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된 감정은 반드시 귀환한다


어릴 때 나는 화를 잘 못 냈다.

아니, 사실은 낼 줄 몰랐다.


누가 밥을 먼저 먹어도,

내 물건을 허락 없이 가져가도,

그냥 참는 게 ‘착한 아이’라고 배웠다.


그래서 그런가.

나는 나중에도 어떤 감정이 생기면

그걸 꼭꼭 눌러 담는 습관이 생겼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에서는 온갖 말들이 웅크리고 있었다.

"진짜 왜 저래?"

"말은 왜 그렇게 해?"

"나 지금 무시당한 거 맞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사라진 줄 알았지.

그때는.


나는 한동안 그게 ‘감정조절’이라고 생각했다.

분노도 삼키고, 슬픔도 무시하고,

서운함은 ‘별일 아니야’라고 스스로 타이르면서.


근데 그게 아니었다.


30대 중반쯤, 갑자기 사람들과 관계가 버거워졌다.

친구의 농담에도 욱하고,

회사에서 회의 중에 쓸데없이 눈물이 날 뻔했고.

심지어 별일 아닌데도 잠이 안 오는 날이 많아졌다.


“그거 억눌렀던 감정 때문일 수도 있어요.”


상담실에서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을 때,

처음엔 ‘설마’ 했다.

나는 참는 게 익숙한 사람이었고,

그게 나쁘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으니까.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수십 번, 감정을 무시한 끝에

몸이 먼저 반응한 적도 많았다.


복통, 두통, 이명, 불면…

그건 다, ‘말을 못 한 내 마음’이 보낸 신호였던 것 같다.


감정은 억누른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더 조용하고 더 깊은 방식으로 돌아온다.


문득,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급식시간에 반 아이 하나가 내 도시락을 흘려버렸는데

그날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닦고 조용히 앉아 있었던 기억.


그리고 그날 저녁, 이유도 없이 어머니한테 짜증 냈던 나.


그때부터 감정이 돌아오는 길을

나는 몰래 만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요즘은 감정을 밀어내지 않으려고 한다.

불편한 감정이 올라오면

“어, 왔네” 하고 맞이해 본다.


그게 쉽진 않다.

아직도 누군가 내 감정을 불편해할까 봐 망설이기도 하고.

표현하고 나서 후회할까 봐 주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그 감정이 나도 모르게 쌓이고, 돌아오는 거다.


돌아올 때는 더 크고, 더 무겁게.

그리고 예고 없이.


그래서 요즘은 스스로에게

자주 이렇게 말한다.


“지금 느끼는 감정, 지금 느껴도 돼.”

“지금 표현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더 크게 되돌아올 수 있어.”


감정을 억누른다고 성숙해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감정을 들여다볼 때

진짜 내가 조금씩 자라난다는 걸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 글은 상담심리학자로서 수많은 내담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동행하며, 그 경험 속에서 상징적으로 재구성한 한 사람의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내일은 ‘감정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제목으로, 진짜 감정을 무시할수록 관계에서 왜 멀어지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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