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는 자주 울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였을까.
울음을 삼키는 게 익숙해졌다.
“울면 더 혼나.”
“참는 게 어른이야.”
그 말들을 들은 뒤부터,
나는 울고 싶을 때마다
목구멍에서 울음을 거둬들였다.
그건 분명히 슬펐던 순간이었는데,
그건 분명히 속상했던 기억이었는데,
나는 그때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까.
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했을까.
감정을 느끼는 것과
그 감정을 말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라는 걸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속상한데도
“괜찮아요.”
억울한데도
“아니에요.”
울고 싶은데도
“그냥 좀 피곤해서요.”
이렇게 내 마음을 스스로 무시하고
외면하고 억누르며
수많은 감정들을
‘말하지 않고 지나쳐왔다.’
그러다 어느 날,
아주 사소한 말 한마디에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그 정도 일로 왜 울어?”라고 했지만,
나조차 알 수 없던 그 눈물 속엔
몇 년, 몇십 년 동안 쌓이고도
한 번도 말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이제야 조금 알겠다.
그때 나는 울고 싶었다.
울어야 했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나는
울고 싶다고 말할 줄 몰랐다.
그 말을 배운 적이 없었으니까.
지금도 아직은 서툴지만,
나는 조금씩 연습해본다.
“그땐 속상했어.”
“마음이 아팠어.”
“울고 싶었어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때,
나는 내 마음과 다시 연결된다.
그리고 그 연결이
나를 회복시킨다.
감정은 말해져야만 이해받을 수 있고,
이해받을 때 비로소
우리 안에서 정리된다.
그러니 지금의 당신도
울고 싶다고 말해도 된다.
늦지 않았다.
그건 분명,
자기 자신을 지키는 가장 용기 있는 말이니까.
“착하다”는 말이 칭찬이 아닐 때가 있다.
어릴 적부터 사람들의 기대에 맞춰 행동해온 이들은,
그 ‘착함’이 어느 순간 자신을 조이는 족쇄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싫다’고 말하지 못하고, ‘도와달라’고 말하지 못하고,
‘이건 내 몫이 아니다’라고 외치고 싶어도 끝내 참아낸다.
그렇게 어른이 되었고, 좋은 사람이라 불리지만
정작 자기 마음은 점점 사라진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저는 그냥... 다 괜찮다고 말해요. 힘들다는 말조차, 누가 듣기 싫을까 봐요.”
그러면서 어느 날 무너진다.
억눌렀던 감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착하다는 말,
그 안에는 참는 법을 배운 아이의 흔적이 숨어 있다.
거절하면 미움을 받을까 두렵고,
자기 욕구를 드러내면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일까 걱정한다.
하지만 감정은 억압이 아니라 표현을 통해 정화된다.
“이건 싫어요.”
“저도 도와주세요.”
“지금 제 마음은 이렇습니다.”
이 한마디를 꺼내기까지의 용기,
그게 곧 치유의 시작이다.
착한 사람이 무너지는 이유는
그들이 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오래 참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해도 괜찮다는 걸 배워야 한다.
감정을 표현하는 일은 이기적인 게 아니라,
진짜 나를 지키는 행위임을 기억하자.
정서적 회복은,
‘착한 사람’이라는 굴레를 벗고
‘진짜 나’로 말하는 연습에서 시작된다.
사랑받고 싶었다.
그래서 참았다.
화가 나도 웃었다.
서운해도 괜찮은 척했다.
속으로는 울고 있는데,
겉으로는 "괜찮아, 나 이해해"라고 말했다.
나는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감정을 버렸다.
그리고 그게 ‘착한 사람’의 방식이라고 믿었다.
어릴 적부터 주변의 눈치를 보며 자랐다.
누군가 나를 싫어할까 봐 조심했고,
눈물을 보이면 약하다고 생각할까 봐 삼켰다.
화내면 버림받을까 봐 꾹꾹 눌렀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의 진짜 감정이 뭔지조차 모르게 되었다.
내가 지금 화가 난 건지, 슬픈 건지, 외로운 건지.
그저 모든 감정이 뒤섞여 “무감정”처럼 굳어버렸다.
상담을 하다 보면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그땐 울 수도, 화낼 수도 없었어요.”
“차라리 아무 감정도 없는 게 편했어요.”
그 말이 너무 익숙하다.
왜냐면, 나도 그랬으니까.
감정을 숨기고 억누르는 삶은
언뜻 보면 평온하고 성숙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 안에서 나 자신을 잃어가는 과정이다.
‘감정을 버리면 사랑받을 수 있다’는 믿음은 착각이었다.
진짜 사랑은, 감정을 말할 수 있을 때 시작된다.
상대가 나의 속마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관계 안에서 살아 숨 쉬게 된다.
나는 이제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착한 사람’이 아니라
‘진짜 나’로 살아가는 연습을.
나를 버리지 않고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내가 되자.
사랑받기 위해 참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받아도 되는 나로 살아가자.”
사랑을 주고 싶었다. 그런데 방법을 몰랐다.
어릴 적부터 감정을 표현하면 혼났다.
“남자애가 왜 울어?”
“그 정도는 참아야지.”
“기분 나빠도 티 내지 마.”
그런 말들 속에서 나는 내 마음을 닫아버렸다.
슬프다는 말 대신 조용해졌고, 화가 난다는 말 대신 침묵했고, 두렵다는 말 대신 웃었다.
그렇게 자란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면서도,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사랑을 표현하려면 먼저 감정을 느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내가 지금 기쁜 건지, 외로운 건지, 두려운 건지조차 잘 모르겠다.
감정의 이름을 몰랐다.
아니, 감정에 이름 붙이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래서 누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도 어색했고,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어도 표현이 서툴렀다.
나는 지금도 때때로 감정을 느끼는 게 두렵다.
감정을 느끼면, 말하게 되고 말하면, 실망시킬까 봐 걱정되고 상대가 떠날까 봐 겁이 난다.
그래서 감정을 애써 덮어버린다.
그러면 마음은 편해진다.
하지만 동시에, 관계는 얕아진다.
나는 이제 알게 되었다.
사랑은 감정 위에 세워진다는 것을.
감정 없는 사랑은, 공허하다.
좋아하면 좋다고 말해야 하고, 속상하면 속상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은 기술이 아니라, 감정을 나눌 수 있을 때 비로소 자라난다.
지금도 여전히 서툴다.
하지만 이제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 나를 더 진짜로 만들어준다는 걸 안다.
나는 감정을 배워가고 있다. 그리고, 사랑도.
나는 늘 눈치로 살았던 것 같다..
어릴 적부터 집안의 분위기를 먼저 읽었다.
아버지의 발소리만 들어도 오늘 집안의 공기가 어떤지 알 수 있었고,
엄마의 한숨 소리만으로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빨리 눈치챘다.
나는 늘 누군가의 기분을 먼저 살피고, 그 기분에 맞춰 나를 조절하며 살아왔다.
화를 내면 안 되는 아이, 투정 부리면 안 되는 아이, 말없이 참는 아이, 늘 괜찮다고 말하는 아이였다.
누군가는 그런 나를 예의 바르고 착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마냥 따뜻하게 들리지 않았다.
누가 나에게 착하다고 하면 날 바보로 보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착한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었다.
어른들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나는 관계 안에서도 나를 드러내기보다, 늘 조심스럽게 존재를 숨겼다.
심지어 내가 사라지면, 갈등도, 불편함도 생기지 않을 것 같았고 모두가 편할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같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점점 작아졌고, 내 마음의 소리도 함께 작아졌다.
사람들은 나를 편한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이 아팠다.
편한 사람이 아니라,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 되어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내가 원하는 건 누군가의 기분에 맞추는 삶이 아니라, 내 감정을 존중받는 삶이었다는 걸.
그 깨달음은 아프고도 따뜻했다.
내 안의 지하창고에 혼자 남겨둔 아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나도 여기에 있어. 나도 느끼고 있어."
이제 나는, 조금씩이라도 내 감정을 표현하려고 한다.
무섭고 낯설고 어색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를 꺼내본다.
눈치 보며 살아온 내가, 이제는 나를 위한 관계를 꿈꾸기 시작했다.
진짜 나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이 내 방식이었다.
어디서든 눈치로 살아남았고, 분위기를 먼저 읽었고, 사람들의 표정에서 그들에게 내가 책임져야 할 내 몫의 감정을 가늠했다.
어릴 적 나는 아프다는 말을 쉽게 하지 못했다.
누군가 나를 돌봐줄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던 나는, 자주 '나는 괜찮아'라고 나를 속이며 가면을 썼다.
내가 솔직하게 감정을 꺼내면, 그게 오히려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참고, 눌렀고, 결국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불편해졌다.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헷갈릴 만큼, 나는 감정에 둔감해져 갔다.
나아가 감정이 단단하게 굳어서 화석화되어갔다.
그런 나에게 '회복'이라는 단어는 언젠가부터 너무 멀게 느껴졌다.
감정을 이야기하면 무너질 것 같았고, 그 무너짐을 누가 받아줄 수 있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느끼지 않는 이상, 진짜로 회복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감정을 느끼는 연습부터 시작했다.
내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관찰하였다.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에 이름 붙이기 시작했다.
'나, 속상해.' '나, 외로워.' '나, 무서웠어.'
느꺼지는 감정을 입 밖으로 표변하기 시작했다.
이 짧은 문장들이 입 밖으로 나올 때마다 어딘가에서 얼어붙었던 내가 조금씩 녹아내렸다.
돌이켜보면, 감정을 표현한다는 건, 나를 세상에 연결시키는 첫 걸음이었다.
내가 나를 이해하고, 그 이해를 누군가와 나누는 순간, 그제야 마음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여전히 나는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제는 감정을 말하는 것이 두렵지 않다.
누군가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 줄 때, 그 따뜻한 눈빛에 나는 조금 더 나 자신을 받아들인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나는 어릴 때부터 눈치가 빨랐다.
엄마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아빠가 몇 초간 침묵하는지, 누나가 방문을 세게 닫고 들어갔을 때 그 소리가 무슨 뜻인지를, 나는 금세 알아차렸다.
어쩌면 그건 살아남기 위해 배운 생존 언어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조심조심 살아오다 보니, 내 감정이 뭔지는 자꾸만 모르게 되었다.
남들이 원하는 말을 먼저 하고, 분위기에 맞는 얼굴을 하고, 마음속에서는 벌써 지쳐 있었는데도 괜찮다고 웃었다.
그게 사람들과 잘 지내는 길이라고, 나를 아끼는 방법이라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점점 더 숨이 차올랐다.
누구에게도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내보일 수 없다는 감각은, 숨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날들 속에서 조용한 고통이 되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거울을 보지 않게 되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희미해졌다.
그때는 뭔가... 잘 모르겠다 싶었지만.
그러다 문득, 아주 사소한 순간이었다.
지하철 3호선 안에서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고, 엄마가 아이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괜찮아, 울어도 돼. 엄마는 네 마음 다 알아."
그 엄마가 아이에게 ‘울지 마’가 아니라 ‘울어도 돼’라고 했다는 게 이상하게 찡했다.
그날 이후 나는 내 마음에게 처음 말을 걸었다.
"괜찮아, 울어도 돼. 나도 내 마음을 알아줄게."
조금 어색했지만, 그건 아주 오래 기다려온 말이었다.
마음이 숨을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일.
그게 어른이 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지금, 내 안의 아이에게 조금씩 숨 쉬는 법을 가르쳐주는 중이다.
나도 이제 나를 아껴야 하니까.
"그땐 어쩔 수 없었어요. 그냥, 참는게 익숙했거든요."
이 말을 꺼내던 내담자의 눈빛은, 아주 오래전부터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다 몇 번이나 멈추고, 입술을 꾹 다무는 그 순간들 속에서 나는 느꼈다.
그가 삼켜온 감정은 단지 분노나 슬픔이 아니라, ‘느껴도 괜찮다’는 허락을 받지 못한 삶의 흔적이었다는 걸.
감정을 억누른 채 살아온 사람들은 처음엔 자신이 억누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그저 자신은 ‘마음이 강한 사람’이라고, ‘예민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상담실에서 조금씩 시간이 쌓이고, 안전하다는 감각이 자리를 잡으면 서서히 그들은 자신의 말이 무언가 어색하다는 걸 알기 시작한다.
그런 분들에게 나는 종종 묻는다.
“어릴 때, 슬프다고 말해본 적 있으세요?”
그러면 잠깐 정적이 흐른다.
그리고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그런 걸 말해도 되는지 몰랐어요.”
감정 억압이라는 건 단지 감정을 숨긴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건 차라리 무감각에 가깝다.
느끼지 않기로 결정한 채, 수십 년을 살아온 사람들.
마음 한구석에서 어떤 감정이 올라오면, 자동적으로 눌러버리는 내면의 시스템.
그건 너무 오랜 시간 훈련된 반사신경이라,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다.
얄궂게도, 감정을 억압하는 사람들은 ‘잘 살아간다’는 인정을 받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기능을 잘하고, 책임감 있고, 무던하고, 충돌이 적으니까.
그런데 정작 그들은 말한다.
“이상하게, 혼자 있을 때 숨이 턱 막혀요.”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눈물이 나요.”
이야기 속에는 늘 오래된 말들이 숨어 있다.
‘남자애가 울긴 왜 울어’
‘너 때문에 엄마가 힘들잖아’
‘그 정도는 참아야지’
이런 말들은 어린아이의 마음속에 하나의 명령이 된다.
그리고 그 명령은 자라면서도 수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간다.
눈치가 빠르고, 분위기를 잘 맞추고, 실수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으로 자란다.
하지만 내면 어딘가에서는 늘 뭔가가 쌓인다.
말하지 못한 감정, 느끼지 못한 슬픔, 표현되지 못한 분노.
나는 상담실에서 이런 말을 종종 듣는다.
“선생님, 사실 잘 모르겠어요. 제가 뭐 느끼는지.”
이 말이 나온다는 건, 마음이 드디어 감각을 되찾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그건 단순히 감정 표현의 문제가 아니다.
존재 전체를 다시 느끼는 첫걸음이다.
감정을 억압해온 삶은, 효율적이지만 살아있다는 감각이 사라진다.
감정은 때때로 귀찮고, 불편하고, 관계를 어지럽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묻는다.
“지금, 마음이 조금이라도 움직였나요?”
“그냥 그런 상황이 너무 싫어요. 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숨이 막히는 느낌이거든요.”
내담자 H씨는 그렇게 말했다.
처음엔 단순히 낯가림이 심한 성격인가 했지만, 몇 차례 대화를 거치며 보인 건 회피의 구조적 패턴이었다.
그러니까, 피하고 싶어서 피하는 게 아니라
그 상황에 감정적으로 머물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 감정을 마주하는 게 너무 낯설고, 너무 두렵고, 너무 익숙하지 않아서
도망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H씨는 어릴 적, 눈물을 보이면 “울면 약한 거야”라고 말하던 아버지와,
조용히 등을 돌리던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감정을 꺼내보는 훈련이 없었다.
슬퍼도 조용해야 했고, 억울해도 말하지 말아야 했다.
“그래봤자 뭐가 달라지는데?”라는 무력감도,
“말하면 더 혼나니까”라는 두려움도,
결국 감정을 꺼내는 걸 ‘불편한 일’로 각인시켰다.
그래서 회피하는 거다.
그래서 말하지 않는 거다.
그게 익숙하고 안전해 보여서.
회피는 종종 비난의 대상이 된다.
“도망가지 마”, “직면해야 해”, “왜 진심을 피하니”
하지만 회피는 의지의 문제가 아닌 경우가 더 많다.
회피는 감정 경험에 대한 ‘결핍’이 만든 정서 반응이다.
감정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감정을 마주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마주치는 상황을 앞에 두고 얼어버릴 수밖에 없다.
“그때는 그냥 그런 줄 알았어요.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고…”
많은 내담자들이 그렇게 말한다.
지금 돌아보면 회피였고, 억압이었고, 외면이었는데
그땐 그게 생존이었다고.
그래서 상담심리학자로서 묻는다.
회피는 정말 피하고 싶은 마음일까?
아니면 감정을 마주한 적 없던 사람의 ‘익숙한 생존 방식’일까?
감정은 마주한 만큼만 다룰 수 있다.
도망쳤던 기억도, 피해버렸던 말들도
다시 돌아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 연습이 조금씩 쌓이면,
언젠가는 회피 말고 표현이라는 길이 열린다.
그 길은 처음엔 낯설지만,
걸어갈수록 편안해진다.
피하지 않는다고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고
회피한다고 해서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왜 그런 방식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그 기원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조를 바꿔볼 수 있는 용기를 조금씩 쌓아가는 것.
그것이 회복의 시작이다.
“그때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몇 해 전, 누군가 내게 그렇게 물었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왜 그랬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그게 맞는 줄 알았다.
참는 게 옳은 일이라고,
말하면 상황이 더 나빠질 거라고 믿었다.
그건 오래된 내 습관이자,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었다.
어릴 적부터 나는 눈치를 많이 보며 자랐다.
속상하거나 억울한 일이 있어도
“너까지 그러면 엄마는 어떡하니?”
라는 말을 듣고는,
자꾸만 내 감정을 숨기게 됐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내가 느낀 감정이
틀린 것처럼 느껴졌고,
표현하는 내가 이기적인 사람 같았다.
그래서 조용히 참는 법을 배웠다.
화가 나도, 서운해도, 외로워도
그걸 꾹 눌러 담고는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그게 나름의 해결법이었다.
사랑받기 위해,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
참는 걸 선택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 안 어딘가에 고여 있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울컥, 하고 올라왔다.
그리고 스스로도 놀랄 만큼
격하게 반응하게 되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그제야 조금씩 깨달았다.
참는 게 항상 옳은 건 아니란 걸.
참는다고 해서 감정이 없던 게 되진 않는다는 걸.
그저 내 안에 눌린 채 쌓여 있다가
어느 날 더 큰 무게로 돌아올 뿐이라는 걸.
무엇보다 무서운 건
나는 여전히 내가 참는 걸
'잘하는 일'이라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좋은 사람이고 싶었고,
갈등을 피하고 싶었고,
사랑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 바람 때문에
나는 자꾸만 나를 잃어갔다.
그래서 연습을 시작했다.
“나 지금 조금 속상해.”
“그 말에 마음이 좀 아파.”
작은 문장부터 꺼내는 연습.
처음엔 어색했고,
괜히 미안해졌고,
어쩌면 후회도 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표현하고 나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서투른 말 한마디가
그동안 눌러뒀던 나를
조금씩 되찾게 해주었다.
이제 나는 안다.
참는 것도, 말하는 것도
모두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참는 것이 항상 성숙함의 증거는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 말해주었다.
“참는 것도 필요하지만, 네 감정도 중요해.”
그 말이 내게는 깊은 위로가 되었다.
오늘도 나는 내 안의 조용한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속삭인다.
“괜찮아, 이젠 말해도 돼.”
어릴 적부터 나는 자주 혼란스러웠다.
내가 뭘 느끼고 있는지, 그걸 말해도 되는 건지.
“그 정도는 참아야지.”
“그런 건 별일도 아니잖아.”
그런 말들 속에서 나는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 조용함은 습관이 되었다.
속상했지만 웃었고,
아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했고,
마음이 무너져도 그냥 넘겼다.
감정을 표현하려다가 거절당했던 기억은
그 감정보다 더 아프게 오래 남는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그때 표현되지 못한 그 감정들은
지금 어디쯤 머물고 있을까.
정리되지 못한 감정은
우리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형태만 바꿔 남는다.
어떤 감정은 무기력으로,
어떤 감정은 분노로,
또 어떤 감정은 관계를 피하는 방식으로 스며든다.
“왜 이렇게 쉽게 지치지?”
“왜 이렇게 별일도 아닌데 눈물이 날까?”
그건 지금의 일이 아니라,
오래전 말하지 못한 감정이
아직도 우리 안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감정을 마음의 지하창고 안에 억압된 감정이라고 부른다.
빛이 닿지 않는 곳.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공간에 눌려 있는 감정.
그러면서 반드시 귀환하는 감정
그 방 안에는
어릴 적 울고 싶었지만 참았던 내가 있고,
도움이 필요했지만 미안해서 말하지 못했던 내가 있다.
우리는 자주 묻는다.
“이제 와서 그 얘기를 꺼내도 될까?”
“그땐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지금 말하면 이상하지 않을까?”
하지만 감정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표현되지 않은 마음은,
오래될수록 더욱 절절해진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괜찮다.
그때 말하지 못했던 그 감정,
이제 말해도 된다.
“그땐 너무 속상했어요.”
“그 말이, 아직도 가끔 생각나요.”
“그때 정말 외로웠어요.”
그 한마디가
마음 속 지하창고를 천천히 열고,
닫혀 있던 지상과 연결된 창문을 조금씩 밀어낸다.
그리고 그 틈으로
빛이 들어온다.
바람이 스친다.
숨이 트인다.
이해받지 못한 감정은
그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아니 내가 나를 이해해주기를.
어릴 때부터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말을 아끼는 게 미덕이라 배운 것도 있었고, 말을 꺼냈을 때 “그런 걸 왜 이제 와서 말하냐”는 반응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래서 자주 삼켰다. 그냥. 꿀꺽.
말을 안 하는 게 편할 때도 있다.
괜히 말 꺼냈다가 분위기 어색해지고, 그럴 거면 그냥 참는 게 낫겠다 싶을 때.
그래서 그땐 말 안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 “괜찮아”라고 했다.
근데 진짜 괜찮았던 적은 별로 없었다.
말이 늦어지는 이유는 단순히 ‘용기 부족’ 때문만은 아니다.
말할 기회를 놓친 채 시간이 흘러버리면, 그 마음이 좀 이상해진다.
마치 어제 상한 우유처럼, 표현하려고 해도 입이 떨린다.
“이제 와서 말해도 될까?”
“그때 했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들이 앞을 막는다.
그래서 결국 그 마음은 마음 안에서만 돈다.
겉으론 멀쩡한데, 속에서는 자꾸 그 장면이 재생된다.
그때 그 사람 얼굴, 내 표정, 삼켰던 말.
그게 밤이면 문득 떠오른다.
샤워할 때, 버스 안에서 멍 때릴 때, 이상하게 그런 틈에 끼어든다.
그리고 스스로한테 묻는다.
“너 왜 그땐 말 안 했어?”
사실 그때 말하고 싶었던 건 거창한 게 아니었다.
“그 말, 좀 서운했어.”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했는데…”
혹은 그냥 “나 지금 힘들어.”
이렇게 간단한 말이었는데.
말하지 않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형태만 바꾼 채 마음에 남는다.
어떤 건 서운함으로, 어떤 건 무력감으로, 어떤 건 사람에 대한 불신으로 바뀐다.
그리고 다음 관계로, 다음 감정으로 옮겨간다.
“괜히 또 말했다가 상처받을까 봐…”
그렇게 다시 닫는다.
입을, 마음을, 표정을.
그러다 보면, 말 못 한 감정들이 마음 안에 층층이 쌓인다.
언젠가는 쏟아질지도 모른다.
근데 정작 쏟아질 땐, 지금 상황이 아니라 오래전 일이 원인일 때도 있다.
“아 그때 그 말… 사실 아직도 기억나.”
그런 식으로.
이제는 알겠다.
말이 늦더라도, 언젠가 꺼내야 한다는 걸.
조심스럽게라도, 마음속 어딘가에 갇혀 있는 그 말을 꺼내야 한다는 걸.
지금이라도 괜찮다.
그때 말하지 못한 마음, 지금 말해도 된다.
사람은 어차피 다 늦는다.
하지만 늦게 말하는 게, 아예 묻어두는 것보단 낫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괜찮다.
그때 말 못한 그 마음, 이제 말해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