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남편

2026년 1월 18일 일요일

by 전귀자씨

와이프와 아들이 이웃집에서 외박하고 온단다. 아이들끼리 놀게 하고 엄마들은 술 한잔 하는 모양이었다. 주말 근무 중이던 나는 아내의 갑작스러운 외박 통보에 퇴근 후 무얼 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이 키우는 집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그 행복한 고민, 초대해 준 이웃집 어머님께 감사했다. 어쩐지 인상이 좋으시더라니.


우선 저녁 메뉴를 골랐다. 엊그제 코스트코에서 사 온 하정우 와인이 딱 한잔 정도 남은 게 떠올랐다. 화이트 와인이니 해산물로 갈까. 근데 마리아주를 따질 정도로 호들갑 떨 필요는 없다. 그냥 남자의 소울푸드 재질로 가야겠다. 배달앱을 켜서 둘러보다가 블루리본이 달린 돼지불백집이 눈에 들어왔다. 성북동, 멀지 않다. 따뜻함을 유지하며 도착할 것이다.


집으로 오는 버스에서 음식을 주문했다. 다음은 밥 먹으며 무얼 할지 정할 차례다. 식사 중 영화는 집중이 안되니까 예능을 봐야겠다. 일단 IPTV 채널을 한 바퀴 돌려보기로 했다. 열혈농구단이나 극한84, 나혼자산다 등의 놓친 회차를 한다면 그걸 우선 보자. 딱히 볼 게 없으면 유튜브로 넘어가서 핑계고나 짠한형을 봐야겠다.


한 채널에서 호주오픈 테니스 1라운드 경기를 생방송 중이었다. 알카라스 경기였다. 그 타이밍에 돼지불백도 도착했다.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TV 앞에 식사를 차렸다. 남은 와인은 설거지가 편한 물컵에 따랐다. 정확히 딱 한 컵이 나왔다. 상추에 불백 한 점과 밥을 올리고 마늘과 쌈장도 넣었다. 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다가 와인 한 모금을 마셨다. 지상낙원을 경험했다.


식사를 마친 후 정리하고 소파에 누워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알카라스 경기가 기대보다 노잼이니 예능 프로그램이나 봐야겠다. 마땅한 게 안 보여 유튜브로 넘어갔는데 여기서도 당기는 게 없었다. 티비를 끄고 폰을 만지작거렸다. 나가서 혼자 심야영화나 볼까. 귀찮긴 한데 이대로 자긴 억울하다. 아, 차가 주차장 내 명당에 있구나. 영화 보고 오면 그 자리를 빼앗기겠지. 택시 타고 다녀올까.


이도저도 못하고 고민만 하다가 결국 소파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새벽 1시였다. 그럼 그렇지. 자유남편은 늘 용두사미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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