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 엊그제 오후 편의점을 나서는데 가게 앞으로 중년 여성 셋이 걸어갔다. 우산을 펼치려다 잠시 멈추고 그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우산에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빗물이 튈 것 같아서였다. 아무도 내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고, 나는 속으로 나를 칭찬해줬다. 자존감이 조금 높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기본 매너 한 번 지킨 걸 자랑하려고 쓴 건 아니다. 요즘 내가 나를 가꾸는 훈련이 이런 식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캠핑클럽에서 이효리가 몰래 남을 배려하면 자존감이 살아난다고 말해 공감을 얻었는데, 그런 종류의 노력을 나도 하고 있다.
평소 가장 자주 하는 일은 뒷사람에게 문을 잡아주는 것이다. 사실 이 행동은 꽤 오래전부터 했다. 습관으로 굳힌 계기가 있었다. 2009년 겨울 반포지하상가로 기억한다. 나와 5m쯤 거리를 두고 앞서 걷던 백인 남성이 상가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그대로 문을 잡고 기다렸다. 바로 앞사람이 문을 잡아준 적은 많지만 저 멀리서 문을 잡고 2~3초가량 기다려준 사람을 만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상대가 외국인이어서 더 기억에 남았던 걸까. 아무튼 그 뒤로는 나도 문을 열 때마다 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바로 뒤에 인기척이 있을 때만 선택적으로 행동했다면 그때부터는 의무감을 부여한 셈이다.
밤길을 걸을 때 앞의 여성이 나 때문에 괜한 불안감을 느끼지 않도록 신경 쓰는 것도 자존감 키우기 훈련의 하나다. 예컨대 갑자기 근거리에서 내 존재를 알아차리면 두려움이 커질 수 있으니 멀리서부터 ‘나는 이상한 사람이 아닙니다’의 신호를 티 안 나게 보내는 식이다. 신호 전달 방법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데 ‘거동 수상자가 아닌 지극히 평범한 시민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 정도로 말하겠다. 그렇게 해도 상대방은 나를 경계하겠지만, 화들짝 놀라지 않게끔 신경 쓰는 과정에서 내 나름대로는 소소한 성취감을 느낀다.
지하철에서 내 숨결이 옆 사람 피부에 닿지 않도록 코의 각도를 돌리는 것, 버스에 타는데 달려오는 사람이 보이면 일부러 천천히 계단에 올라 버스 출발을 미세하게 지연시키는 것, 회사 탕비실의 빈 정수기 물통을 내가 안 써도 교체해두는 것, 주차장이 텅텅 비어 있어도 바퀴가 옆선을 밟지 않도록 신경 써서 주차하는 것, 서빙하는 분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것 등도 내가 나를 좀 더 괜찮은 사람으로 느끼게 하기 위한 일상 속 훈련이다.
좋은 것만 써두니 내가 되게 젠틀맨 같은데 여태 그렇지 않은 인간으로 살아와서 나를 개조하고 있는 거다. 작은 만족이 켜켜이 쌓여 자존감이 높아지면 자신감도 함께 살아나는 기분이 든다. 집과 회사에서도 더 긍정적인 사람으로 행동할 수 있어 좋다. 무엇보다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