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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귀자씨 Jan 22. 2020

결핍을 자주 마주하기로 한다

아침에 영어 말하기 테스트 '오픽(OPIc)'을 보고 왔다. 어학 능력 평가에 도전한 건 취업 준비하던 시절 이후 거의 10년 만이다. 한 달 전 시험 신청을 하자마자 '오픽 2주 완성' 교재를 샀다. 그러나 고민 끝에 책을 열지는 않았다. 기출문제와 모범답안을 달달 외우는 건 나의 현재 영어 실력을 측정하려는 응시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기대하는 내 실력과 현실이 너무 다를 게 분명해 두려웠지만, 한 번쯤은 현주소를 냉정하게 봐야 할 것 같아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결과는 예상대로 처참했다. 평일 오전 시청 인근 오픽 시험장에 모인 젊고 씩씩한 취준생들(로 보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한 채 40분을 흘려보냈다. 지난 4개월간 영어 과외를 한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기력했다. 20여 분이 지났을 무렵 가장 먼저 테스트를 끝내고 일어나던 남학생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때 내 입에서는 음 웰 유노 따위의 허접한 스킬이 쏟아지고 있었다. 발가벗고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총 15문제 가운데 13문제는 어버버와 동문서답의 향연, 마지막 두 문제는 시간 배분 실패로 아예 풀지도 못했다. 공식 점수는 일주일 후 발표되지만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꼴찌로 시험장을 빠져나오면서 '석 달 후 다시 도전하리라' 마음속으로 외쳤다. 물론 석 달 후 내 영어 실력이 크게 향상될 것이라는 기대감은 없다. 밑바닥을 친 오기의 공허한 외침일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무언가가 결여된 자신을 솔직하게 마주하는 일은 참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각자 기준에서의 결핍을 품고 살아가지만 그걸 일부러 드러내 확인하는 경우는 드물다. 적당한 포장과 눈속임이 어렵지 않으니까. 쥐뿔도 없는 마이너스 통장 인생 주제에 굳이 외제차를 산 작년의 나처럼 말이다. 돈이 없는 결여를 제대로 해결하려면 돈을 벌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으니 포장지를 화려하게 바꾼 것이다. 마음은 웃지 못했지만 대외적인 효과는 쏠쏠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내 민낯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결국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마주쳐야 하는 실질의 ‘나’이기 때문이다. 요즘 브런치에 무엇인가를 기록하게 만드는 동력도 이런 생각의 연장선일 것이다. 자꾸 적어야 내 실체를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겠다 싶다.


최근 대기업 L사에 관한 기사를 쓰기 위해 해당 기업 홍보실 직원과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 그 직원은 공교롭게도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였던 K. 당시 전교 상위권의 모범생이던 K는 이후로도 착실히 내공을 쌓아 굴지의 대기업 입성에 성공한 듯했다. 반면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심한 사춘기를 겪었다. 학교에서 좀 논다는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K는 그런 나의 과거를 낱낱이 기억하는 친구다.


K와 재회하며 새삼 깨달은 내 결핍은 기본기 부족이었다. 제법 길었던 나의 사춘기 방황은 군 제대 후에야 막을 내렸다. 뒤늦은 몸부림의 과정에서 운 좋게 언론사 입사 기회를 얻어 지금은 K와 업무적인 교류를 하고 있지만, 두 사람의 내공 격차가 상당하다는 사실은 내가 제일 잘 안다. 당장 오늘 아침 시청 오픽 센터에서 40분 내내 음 웰 유노만 내뱉다가 온 사람이므로.


부담스러워도 내 부족함을 자꾸 끄집어내 개선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식으로 툭 튀어나온다. "독서실에서 얻지 못할 각종 사회생활 스킬을 야생에서 배웠다"는 술자리 허세로는 이제 한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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