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너무 먼 사이.
내 또래 친구들, 그러니까 80년대 후반생들 중 내 지인들은 딱 반으로 나뉘었다.
아빠와 아주 친한 딸과 그 반대의 딸.
반대의 관계라 하여 척을 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아니고, 내가 그렇고 나와 비슷한 절반의 친구들이 그렇듯, 굳이 의미 없는 대화를 시도하지 않고 확인과 요구에 의한 대화만 나누며 말하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하는 마음은 가슴팍에만 묻어두는 관계이다. 이 관계에 대한 친밀도를 직선으로 늘어놓고 본다면 나는 반대편의 끝자락에 간당간당 한 발로 서있을 것이다(어쩌면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
아빠에 대한 나의 마음을 표현한다면 애증이 맞을 것이고 애를 삼켜버릴 만큼 커다란 증의 무게로 '친밀도'라는 선상에 발끝을 딛는 것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 나만큼 극단의 마음으로 아빠를 떠올리는 친구들이 많지는 않다. 이런 마음은 본디 문제와 상처를 내포하고 있고, 나이가 들어서까지 상처와 감정에 지배당하는 상황이 흔한 것은 아니니까.
아빠에게 애정과 애교를 가득 담아 전화통화를 하는 친구를 보면 그저 신기했다.
그렇다고 아쉬운 마음이나 부러움은 느끼지 않았다. 죽었다 깨어나도 저런 사이가 될 수 없음을 알고 그럴 의지도 없기 때문에. 대신 나를 공감하는 사람들이 없을까 문뜩 궁금했다.
작년인가 인스타그램에서 마치 내가 써놓은 것 같은 글을 보았다. 가까워질 수 없지만 안타깝고, 용기내기에는 마음의 거리가 너무 먼 아버지에 대해 어느 딸이 써 놓은 글이었다. 뭐랄까. 그냥 그 사람의 푸념 같은 글이었다. 나에게 해답을 주지도, 당장 어떤 행동을 하게끔 큰 반향이 있는 글은 아니었지만,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찾았다는 사실은 나의 마음을 조금은 편하게 만들었다. 이 마음이 '공감'과 '위로'라는 것도 시간이 지나 알게 되었다. 내가 나와 내 가족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자 마음먹게 된 것도 어쩌면 이 위로에서 시작된 것 같기도 하다. 공감이라는 마음의 나눔으로 누군가를 위로할 수도 있고, 글을 씀으로써 내가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동네 어딘가에는 다양한 이유와 상황으로 인해, 아버지가 멀기만 한 나 같은 딸과 아들들이 분명히 존재할 테니까.
나는 아마 앞으로도 계속 이런 딸일 것이다.
밥은 먹었어? 몸에 안 좋은 것 좀 먹지 마. 내일 춥데 이거 입고가. 누군가에게는 별거 아닌 이런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래도 걸어가던 길 위에 뻥튀기 트럭을 보면 밤만 되면 냉장고를 뒤적이며 씹을 거리를 찾는 아빠가 생각나 말없이 식탁 위에 강냉이를 툭 던져 놓고 방문을 닫는 그런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