 중요한 건 그 감정을 지우는 게 아니라, 그것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다. 죄책감과 손을 잡고, 자신을 향한 온유함을 배워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회복이고 성장이다.
죄책감은 겉으로는 참 착한 감정처럼 보인다. 누군가를 다치게 한 기억, 더 잘했어야 했다는 후회, 괜찮았다고 말해도 계속 마음에 걸리는 어떤 장면. 그래서 죄책감은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이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감정처럼 인식된다. 하지만 문제는, 이 감정이 마음속에서 일정한 선을 넘기 시작하면, 마치 물에 녹아든 독처럼 서서히 삶을 병들게 한다는 것이다.
30대 여성 정아(가상의 인물)는 상담 중 자주 울었다. 겉으로 보기엔 자립적인 사람처럼 보였지만, 대화가 어머니 이야기로 흐르면 눈물이 쏟아졌다. 정아는 어릴 때 감정표현이 서툴렀고, 사춘기 내내 어머니에게 반항적으로 굴었다. 결국 어머니는 갑작스러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아는 장례식 이후에도 줄곧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사랑해요’라고 말했으면 좋았을 걸... 너무 늦었어요.”
그녀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갔다. 단지 어머니와의 관계 때문만이 아니다. 직장에서 선배가 퉁명스럽게 반응해도 “혹시 내가 기분 나쁘게 말했나?”를 제일 먼저 떠올렸다. 연인과의 갈등에서도 늘 먼저 사과하고 물러섰다.
정아의 죄책감은 이제 감정이 아니라 패턴이 되었고, 그 패턴은 그녀의 모든 인간관계를 조용히 파괴하고 있었다.
40대 초반의 직장인 민호(가상의 인물)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했다. 상사가 부당한 일을 시켜도 웃으며 받아들이고, 동료 부탁도 거절하지 못했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 그는 깊은 분노와 피로에 빠졌다.
“거절하면 그 사람이 실망할 것 같아요. 그러면 내가 나쁜 사람처럼 느껴져요.”
민호는 어린 시절, 항상 아픈 어머니를 돕던 아이였다. 아버지가 부재했던 집에서 어머니의 짐을 나르고, 동생들을 돌보면서 자랐다. ‘엄마를 편하게 해줘야 착한 아들’이라는 믿음은 성인이 된 지금도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 문제는, 이 죄책감이 자신을 지우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타인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감정과 욕구는 철저히 억눌러야 한다는 강박이었다. 민호는 결국 번아웃에 시달렸고, 대인관계는 피상적으로 변해갔다. 겉으로는 좋은 사람이지만, 속으로는 점점 마르고 있었다.
20대 중반의 대학생 지영(가상의 인물)은 장학금을 받았지만 기뻐하지 못했다. “이 돈은 엄마 병원비에 써야 하는데, 나한테 온 게 죄송해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오히려 스스로를 나무랐다. 장학금을 받은 자신을 축하하지 못하고, 기쁨 앞에서도 ‘죄스러움’을 먼저 느꼈다. 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엄마 덕분에 네가 공부할 수 있는 거야”라는 말을 반복해서 들어왔다. 엄마는 희생했고, 지영은 받기만 했다. 이런 구조 속에서 그녀는 기쁨을 느낄 자격조차 허락받지 못한 것이다. 그녀의 죄책감은 더 이상 ‘잘못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바뀌었다. ‘나는 무언가를 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깊은 자기비난이 마음 깊이 새겨진 것이다. 죄책감은 그렇게 자존감의 밑바닥을 파내고 있었다.
이처럼 죄책감은 처음엔 정당하고 아름다운 감정으로 시작되지만, 해소되지 않고 반복되면 마음의 깊은 곳을 병들게 한다. 죄책감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독성을 갖는다.
첫째, 죄책감은 자기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단순히 "그때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하는 후회였지만, 그것이 반복되고 고착되면 결국 "나는 원래 부족한 사람", "나는 본질적으로 잘못된 사람"이라는 왜곡된 믿음으로 전이된다. 이때 죄책감은 ‘행위’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혐오로 바뀐다. 이는 자존감을 파괴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이며, 사람은 점차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타인과 관계를 맺을 자격조차 없다고 느끼게 된다.
둘째, 죄책감은 지속적인 ‘자기 벌’로 이어진다. 행복을 느끼면 안 된다는 감정이 마음 한켠에 뿌리내리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상황이나 사람을 반복적으로 선택하게 된다. 이는 자신에게 벌을 주는 무의식적 방식이다. "나는 좋은 것을 누리면 안 돼", "나는 이 정도는 당연히 참아야 해"라는 내면의 목소리는, 결국 자신이 고통스러운 환경에 머물게 만든다. 이렇게 죄책감은 삶 전체를 조용히 통제하며, 무의식적으로 자기 파괴적인 방향으로 이끈다.
셋째, 죄책감은 감정을 억압하게 만들고, 그 억눌린 감정은 분노나 피로, 무기력으로 전이된다. 겉으로는 착하고 친절한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내면에는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쌓여간다. 이 감정은 밖으로 표현되지 못하고 내면에 고여 있다가, 결국 우울이나 불안, 혹은 타인을 향한 불필요한 짜증, 신체화 증상 등으로 표출된다. 죄책감은 ‘감정을 감추는 마스크’가 되어, 사람을 이중적인 정서 구조에 가두고 만다. 표현하지 못한 분노는 결국 자신이나 가까운 사람에게로 향한다는 점에서, 죄책감은 매우 은밀한 방식의 정서적 폭력이다.
넷째, 죄책감은 타인을 중심으로 살아가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서서히 지워간다.
다른 사람의 감정과 필요를 항상 우선시하게 만들며, 자신을 돌보는 일에는 죄의식을 느끼게 만든다. "이 정도는 해줘야지", "나는 참고 견뎌야 해"라는 생각은, 결국 자신을 투명하게 만든다. 이는 겉보기에 희생과 배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존재를 지우는 방식의 생존 전략이다. 죄책감이 내면에 깊이 자리 잡은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에 집착하며, 그 과정에서 정작 자신의 감정은 점점 메말라간다. 그 끝은 피로, 우울, 고립이다.
죄책감은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감정이 나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면, 이제는 죄책감과 건강한 거리를 둘 시간이다. 죄책감이 어디서 시작됐는지를 돌아보자. 그것이 정말 ‘잘못’ 때문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내면화된 ‘부모의 목소리’, ‘사회적 기준’, 혹은 ‘타인의 기대’였는지를 분별하는 일이 필요하다. 죄책감은 이따금 나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거울 속에서 내 존재 전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 감정과 화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과도, 자기 자신과도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수치심은 조용하지만 강력한 감정이다. 그것은 대개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대신 속삭인다.
“너는 잘못됐어.”
“너는 이걸 말하면 버림받을 거야.”
“네가 그런 존재인 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끝장이야.”
이런 식의 목소리는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오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 우리 안에서 쌓이고 익는다. 그리고 결국 삶의 방향을 바꿔놓는다.
죄책감은 “내가 잘못된 행동을 했다”는 데 머무른다. 하지만 수치심은 “내가 잘못된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수치심은 자아 전체를 겨눈다. 행동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이 감정은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마음속에서 무겁게 가라앉는다. 그리고 그 무게는 관계를, 삶을, 선택을 변화시킨다.
심리상담실에서 수치심을 꺼내는 사람들은 대개 눈을 피한다. 말끝을 흐리거나 자기도 모르게 웃는다. 그리고 종종 이렇게 말한다. “이건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어요.”
“이 얘기 하면 절 싫어할지도 몰라요.” 그 말 속에는 오랜 시간 감춰온 두려움과 자기비난이 들어 있다.
한 중년 여성(가상의 인물)은 어린 시절 성폭력을 당하고도 수십 년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내가 더럽혀졌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아무 잘못이 없었지만, 수치심은 그녀의 존재 전체를 더럽혀버린 듯했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삶을 파괴한 것은 바로 그 수치심이었다.
또 다른 30대 남성(가상의 인물)은 어릴 적 어머니가 자신을 두고 집을 나간 사실을 감췄다. 그는 ‘버려진 아이’로 보일까 봐 늘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 관계에서도 진심으로 마음을 열 수 없었다. 그의 인간관계는 얕고 피상적이었다. 수치심은 그가 사람을 신뢰하는 걸 막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길조차 가로막았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윌은 천재지만, 반복적으로 사람을 밀쳐내고 스스로를 망가뜨린다. 그에게는 말 못할 학대의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은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인간”이라는 수치심으로 굳어져 있다. 그를 변화시킨 건, 단 하나의 반복되는 말이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 말이 그의 가슴 깊은 수치심을 흔들었을 때, 그는 비로소 마음을 열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지안은 가난과 폭력 속에 살아왔다. 그녀는 자신이 ‘쓰레기’라고 생각하며, 누군가의 다정함 앞에서도 “왜 잘해주냐”고 묻는다. 그녀가 수치심을 등에 지고 살아왔기 때문에, 누군가의 온기조차 의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 드라마는 말한다.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시선, 말없이 옆에 있어주는 존재가 수치심의 방을 천천히 열 수 있다고.
수치심이 많을수록 우리는 자기검열에 시달린다. 무엇을 말하기 전에 백 번은 생각하고, 결국 침묵한다. 자신의 생각을 말할 자격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관계 안에서는 자꾸만 자신을 감춘다. 친밀해질수록 불안해진다. ‘내가 누구인지’ 들킬까 봐,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 한다. 그렇게 자기비하가 습관이 되고 삶은 점점 좁아진다. 시도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나서지 않게 된다. 그리고 결국 혼자가 된다. 외롭지만, 그게 익숙하니까. 그 외로움 속에서도 수치심은 이렇게 말한다. “너 같은 사람은 원래 그래.”
수치심은 혼자서는 잘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수치심은 관계 속에서 생기고, 관계 속에서만 회복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조심스레 털어놓을 수 있을 때,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존재가 있을 때, 그제서야 수치심은 빛을 만나기 시작한다. 수치심은 어둠 속에 있을 때 가장 강력하다. 말을 꺼내는 순간, 빛이 들어온다.
“나는 창피한 게 아니야. 나는 지금 창피하다고 느끼는 거야.”
감정은 나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감정은 그냥 지나가는 것일 뿐이다. 감정은 ‘내’가 아니라, ‘내가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사람,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려는 사람의 시선이 당신 안의 수치심을 조금씩 풀어낸다. 그 시선이 처음엔 불편하고 무서울 수 있다. 그러나 그 시선이야말로 수치심을 뚫는 빛이다.
수치심은 한 인간을 침묵하게 만들고, 작아지게 만든다. 하지만 그 감정은 당신이 나약해서 생긴 게 아니다. 그 감정은 당신이 인간이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어떤 수치심은 타인의 잘못이었고, 어떤 수치심은 사회의 낙인이었고, 어떤 수치심은 스스로도 모르게 품게 된 상처였다.그러나 그 어떤 수치심도 당신의 존재 자체를 잘못되게 만들 수는 없다. 당신은 이야기할 자격이 있다.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존재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운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 한다. “잘하고 있어.” “괜찮아.” “너는 소중한 사람이야.” 이런 말을 들으면 우리는 살아 있다고 느낀다. 누군가의 시선과 말 한마디가 나를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만큼 거절은 두렵다. 거절은 “너는 중요하지 않아”라는 메시지처럼 들린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한다. 인정받기 위해,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조율하고 숨긴다. 인정욕구와 거절에 대한 두려움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한 감정에서 파생된 두 가지 반응이다. 둘 다 결국은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서 온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조건을 배운다. “잘해야 칭찬받는다.” “울면 안 된다.” “착한 아이여야 사랑받는다.” 이런 메시지 속에서 자란 사람은 ‘무조건적인 사랑’ 대신 ‘성과 기반의 사랑’을 내면화한다. 그래서 인정은 곧 사랑의 증거가 되고, 거절은 사랑의 철회로 느껴진다. 애착이론에서는 이 현상을 설명하며, 어린 시절 안정된 애착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도 거절을 존재 자체의 위협으로 받아들인다. 단순히 상황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자기 전체에 대한 부정처럼 느낀다. “나는 거절당할 만한 사람이다”라는 믿음은 조용히 삶을 갉아먹는다.
정신분석 이론은 이를 내면화된 타자의 목소리로 본다. 과거에 나를 무시하거나 외면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내 안으로 들어와, 내가 나를 끊임없이 심판하게 만든다. NLP(신경언어프로그래밍)에서는 이것을 ‘나를 가두는 신념’이라 부른다. “나는 별로야.” “사람들은 나를 알면 떠날 거야.” “나는 사랑받기에 부족해.” 이런 말들은 자기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며, 거절을 예측하고 인정에 목마르게 만든다. 뇌과학적으로도 사회적 거절은 육체적 통증과 비슷한 영역을 자극한다는 연구들이 있다. 즉 거절은 실제로 ‘아프다’. 그래서 인정은 도파민을 분비시키며 우리를 흥분시키고, 거절은 고통을 유발하며 우리를 움츠러들게 한다.
영화 <블랙 스완>에서 주인공 니나는 완벽함을 인정받기 위해 스스로를 학대하고 단련한다. 하지만 그녀를 움직이는 진짜 힘은 ‘더 이상 거절당하지 않기 위한’ 절박함이다. 그 절박함은 결국 자신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인정은 정점으로 가는 추진력이 되었지만, 거절에 대한 공포는 그녀를 무너뜨렸다. 이처럼 인정욕구와 거절 공포가 얽히면, 삶은 마치 줄 위를 걷는 곡예처럼 불안정해진다. 우리는 그 줄에서 떨어질까 봐 계속 긴장하고, 그 긴장 속에서 점점 진짜 나와 멀어져 간다.
한 20대 여성(가상의 인물)은 SNS에 올린 사진에 ‘좋아요’가 적으면 자존감이 무너진다고 말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게시물을 확인하고,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자신을 평가했다.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거절로 받아들이며 깊은 불안에 시달렸다. 또 다른 40대 남성(가상의 인물)은 상사의 한마디 눈총에도 과하게 위축되며 자신이 인정받지 못할까 봐 눈치를 봤다. 그는 말한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야 내가 괜찮은 사람 같아요.” 이들은 모두 인정에 굶주려 있었고, 동시에 거절에 대한 공포로 자신을 진짜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갖는다. 문제는 그 욕망이 거절에 대한 두려움과 엮일 때, 삶이 좁아진다는 것이다. 점점 더 안전한 선택만 하게 되고, 모험은 피하며, 자신의 의견이나 감정을 억누르게 된다. 결국, 인정받기 위해 만든 가면은 우리를 더 외롭게 만든다. “이 모습은 사랑받는 나일까? 아니면 사랑받기 위해 연기하는 나일까?” 우리는 그 경계에서 헤매게 된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아주 작은 연습이다. “거절당해도 괜찮다.” “인정받지 못한다고 내가 무가치한 건 아니다.” “거절은 내가 틀렸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의 선택일 뿐이다.” 이 말들이 처음엔 공허하게 느껴질 에서 조금씩 실험해 보는 순간 그 말들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서서히 나를 진짜 나답게 살게 만든다.
인정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지만, 안정은 내 안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누군가의 인정이 없어도 나는 나를 지킬 수 있다는 감각이 생길 때, 거절은 덜 아프고 인정은 덜 절박해진다. 그리고 그제서야 우리는 더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나로 존재하고 싶다.” “그게 좋아.” “그게 맞아.” 거절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에 매달리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성숙한 자유일 것이다.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 거절당할까 두렵다는 마음, 이 두 감정은 결국 같은 마음에서 나왔다.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려는 본능, 사랑받고 싶은 절실함, 그리고 외롭지 않기 위한 발버둥. 이 마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인간임을 말해준다. 이 감정의 뿌리를 미워하지 말자. 대신 그 뿌리를 조금 더 건강하게 뻗어나가게 할 수 있도록, 나 자신에게 더 솔직해지고, 더 따뜻해지자. 그러면 언젠가, 우리는 누군가의 인정 없이도 충분히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거울 앞에서 하루에 세 번씩 자신을 벌한다. “내 턱은 왜 이렇게 넓지?”, “이 옷은 키 큰 사람들한텐 예쁘던데…”, “아, 진짜 못생겼어. 나 같은 애를 누가 좋아하겠어…”
서울 마포의 작은 미용실에서 일하는 33세의 지민 씨(가상의 인물)는, SNS에 ‘쌍꺼풀 후기’를 찾아보는 데 하루 2시간을 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고등학교 시절 “못생겼다”는 한 남학생의 말이 아직도 밤마다 뇌 속에서 메아리친다. 지민 씨는 성형외과 상담을 받고 나오며 이렇게 말했다. “딱 한 번만 예쁘다는 말 듣고 싶어서요.” 그건 외모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괜찮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의 울음이었다.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한서진은 딸 예서를 위해 물불 안 가리고 달려간다. 상류층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서울대 입학은 사랑보다 중요하고, 가족은 프로젝트가 된다. 그녀가 진짜 두려워하는 건 ‘딸이 대학을 못 가는 것’이 아니다. “남들이 나를 무시할까 봐”이다. 한서진은 말한다. “우린 그런 사람들과는 달라. 우린 특별해야 해.” 하지만 시청자들은 안다.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믿어본 적이 없다.
토드 필립스 감독의 영화 <조커>에서 아서 플렉은 “누구도 자신을 제대로 봐준 적이 없다”고 느낀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이 남자는 마침내 웃는 가면을 쓴 채, 비명을 웃음으로 바꾸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그는 세상에 외친다. “내가 존재한다는 걸 보여줘야겠어. 그래야 네가 나를 봐줄 테니까.” 열등감은 존재 확인을 위한 마지막 무기처럼 쓰이기도 한다.
28살의 성준씨(가상의 인물)는 늘 이렇게 말했다. “제가 고졸이라서요…” 직장에서, 연애에서, 심지어 자기소개서에서도 그는 자기 인생의 모든 문장을 ‘나는 열등한 사람’이라는 부사로 꾸몄다. 하지만 그는 똑똑했고, 누구보다 상대를 잘 배려했고,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노력도 멈춘 적이 없었다. 그가 울면서 내게 말한 적이 있다. “근데요… 그래도 대학 안 나온 게 계속 저를 깎아먹어요.” 그 말 뒤엔 이런 문장이 숨어 있었다. “나는 내가 괜찮은 사람인지, 아직 확신이 없어요.”
우리는 모두 조금씩 열등하다. 열등한 게 아니라, 열등감을 ‘느끼는’ 존재다. 누군가는 친구의 결혼식에서 “나는 왜 아직 혼자일까” 하고 속삭인다. 누군가는 인스타그램 속 ‘핫플 데이트’ 사진을 보고 “나는 저런 연애 못해봤지…” 하고 고개를 돌린다. 그때 그 말은 누구에게 하는 걸까? 세상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다. “넌 그 정도야.”
그런데 말입니다. 열등감은 꼭 없애야 할까요?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기쁨이 슬픔을 자꾸 밀어내려 하다가, 마침내 깨닫게 되는 장면이 있다. “아, 슬픔이 있었기에 공감이 가능했구나.” 열등감도 그렇다. 그 감정이 없었다면, 우린 이렇게 열심히 살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잘하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 사랑받고 싶은 간절함. 그 모든 것의 뿌리에는 열등감이 있다.
그래서 이제,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나 왜 이렇게 못났지”, “나는 왜 쟤보다 안 돼?”, “나 같은 사람이 뭘 해…” 그 말이 올라올 때, 그 말과 잠깐만 거리를 둬보자. 그리고 조용히 이렇게 말해보자. “그래, 나 지금 좀 초라해. 하지만 이건 그냥 ‘느낌’일 뿐이야. 그 느낌이 ‘진짜 나’는 아니야.” 열등감은 없애야 하는 게 아니라, 다뤄야 하는 감정이다. 우린 비교 속에서 상처받지만, 그 비교 속에서도 스스로를 안아줄 수 있다면, 그건 어쩌면 진짜 성숙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거울 앞에 선 당신, 조금 초라하고, 조금 서운하고, 조금 아플지라도 그 감정이 당신을 망치진 않을 거다. 그건 당신이 사람이라는 증거니까. 그리고 열등감이 있다는 건, 당신이 더 나은 무언가를 꿈꾸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엄마는 너만큼 기회가 없었어. 네가 잘해야지.” 그 말은 격려였을까, 강요였을까. 한 아이는 수학학원에 다녀와서 현관 앞에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눈물을 터뜨렸다. “나도 잘하고 싶어. 근데 너무 무서워.” 아이가 말하는 ‘무서움’ 속엔 시험지가 아니라, 부모의 눈빛이 들어 있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압박. 응원이라는 말 뒤에 숨어 있는 불안. 그것이 아이를 조용히, 천천히, 그러나 깊이 병들게 한다.
열등감은 부모로부터 유전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염된다. 부모가 가진 상처, 비교당했던 기억, 인정받지 못한 한, 스스로에 대한 불신이 모든 감정은 아이를 향해 번져간다. 아이는 말보다 훨씬 민감하게 부모의 ‘감정의 결’을 읽는다. 엄마가 “괜찮아, 네가 최고야”라고 말해도, 그 눈빛에 “안 괜찮아, 넌 부족해”가 담겨 있으면, 아이는 그 모순을 감지한다. 아이는 어른이 내뱉는 말보다 어른이 숨기는 감정을 믿는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기정은 엄마에게 “왜 우리 집은 이래?”라고 묻는다. 엄마는 한숨을 쉬며 말한다. “너도 애 키워봐라. 그렇게 안 살고 싶었어.” 그 말 속엔 억울함도 있고, 체념도 있고, 그리고 자신이 된 자신에 대한 슬픔도 있다. 염기정은 어머니를 원망하면서도, 점점 어머니를 닮아간다. 그녀는 늘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친다. “나는 이런 식으로 살고 싶지 않아. 하지만 딱히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어.” 그 혼란의 감정이 바로, ‘물려받은 열등감’이다.
한 청년이 있었다. 명문대를 나왔고, 대기업에 다니고, 외모도 준수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늘 말끝에 “제가 좀 부족해서요”라고 덧붙였다. 어느 날 그는 말했다. “엄마는 늘 날 자랑했어요. 그런데... 그 자랑 속에 어떤 초조함이 있었어요. 마치 내가 잘해야만 우리 가족의 존재가 보상받는 느낌이었달까.” 그 초조함이, 자랑이 아니라 짐이 되었다. 부모가 자식에게 자기 인생을 투영하면, 아이는 자기가 아니라 부모의 열등감을 사는 대리인이 된다.
부모는 아이에게 말한다. “엄마는 너 잘되길 바랄 뿐이야.” 그런데 그 말이 반복될수록, 아이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잘된 나’만이 사랑받는 존재라고 믿게 된다. 실패한 나, 느린 나, 실수하는 나는 이 가족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생각. 그것이 곧 ‘나는 원래 부족한 아이’라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열등감은 마음속 깊은 곳에 깃든다. 그리고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왜 나는 늘 뭔가 불안하지?”, “왜 나는 항상 남들과 비교하지?”, “왜 나는 실패하면 끝장날 것 같지?”
하지만 아이는 모른다. 그 감정이 사실은 엄마의 것이었다는 걸. 아빠의 것이었다는 걸. 그들은 자식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때때로 상처 입은 감정의 배달자였다.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 채 억눌러왔던 부모의 열등감은, “너만큼은 행복하길 바란다”는 말 아래, 아이의 자존감에 뿌리처럼 엉겨붙는다.
영화 <마미>에서 엄마 디앤은 아들을 향해 모든 삶을 걸지만, 동시에 숨이 막힌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을 쏟지만, 그 감정엔 분노와 좌절이 섞여 있다. 디앤은 아들을 끌어안고 외친다. “우린 이 세상에서 서로밖에 없어.” 그 장면은 슬프고, 아름답고, 파괴적이다. 사랑은 열등감 위에서도 피어나지만, 그 뿌리는 결코 건강하지 않다.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너는 지금 이대로 괜찮아”라는 메시지다. 잘하지 않아도, 똑똑하지 않아도, 느려도, 서툴러도 그저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한다는 확신. 부모가 자기 자신의 열등감을 마주하고, 스스로를 용서하고, 치유해 나갈 때, 아이는 그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부모의 내면이 평화로워야, 아이의 마음도 숨쉴 수 있다.
한 엄마가 말했다. “나는 내가 부족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우리 아이한텐 절대 그런 말 안 하려고 했어요.” 나는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혹시, 그 말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하고 계신가요?” 그녀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물 속에서 나는 봤다. 그 엄마가 딸에게서 지우고 싶어했던, 자신 속 깊이 자리한 열등감의 흔적을.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부모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고, 물려주지 않으려는 노력을 시작할 때, 그 상처는 대물림이 아니라 멈춤이 된다. 그것이 아이를 살리는 첫 걸음이다.
“엄마, 나 이거 잘했지?” 아이는 손에 쥔 색종이를 들고 아빠를 바라본다. 아빠는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응, 잘했네”라고 대꾸한다. 아이는 잠깐 멈칫하더니 조용히 말한다. “근데 진짜로 잘한 거야?” 그 말은 단순한 확인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진짜로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 가장 원초적인 감정의 출발이었다.
열등감은 실패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다. 누군가에게 비교당하거나 꾸중을 들어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열등감은 훨씬 더 이르고, 훨씬 더 조용하게, 우리 마음의 안쪽에서 자라기 시작한다. 그 시작은 ‘사랑받기 위해 잘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믿음은 대부분, 어린 시절의 부모의 시선에서 비롯된다.
가상의 인물 ‘연우’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눈치를 많이 봤다. 공부를 잘하면 엄마가 기분이 좋아졌고, 못하면 냉랭해졌다. 그녀는 시험 성적보다 엄마의 얼굴 표정을 더 민감하게 살폈다. 성인이 된 연우는 늘 완벽하려 애쓴다. 발표 전날엔 밤을 새고, SNS에 글을 올릴 땐 열 번을 고친다. 사람들과 있을 때 웃음을 잃지 않지만, 속으론 늘 불안하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나는 늘 조금 부족한 사람 같아…”
영화 <블랙스완>의 니나는 발레리나로 완벽을 추구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니나의 경력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했고, 딸의 성취를 자기 보상처럼 여긴다. 니나는 혼자 있는 순간에도 스스로를 다그치고 벌한다. 그녀는 더 잘해야 사랑받는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병이 되고, 환상이 되고, 파괴로 이어진다. 그녀의 열등감은 실패해서 생긴 게 아니었다. 사랑을 보장받기 위해 만들어진 감정이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지안은 “살아남는 것” 외에 다른 삶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 그는 누군가를 믿지 못하고, 자신도 사랑하지 못한다. 열등감은 고개를 숙이거나 자책하는 방식으로만 드러나지 않는다. 때로는 무표정과 단절로, 감정을 차단한 채로 나타난다. 세상이 나를 싫어할까 봐, 먼저 세상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점엔 언제나 있다. “나는 원래 부족한 존재야”라는 믿음.
열등감이 시작되는 시점은, 아이가 조건 없는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을 때다. 잘해서 예쁨받는 것, 착해서 칭찬받는 것, 말 잘 들어서 사랑받는 것.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내가 있는 그대로는 부족한 존재구나”라고 느낀다. 물론 부모는 말한다. “나는 너를 그냥 사랑해.” 하지만 아이는 말보다 훨씬 예민하게 표정과 분위기, 감정의 톤을 읽는다.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망한 표정을 지을 때. 안아주면서도 한숨을 쉬었을 때. 아이는 그 어른의 모순된 감정 사이에서 자기 존재를 의심하게 된다.
열등감은 아이 안에서 그렇게 시작된다.
말없이, 설명 없이.
그리고 평생을 따라다닌다.
스스로를 의심하게 하고, 비교하게 만들고, 자신을 작게 느끼게 만든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관계 속에서 터져 나온다.
“나는 왜 늘 이런 기분이 들지?”
“나는 왜 사랑받기 힘든 사람 같지?”
“나는 왜 실패하면 모든 걸 잃을 것처럼 느끼지?”
그 감정의 뿌리를 따라 올라가면, 늘 같은 장면에 닿는다.
아빠가 바쁘다는 이유로 나를 한 번도 눈 마주쳐주지 않았던 저녁 식탁.
엄마가 “이게 뭐야, 다른 애들은 잘만 하는데”라고 말했던 성적표.
친척들 앞에서 나를 비교하던 명절의 기억.
그리고 그 기억들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조용히 마음속으로 외치던 그 말.
“나도 괜찮은 사람인데…”
열등감은 성인이 되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우리가 ‘사랑의 조건’을 처음 배운 순간부터 내 안에 잠복해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감정을 멈추고 싶다면,
그 시작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무너졌던 그 순간을 기억하고,
그때의 나를 다시 안아줘야 한다.
“그때 넌 괜찮았어. 잘못한 게 아니었어.”
그리고 이젠 말해줘야 한다.
“지금의 나도, 있는 그대로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