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동쪽 부촌 마을을 접수한 율도는 마침내 오랫동안 구상했던 ‘정벌’을 계획했다. 그건 명실상부한 지리산 마을의 통일이었다. 정착촌 사람끼리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서로 전쟁을 일으켜 약탈하고 반목, 질시하는 삶이 아닌, 통일된 지도체제 아래에서 모두가 더불어 사는 삶이 율도가 궁극적으로 꿈꾸던 목표였다. 율도는 자신의 심복을 불렀다.
“네, 촌장님. 시킬 일이 있는지요?”
“부촌 마을 사람들 총 명부를 구해보시오.”
“전직 조폭 녀석들 명부도 포함됩니까?”
“물론, 어쨌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이 필요하니까.”
잠시 후, 심복이 명부와 함께 이를 설명할 마을 서기쯤 되어 보이는 젊은 친구를 데려왔다. 율도는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술과 고기를 내어놓았다.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현재 마을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그날, 마충기를 처단할 때와 같습니다. 모두 새 촌장님을 기꺼이 환영하는 분위기입니다.”
“다행이군요. 제가 이곳까지 오시라고 한 것은 다름 아니라, 부촌 마을에서 병력을 징발하려고 합니다.”
“젊은이들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뇨.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싸울 수 있다면 나이, 출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율도는 말을 하면서도 부촌 마을 명부를 꼼꼼하게 보고 있었다. 나이별, 직업별, 출신별로 잘 짜인 명부였다.
“싸운다면 이제 어느 마을과?”
젊은 친구는 눈치가 빨랐다. 율도는 턱으로 위쪽을 가리키자, 그는 어떤 의미인 줄 금방 알았다.
“북쪽 거인 마을이군요. 그곳은 날씨도 몹시 춥고 위인들이 모두 건장하여 아무래도 젊은 층을 중심으로 싸움을 대단히 잘하는 자들을 뽑는 게 좋겠습니다. 자, 1p와 5p를 보시죠.”
과연 그가 가리킨 쪽에 젊은이와 전직 조폭들의 이름이 나와 있었다.
“음, 쓸만하겠군요.”
“네, 따로 훈련하지 않아도 일당백은 될 듯합니다.”
그의 확답에 율도는 해당 페이지를 별도로 접었다. 그런 후 심복에게 명부를 주곤 한 시간 뒤에 모두 연병장에 집합하라고 지시했다. 심복이 나간 뒤, 율도는 부촌 마을 서기와 허심탄회하게 술을 마시며 유대관계를 쌓았다. 한 시간 뒤, 율도는 연병장 단상에 섰다.
“아시다시피 이제 우리 평화마을과 부촌 마을은 하나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특별히 부른 것은 우리 지리산 마을 통일을 위해서입니다. 앞으로 제가 이룩할 세상은 정착촌 사람끼리 전쟁하고 약탈하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의 힘으로 잘살아가는 지리산 공동체 마을입니다. 이를 위해 저는 제일 먼저 북쪽 마을을 평정하려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저를 따라 이 성스러운 전쟁을 함께 하지 않으시렵니까!”
율도의 일장 연설이 끝나자 연병장에 모인 군중들은 큰소리로 환호했다.
“우리는 언제나 율도 촌장님과 함께할 것입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지리산 정착촌의 영광을 위하여! 평화마을과 부촌 마을의 번영을 위하여!”
의외의 반응이었다. 율도는 이들이 내심 자신을 점령군의 우두머리라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건 기우로 드러났다.
“좋습니다. 여러분의 응원과 지지에 힘입어 여러분을 우리 군대로 편입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율도는 기존 규찰대 조직을 부대로 확대하였고, 마을 출신 분류 없이 오직 실력과 능력으로 십 부장, 백 부장 등의 지휘체계를 마련하여 평화마을 규찰대와 똑같이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켰다.
첫 번째 정벌 목표는 북쪽 마을 정착촌이었다. 북쪽은 절기상 가을이지만 이미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래서 혹한이 찾아오기 전에 끝장을 보는 게 여러모로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그새 병력은 평화마을 규찰대보다 2배의 인원으로 늘었고, 전투력 역시 막강하였다.
“출발!”
마침내 가을 수확기를 한 달여 앞두고 율도의 부대는 곧바로 지리산 천왕봉을 향했다. 북쪽으로 가려면 좌·우측면을 돌아가는 길도 있지만, 그리하다 보면 불필요한 전투가 발생할 수도 있었고, 시간 지연 때문에 폭설 등 악조건의 기후 영향도 받을 수 있었다. 율도 처지에선 이 길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
율도의 부대는 위풍당당했다. 맨 앞에 평화마을 깃발을 든 기수가 있었고, 바로 뒤에 북을 치는 병사들 그다음에 말을 탄 율도와 지휘부가 있었다. 이후론 당장이라도 전투를 치를 수 있는 무장한 병사들이 줄을 이었다.
“촌장님! 눈발이 너무 거셉니다. 게다가 길도 점점 험합니다.”
앞서가던 척후병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고하였다. 심복마저 아까부터 이점을 말했지만, 율도는 꿈쩍하지 않았다.
“여기서 멈출 순 없어. 최소한 대피소까지.”
할 수 없이 심복이 크게 외쳤다.
“계속 행군한다. 출발!”
하지만 용감무쌍한 그들도 시간이 흐르자 폭설과 거칠고 험한 산길에서 맥을 못 추었다. 거기에다 천왕봉 근처에서 내리치는 눈바람은 행군을 점점 더디게 만들었다. 평화마을에서 출발한 지 4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천왕봉도 넘지 못하였다.
“이제 더는 못갑니다. 촌장님께서 결단을 내리시죠.”
심복이 재촉하자 율도는 마지못해 명령을 내렸다.
“대피소에서 쉬어간다.”
율도의 부대는 예전 대피소로 쓰던 장터목 대피소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대열 후미 보급부대에서 솥을 걸고 간단하게 식사 준비를 하였고, 나머지는 불을 피워 따뜻한 물을 마시면서 추위를 녹였다.
‘가을인데 웬 놈의 눈이 이리 내린담?‘
그런데 문제는 다음이었다. 아까만 해도 눈길을 헤치며 행군할 정도의 날씨였는데, 시간이 갈수록 폭설과 강풍이 더 심해졌다. 할 수 없이 율도의 군사이자 책사가 자신의 의견을 내었다.
“촌장님, 이대론 강행하면 더 큰 위험이 따릅니다. 내일 아침에 출발하기로 하고 오늘 밤은 이곳에서 야영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자 심복 역시 옆에서 책사의 의견에 동조하듯 율도에 눈을 찡긋거렸다.
“책사도 그리 생각하오?”
“네, 병사들의 사기를 생각해주십시오. 이대로 넘어가면 동사는 물론 감기에 걸리는 병사들이 많아집니다.”
책사, 김 씨는 이곳에 들어오기 전, 군에서 대위로 예편한 자였다. 그는 육군 3사관학교 출신으로 야전에서 잔뼈가 굵은 자였다.
“그럽시다. 전군에게 야영을 준비하라고 하세요.”
대규모 행군을 경험하지 못한 율도로선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어 승낙하였다. 하긴 지리산은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행군을 감행하다간, 실제 전투에서 승산이 어려워질 수 있었다.
율도는 전 부대원에게 야영을 지시하곤 지휘부와 함께 대피소 안으로 들어갔다. 대피소 안은 낡고 허름했다. 그나마 불을 피우고 대충 청소하니 눈과 바람은 피할 수 있었다.
“촌장님, 이리로 오십시오. 불이 따뜻합니다.”
심복이 어디서 구했는지 두꺼운 담요를 구해 의자에 깔아놓고 있었다. 훈기가 돌자, 율도는 가만히 지난 일을 회상했다.
‘그래, 이곳, 기억이 나.’
“여기에 오신 적이 있습니까?”
책사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율도에게 물었다.
“네, 몇 번요. 잊지 못할 곳이지요.”
율도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이곳에 몇 번 온 적이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장터목 대피소는 천왕봉을 찾는 등산객에게 매우 유용한 장소였다. 처음 본 사람들도 이곳에서 밤을 지새우며 술이라도 나눌라치면 금방 친해지는 마법 같은 곳이었다. 서로 음식과 술을 권하면서 산 이야기와 인생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나누던 이곳을 떠올리면서, 율도는 이런 분위기야말로 궁극적으로 지리산 정착촌 사람들이 지향할 곳이라고 생각했다.
“병사들에게도 따뜻한 음식을 제공하고 약간의 경계병만 남긴 후 편히 쉬라고 하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심복이 큰소리로 대답한 뒤, 이내 밖으로 나갔다. 율도는 이곳에서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폭설이 내리는 지리산의 밤은 캄캄한 어둠과 그것을 탈색하려는 듯한 하얀 눈발로 뒤덮여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게다가 바람은 또 얼마나 강한지 숙소 문을 열지 못할 정도로 굉음이 대단했고, 보초 서던 초병들은 금방이라도 동상에 걸릴 듯한 매서운 추위에 맥을 못 추었다.
“이러다 동상에 걸려 내일 아침에 전투도 못 하는 것 아냐?”
“그러게, 말이야. 이대로라면 얼어 죽겠다.”
병사들은 저마다 불평하며 추위에 덜덜 떨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예견한 듯 율도의 책사는 병사 두어 명을 데리고 초소를 방문하고 있었다. 병사 손에는 뜨거운 물을 담은 물통과 야식으로 적당한 만두를 가지고 있었다.
“이걸로 요기하고 어떻든 뜨거운 물을 많이 마시게.”
책사는 물과 만두를 건네주며 초병들을 격려했다. 그러기를 두어 시간, 마침내 눈과 바람은 많이 잦아들었다. 이에 아까 야식으로 배가 부른 초병들은 이 시간에 무슨 일이 벌어지겠느냐는 안일한 생각에 대다수가 자리에 앉아 졸고 있었다. 책사 역시 내일 전투를 생각하여 그들을 다그치지 않았다. 그도 피곤했던지, 막사에 들어가서 잠을 청한 것이다.
그런데 새벽녘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저벅저벅.
쿵, 쿵, 쿵!
대피소 주위에서 보초를 서던 초병이 컴컴한 어둠 속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기겁했다.
‘저게 뭐야?’
놀란 초병이 자고 있던 선임자를 깨웠다.
“에이, 뭔데? 한참 잠이 들었건만.”
“저것 좀 보십시오. 아니, 들어보십시오. 뭔가 우리 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그러자 놀란 선임자가 그쪽으로 눈과 귀를 집중했다. 자세히 보니 그 뭔가는 하나가 아니었다.
“저건 또 뭐야? 불빛이냐? 아님, 횃불이야?”
여럿이 눈에 불을 밝히고 다가오는데, 초병들은 이를 설마 사람의 눈이라곤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쿵, 쿵, 쿵
“저 소리는 또 뭐야?”
“혹시 발소리 아닙니까?”
“에잇!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의 발소리가 이리 클 리가 있나?”
그들이 밟는 땅에 진동이 일어날 정도로 발소리가 컸다. 무엇보다 초병이 더욱 놀란 것은 그놈들의 크기였다.
“헉! 저것 좀 보십시오.”
“뭐야? 저것들은 인간이야, 괴물이야?”
가까이 다가온 그들을 보니, 놈들은 보통 사람들의 1.5배~2배의 신장을 가졌고, 드러내야 할 눈과 코, 입술 등의 피부 외엔 털로 덮여 있었다.
크르렁, 큭큭, 킁킁킁.
거기에다 놈들의 목소리는 늑대와 이리같이 공포 그 자체였다. 초병 하나가 넋이 나가 놈들을 전설 속 ‘설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급히 뒤돌아서서 고함을 치려는데 갑자기 뭔가 날아왔다.
퍽!
그건 뒤에서 내리꽂는 놈의 발이었다. 이에 나머지 초병은 겁에 질린 채로 그대로 숙소 쪽으로 뛰었다.
“적이다! 적! 놈들이 쳐들어왔다!”
북쪽 정착촌 거인들의 기습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거인의 손에 들려 멀리 내팽개쳤다.
쿵!, 억!
다행히 대피소 밖에서 천막을 치고 경계를 서던 병사들이 고함을 듣고 북을 쳤다.
둥, 둥, 둥두두두 둥!
“적이다!”
북소리에 흩어져 자던 병사들이 모두 잠에서 깨었다. 책사 역시 심상치 않음을 판단하고 제일 먼저 칼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모두 창과 검을 들어라! 그리고 소리가 난 쪽으로 진격하라!”
그런데 하필이면 조금 전부터 바람이 거세지고 폭설이 또 내리기 시작하여, 적이 어디서 출몰했는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그때 어떤 병사가 소리쳤다.
“저기다!”
그 소리에 잠에서 깬 병사들은 그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제일 먼저 놈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악! 사람 살려!”
율도는 그러지 않아도 꿈자리가 사나워서 설익은 잠을 자고 있었다. 병사들의 고함에 그는 급히 활을 챙겨 밖을 나왔는데, 율도 역시 놈들을 처음 본 초병처럼 그들이 ‘설인’인 줄 착각했다. 거대한 몸으로 손과 발만을 이용하여 천막을 부수고 병사들을 죽이는 놈들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그때 책사가 다가왔다.
“촌장님은 위험하니 일단 피하십시오.”
“도대체 저놈들은 누구란 말입니까?”
매우 급한 상황에서도 율도는 의연함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북쪽 거인 놈들 같습니다.”
“뭐요? 소문만 들었지, 저리도 몸집이 크단 말입니까?”
“아마 큰놈들만 모아 선발대로 나왔겠지요.”
책사의 말은 사실이었다.
“어서 피하십시오. 저놈 손에 맞으면 한 방에 갈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 지휘관인 내가 피하면 병사들의 사기는 어쩐단 말이오. 괜찮소, 싸우겠습니다.”
율도는 화살을 정조준하여 막사를 부수는 놈을 향해 활을 날렸다. 과연 화살을 맞은 놈은 끽, 소리 없이 바닥에 넘어졌다.
쿵!
그런데 그 소리마저 너무 커서 섬뜩할 지경이었다.
“모두 정신 차려라. 궁수들은 활로, 나머지는 칼과 창을 들어 나를 따르라!”
지휘관이 괴물 앞에서 당당하게 외치니 그제야 병사들은 힘을 얻었다. 이에 병사들은 물러서지 않고 놈들의 주위를 맴돌며 창을 겨눴다.
크릉, 크르렁, 크크크.
“저게 사람 소리냐? 마치 늑대나 이리 소리 같다.”
“조심해, 놈이 널 꼬나보고 있어.”
병사들은 조심조심 놈들을 향해 긴 창을 들이대며 계속 돌았다. 그러자 놈들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중 가장 덩치가 큰 놈이 불꽃이 남아 있는 화로를 들어 병사들 무리로 던졌다.
쾅!
“피해, 피해라.”
병사들이 불꽃을 피해 주춤거리자, 이내 놈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닥치는 대로 손과 발을 이용하여 병사들을 공격하니, 병사들은 맥없이 쓰러지거나 멀리 내동댕이쳐졌다.
“직접 교전은 불가합니다.”
책사가 재빨리 율도에게 말했다.
“알겠소. 내가 조치하리다.”
율도는 뒤에 있는 악기 부는 병사들에게 재빨리 작전을 지시하곤, 놈들 앞에 있는 병사들을 모두 물리쳤다.
“후퇴! 모두 내 뒤로 오라.”
책사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말자, 율도는 방법이 있다는 시늉을 하며 놈들 앞에 홀로 나섰다.
“네 이놈들!”
율도는 다짜고짜 거인들에게 호통부터 쳤다. 그러자 그들 중 지휘관인 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 발자국 다가왔다.
“네가 평화마을 촌장, 백율도냐?”
“그렇다. 너희들은 똑똑히 들어라. 나, 백율도는 너희 마을을 급습하러 온 게 아니다.”
그 말에 거인이 웃었다.
“그러면 뭔데?”
“너희 마을 촌장과 협상을 통해 우리 두 개 마을의 번영을 추구하기 위해 왔다.”
“무슨 개소리냐?”
“전쟁이 아니라, 대화하자는 거다. 그런데도 너희는 새벽에 기습해 왔다. 이 얼마나 비겁한 짓거리냐!”
그러자 거인은 크게 웃으며 방심하였다. 그때를 틈타 율도는 자신의 특기인 뒤돌려 차기를 위해 허공을 날았다. 그리곤 내려오면서 정확하게 놈의 면상을 쳤다.
퍽!
놈은 비명 지를 새도 없이 바닥에 쓰러졌고, 나머지 놈들은 멀뚱멀뚱 쓰러진 자신들의 지휘관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별안간 둥둥, 하는 북소리가 울려 퍼졌고, 연이어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듯한 피리 소리가 구슬프게 들렸다. 피리를 부는 자는 율도의 악기 부대 소속 병사들이었다. 이 피리 소리에 거인들은 정신을 빼앗기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책사는 이게 율도의 전술인 것을 직감했다.
“어쩌겠느냐? 너희들도 대장같이 바닥에 쓰러질 테냐? 아니면 우리와 협상하고 마을로 조용히 돌아가겠느냐?”
율도의 제안에 대다수 거인은 동의하는가 싶었는데, 한 놈이 삐딱하게 나왔다.
“네놈의 농간에 속을 우리가 아니다. 이봐! 모두 정신 차려. 우리 정도면 이런 송사리 같은 놈들은 한 방에 제압할 수 있다. 자, 모조리 놈들을 족치자!”
그러면서 놈은 율도를 향해 거대한 몸으로 다가왔다. 이에 일이 틀렸구나, 생각한 율도는 갑자기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리곤 내려오면서 단번에 그놈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
헉!
순간적이었다. 놈이 쓰러지자 나머지 놈들이 정신을 차렸는지 율도에 달려들었다. 그런데도 율도는 도망가지 않고 두 손바닥을 놈들을 향해 펼쳤다.
어어어어, 헉!
“이게 뭐야? 우리가 왜 뒤로 넘어가지?”
놀라운 일이었다. 율도의 손바닥에서 강풍이 부는지, 아니면 뒤에서 바람이 부는지 놈들은 제자리에서 더 나아올 수가 없었다. 그때, 율도가 손을 들자 피리는 멈추었다. 그리곤 대피소 지붕에 올라간 궁수들의 화살이 빗발쳤다.
어아악! 욱! 억!
놈들은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고꾸라지거나 옆으로 쓰러졌다. 거구들이 넘어지면서 땅을 쳤으므로 마치 지진이 난 것같이 소리가 컸다.
“저건 촌장님이 장풍을 쓴 거야.”
“맞아, 놀랄 일이야.”
병사 중 일부는 율도가 장풍을 썼다, 하고 말했다. 또 어떤 이는 율도가 신출귀몰한 도술로 놈들을 물리쳤다고 말하였으므로 병사들의 사기는 더없이 높았다. 이에 율도는 병사들을 모두 모이게 한 뒤, 지금 바로 북쪽 마을 본거지에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더는 지체할 이유가 없는 까닭이었다.
“출격하자! 놈들을 모조리 없애버리자.”
누군가의 선창이 있자, 모두 손과 손에 칼과 창을 들고 함성을 질렀다.
“와아!”
어느덧 지리산 천왕봉 너머에서 동이 트고 있었다.
그 시각, 북쪽 거인 마을 정착촌 차돌박은 자신이 보낸 선발대가 율도의 부대를 단번에 제압한 줄 알고 아침까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왜냐하면, 선발대의 대부분은 자신의 마을에서 가장 몸집이 크면서 싸움에 일가견이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봐! 술 더 가져와. 그리고 선발대에선 아직 연락이 없어?”
“예, 곧 대령하겠습니다.”
“이놈아, 술은 당연한 거고, 아직 소식이 없냐고!”
보통 사람 몸집보다 반 이상이나 큰 차돌박의 목소리는 웅장하였다. 노기 띤 물음에 부하들은 꼼짝하지 못하고 벌벌 기었다.
“아직.”
“이것들이 빨리빨리 해치우지 않고 뭘 그리 꾸물거리냐? 나, 참 답답해서.”
“곧 연락이 올 듯합니다.”
시중드는 자가 재빨리 술 한 통을 차돌박 앞으로 내었다. 차돌박은 첩자를 통해 율도의 부대가 부촌 지도자 마충기를 처단했고, 그의 마을을 접수하였으며, 이후 지리산 정착촌 통일을 위해 자신의 마을에 제일 먼저 쳐들어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부촌 마을 촌장 마충기처럼, 율도를 자신보다 한참 아래로 보았다.
‘어린놈의 새끼가 감히 우리 마을을 넘본단 말이지?’
그는 혹한의 겨울 날씨를 고려하면 율도의 부대가 천왕봉 밑에서 하루 정도 숙영할 것으로 정확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새벽녘에 기습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거로 판단했다.
차돌박은 율도 부대가 궤멸한다면, 이참에 자신이 지리산 정착촌의 맹주가 되고 싶었다. 그리만 된다면 비옥한 동쪽인 평화마을과 부촌 마을이 자신이 손아귀에 들어올 것으로 믿었다. 그런 후, 패잔병들을 규합하여 자신의 라이벌인 좀비 마을과 자웅동체 마을을 습격하여 최종적으로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하,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구먼, 좋아. 아주 좋아. 야! 넌 어떻게 생각해?”
시중드는 자는 눈치가 빠른 자였다.
“그럼요, 촌장님 생각이 맞습니다. 선발대가 놈들을 제압한다면, 촌장님이 우리 지리산 마을에서 가장 힘이 센 촌장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드디어 날이 밝았다.
“아주, 상쾌한 날이구먼.”
차돌박은 시끄러운 새 소리를 들으며 밖으로 나가 크게 기지개를 켰다. 오늘따라 폭설도 멎어서인지 공기는 깨끗하고 바람이 상쾌했다. 그때였다. 멀리 눈보라를 헤치며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를 보았다.
“어잉? 뭐야?”
차돌박은 실눈으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선발대인 것 같습니다.”
시중드는 자가 애써 그의 비위를 맞추었다.
“그렇지? 왜 이리 안 오는가 했는데, 이제야 오는구먼. 좋아, 아주 좋아.”
그는 자신의 선발대가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오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건 사나운 말같이 돌진하는 율도의 부대였다. 시중드는 자가 재빨리 도망치면서 크게 소리쳤다.
“적이다! 율도의 부대가 나타났다.”
“뭐야, 뭐야?”
차돌박은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이봐! 북을 쳐! 그리고 군사들을 모두 깨워!”
하지만 시중드는 자는 자리에 없었다. 그래도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초병이 다행히 북을 세차게 쳤다.
둥, 둥, 두두두둥!
깜짝 놀란 군사들이 허겁지겁 창을 챙겨 막사 밖으로 나왔지만, 이미 마을 중간에 다다른 율도의 군사들에 의해 모조리 베어졌다. 한차례 거인들과 전투를 치른 율도의 병사들은 긴 창과 긴 칼로 간단하게 그들의 목을 벤 것이다. 그래도 차돌박과 그의 심복들은 끝까지 저항했다. 그들은 차돌박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율도 병사들의 창과 칼을 막고 있었다. 그러자 율도가 마지못해 나섰다.
“지금 항복하면 모두 목숨은 살려주겠다. 어찌하겠는가?”
율도의 위엄 있는 목소리에 일부는 흔들렸지만, 차돌박은 되려 그를 꾸짖었다.
“이런, 어린놈이! 어디서 협박질이야! 우리 절대로 항복하지 않는다. 이리 와서 내 칼을 받아라.”
차돌박이 무리하여 앞으로 나오자, 율도는 단숨에 공중을 날았다. 그런 후 칼등으로 그의 뒷머리를 치니 거구의 차돌박은 앞으로 꼬꾸라졌다.
퍽!, 쿵!
이로써 싸움은 끝나버렸다. 저항할 힘을 잃은 심복들은 모두 율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제 전쟁은 승부가 쉽게 났다.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고 차돌박은 포승줄에 결박당한 채 율도 앞에 끌려갔다. 그의 뒤론 그동안 그가 통치한 정착촌 사람들이 무릎 꿇은 채 엎드려 있었다.
차돌박은 그래도 율도가 그를 살려주리라고 생각하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 예전 영화에서 본 대로 삼배구고두례(무릎 1번 꿇을 때마다 3번 이마를 땅에 찧는 것을 총 9번)를 행하였다. 한때 폭군처럼 군림하던 그였지만, 그의 정착촌 사람들은 그가 머리를 찧을 때마다 ‘꺼이꺼이’, 하고 슬피 울었다.
“살고 싶은가?”
높은 단 위에서 율도가 넌지시 물었다.
“살려만 주신다면 촌장님의 하혜와 같은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잔뜩 몸을 낮춘 차돌박은 율도의 관대한 처분을 기다렸다.
‘그래, 이 어린놈아, 오늘은 내가 비록 졌지만, 반드시 후일을 도모할 것이다.’
그러면서 속으로 이 치욕을 반드시 갚겠다고 이를 갈았는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율도가 단위에서 그의 정착촌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물었다.
“이 자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그러자 차돌박 뒤에 꿇어앉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차돌박은 당연히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했기에, 살포시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아니었다. 마을 사람 중 누군가 똑 부러지게 말했다.
“그는 잔인한 폭군이었소.”
차돌박은 얼른 고개를 돌려 그자를 응시했다.
‘이놈이 미친 것 아냐!’
하지만 그는 차돌박의 차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이어갔다.
“그러니 참형으로 다스리길 원하오.”
그의 말에 더욱 마을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커졌다.
“우, 우~.”
율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래도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고 싶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물었다.
“다른 분들도 이자와 의견이 같소?”
이번엔 어떤 백발이 성한 노인이 손을 들었다.
“살다 살다, 내가 이런 미친 촌장은 처음 봤소이다. 처음 말한 자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노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다수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가 나왔다.
“죽여라! 참형에 처하라!”
‘이런! 이 시벌놈들이 날 죽이라고? 내가 이날 이때까지 제 놈들을 위해 어떻게 해주었는데, 헐!’
율도는 마을 사람들의 함의가 모였다고 생각하고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때 또 어떤 마을 사람이 소리쳤다.
“여러분 이자를 돌로 쳐 죽입시다!”
“옳소!”
“동의합니다!”
결국, 난리 후,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인, 차돌박도 부촌의 마충기처럼 마을 사람들에게 맞아 죽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