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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외면한 감정은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잊고 싶었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땐 너무 벅찼고,

지금 꺼내면 무너질 것 같아서

나는 조용히 밀어두었다.


“지금 말하면 안 돼.”

“그냥 넘어가자.”

“괜찮아질 거야.”


스스로를 그렇게 설득하며

나는 천천히

내 마음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 일 없는 듯한 어느 날,

그 낯익은 마음이

문득 다시 찾아왔다.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지워졌다고 믿었는데

그 마음은

내 안 어딘가에서

조용히, 아주 조용히

살아 있었다.


노래 한 소절에,

누군가의 말투에,

비 오는 저녁 창가에서

그 마음은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떠났다고 믿었던 그것이,

사실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그 마음을 외면했다.

그건 방치가 아니라

그때의 나로선 최선이었다.


말하면 더 아플 것 같아서,

꺼내면 감당할 수 없을까 봐

나는 애써 모른 척한 채

지나왔다.


하지만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모른 척하는 동안에도

조용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무르기 위해서.


말 없는 친구처럼,

말을 꺼내기 전에 이미

내 표정을 알아채는 누군가처럼

그 마음은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와서 돌아와도 괜찮다고.

지금이라도 괜찮다고.

속삭이듯 말하는 듯했다.


그 마음을 다시 들여다봤을 때

나는 나를

조금 더 다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땐 정말 버거웠구나.”

“말하지 못한 것만으로도

얼마나 외로웠을까.”

“지금까지도

그 자리에서 기다려줘서 고마워.”


지금에 와서야

나는 조금씩 안다.

마음은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찾아오는 게 아니라,

우리를 잊지 않기 위해

조용히 기다리는 존재라는 걸.


그건 때로 사람과도

참 많이 닮아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순간들.

멀어졌지만 여전히 연결되어 있는 감정들.

다시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은 자리들.


그리고 그 마음은

지금도

조용히 거기 앉아 있다.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포기하지 않은 채로.






"이 글은 상담심리학자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동행하며

그들의 감정 여정을 상징적으로 재구성한 가상의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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