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차례 통일 전투를 치른 율도는 자신감이 붙었다. 그래서 나머지 정착촌도 빨리 점령하여 하루속히 통일 지리산 시대를 만들고 싶었다. 율도는 북쪽을 다녀온 후로 쉼도 없이 부대를 재정비하고 전술훈련도 강화하는 등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이에 제동 거는 자가 있었으니 그는 율도의 책사, 김 씨였다.
전직 군인답게 김은 병사들의 쉼을 특히 강조하는 한편, 이 전쟁을 단순히 속도감 있게 밀어붙일 게 아니라, 점령한 정착촌 사람들을 다독이고 앞으로의 비전을 제시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내었다. 그제야 율도는 자신이 너무 성급했다고 깨달았고, 책사의 말처럼 속도를 조절하면서 자신도 재충전하기로 했다. 마침, 그즈음에 꽃비가 자신의 숙소로 찾아왔다.
“축하드려요.”
“뭘요? 모두 마을 사람들의 도움 때문이지요. 아, 그러지 않아도 내가 한번 만나보고 싶었어요. 우리 오래간만에 걷죠.”
바람은 선선했고 모든 게 좋았다. 오랜만에 꽃비와 산책을 하면서 대화를 나눈 율도는 그녀가 얼른 성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녀 안에 있는 샘물은 깊디깊었다. 어린 시절 홀어머니와 어렵게 살다가, 마충기에 피랍되어 거의 감금 생활을 했던 그녀였다. 그런데도 그녀의 마음은 선했고 특히 자신보다 어려운 이웃에 관한 배려가 남달랐다. 율도는 이 모든 게 어릴 때부터 그녀가 믿는 종교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았다. 율도 자신은 무종교였던 아버지와 어린 시절부터 장 도인에 공부하다 보니, 신(神)의 존재를 몰랐다. 가끔 그녀가 꺼내는 신의 이야기에 율도는 관심이 깊어졌고, 그럴수록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가을걷이가 일주일 정도 남았을 때, 책사 김이 출전을 권유했다.
“지금이 적기입니다. 출전하셔야 합니다.”
“어디 먼저 정벌할까요?”
율도는 내심 이 부분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책사의 의견도 듣고 싶었다. 그런데 둘의 의견은 일치했다. 이번엔 서쪽 자웅동체 마을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병사들의 훈련상태가 최근에 최상이어서 율도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 밤, 율도는 참모들을 소집하여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아침에 출정을 서둘렀다.
다음 날 아침, 평화마을 연병장엔 역전의 용사들이 굳센 표정으로 율도의 출정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명령만 내리소서! 강철같은 대오로 단번에 적을 제압하겠습니다.”
“최강 부대! 최고의 지도자!”
이번에도 평화마을 규찰대가 중심으로 부촌 그리고 북쪽 거인 마을 패잔병들이 합류하여 기세가 더욱 등등했다. 마침내 율도가 긴 칼을 빼 들고 출정을 외쳤다.
“출정하라!”
이에 예전처럼 병사들은 격식을 갖추어 서쪽 고갯길을 올랐는데 이곳이 1560년 ‘징의 사상’을 생활철학으로 삼은 조선의 선비, 남명 조식 선생이 악양이 명승지라 듣고 산청에서 찾아왔다가 그만 산세가 험하여 되돌아간 ‘회남재’였다. 이후 난리가 나기 몇 년 전, 어떤 얼빠진 군수가 모 종편, 트로트 경연대회에서 입상한 소녀가 이곳 출신이라고 하여 ‘◯◯◯ 길’이라고 명명하여 지역의 지각 있는 자들에게 큰 욕을 먹었다는 길이기도 했다.
과연 소문대로 고갯길은 멀고 험했다. 겨우 고개 정상까지 올랐을 뿐이었는데, 병사들은 매우 지쳤다. 하지만 내려가는 길은 숲도 울창하고 경관이 너무 좋아 전혀 피로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고갯길이었다.
정벌하고자 하는 자웅동체 마을은 산비탈에 있었다. 그 밑으로 난리가 나기 전까진 드넓은 악양 평야가 있었지만, 지금은 지진으로 그곳까지 물이 들어와 거의 폐허 같았다. 책사 김이 이곳에서 율도에게 제안했다.
“병사들도 잠시 쉴 겸, 여기서 대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럽시다. 마침 아래가 훤히 잘 보이는군요.”
율도가 전 병력에 명령했다.
“모두 휴식!”
율도 부대는 마을이 보이는 중턱에서 대기하였고, 대신 정찰대가 마을의 동태를 살피러 갔다. 나머지 병사들은 물과 간단한 음식을 먹기도 하고, 풀밭에서 휴식을 취했다. 잠시 후, 정찰대 대장이 돌아와 율도에 보고했다.
“우리 공격을 전혀 모르는 눈치입니다. 마을을 지키는 병사들도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말에 책사 김이 말을 받았다.
“지금이 적기입니다. 공격하시죠.”
율도는 그들의 말에 전 병력에 지시했다.
“지금이다. 선발대가 1차로 공격한 뒤, 여의치 않으면 전원 공격한다!”
그 시각, 자웅동체 마을 사람들은 어제 혹은 오늘 아침에 큰 사냥이 있었는지 큰 노루 한 마리와 멧돼지를 잡아 흥청망청 뜯고, 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고기를 손질하는 자들은 모두 남자였지만, 피를 마시고 즐기는 자들은 거의 여자인 점이었다.
“마셔, 그리고 먹어! 오늘따라 고기 맛이 끝내주네.”
여자들의 말에 마을 입구에서 근무를 서야 할 병사들까지 창을 내려놓고 여자들이 먹다 남은 뼈다귀를 뜯고 있었다. 이에 남자 중 일부가 촌장에게 초병은 근무 후 먹어도 늦지 않다고 진언하였지만, 여 촌장은 개의치 않았다.
“이 시간에 누가 온단 말이오? 괜찮아. 내가 있는 이상, 여긴 난공불락의 요새란 말이오. 신경 쓰지 말아요.”
“그래도 최근에 평화마을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소식도 있습니다.”
“어허이! 괜한 걱정을! 설령 그 어린놈이 이끄는 군대가 온다고 하면 내가 한 손으로 다 쓸어버릴 테니. 자 남정네들도 이리 와서 같이 고기나 뜯지요.”
여 촌장은 나름대로 호기를 부렸지만, 그때였다. 갑자기 큰 함성과 함께 율도 부대의 선발대가 기선을 잡으려는 듯 쳐들어왔다.
“적이다!”
놀란 자웅동체 군사들이 급히 방어체제를 갖추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모조리 도륙하라!”
선발 대장이 말 위에서 크게 창을 휘두르자, 엉거주춤하던 자웅동체 군사들의 목이 여럿 달아났다. 그런데 이상한 건 모두 여성들이었다.
“활을 쏴라!”
명령과 함께 율도 부대 선발대 궁수들이 활을 쏘자, 자웅동체 병력은 크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 촌장이 나섰다.
“일단 후퇴!”
그러니 자연스럽게 두 병력은 대치 상황이 되었고, 뒤로 물러선 자웅동체 병사들은 이내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리곤 아까 피를 마시며 고기를 뜯던 여자들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뭐야? 여긴 남자는 없어?”
율도 부대 선발대가 의아한 듯 그쪽을 바라보다 이번에 더 이해되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여자들의 손에는 칼이나 창 대신, 이상한 무기가 들려있었는데, 그건 방금 뜯어먹던 노루와 멧돼지의 넓적다리뼈였다. 아직 덜 삶겨졌는지 아직도 뼈에서 피가 흥건히 묻어났다. 더 이상한 건, 남자들은 여자들 뒤에서 무서운 듯 벌벌 떨고 있다는 점이었다.
“뭐야? 뭐야?”
“계집들이 전면에 서고 사내들은 모조리 뒤에서 떨고 있다?”
율도 부대원들은 이 장면이 너무 낯설었다.
이즈음 율도는 마을 언덕에서 이 광경을 그저 지켜만 보았다. 이 정도 기세라면 자신이 나서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길 것으로 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여자들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율도 부대의 선발대 앞으로 다가왔다.
“죽여라! 뜯어먹어도 좋다.”
여 촌장의 명령이 있자 그녀들은 마치 악귀처럼 달려들었다.
퍽, 퍼벅, 퍽퍽퍽!
“아악!”
“살려 줘.”
여자들이 휘두른 넓적다리뼈가 얼마나 흉포한 무기인지 그걸 한 대 맞은 병사들은 신음도 못 내고 그대로 쓰려졌다. 게다가 여자들이 얼마나 힘이 세던지 창을 휘두르는 병사를 번쩍 들어 내동댕이치기가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2선에 있던 남자들이 병사를 손톱으로 할퀴거나 이빨로 물어 죽였다.
“물러서지 마라! 끝까지 싸워라!”
선발 대장은 당황하여 계속 고함만 쳤다. 이상한 백병전이었다. 율도 부대 선발대는 나름대로 용감하게 적에 맞섰지만, 점점 버거워하고 있었다. 이제 이 이상한 부대로 인하여 전세는 역전되고 있었다. 언덕에서 율도와 함께 전투를 지켜보던 책사 김이 다급하게 율도에 권했다.
“출격해야 합니다. 저러다 다 죽겠습니다.”
“그렇네요. 알겠습니다.”
율도는 전 병력에 소리쳤다.
“전원 공격하라!”
할 수 없이 율도는 주력 부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했다. 아까보다 더 큰 부대가 몰려오자, 여자들은 넓적다리뼈 등을 버리고 마침내 창과 칼을 들었다. 남자들은 후미에서 돌을 던질 준비를 하였다. 그 광경을 본 율도는 주력 부대 중 가장 날쌘 이들에게 명령했다.
“후미로 쳐들어가 남자들부터 없애라.”
“알겠습니다.”
그들이 대열에서 이탈하여 적 후미로 들어갈 때 율도는 이번엔 궁수들에 명령했다.
“근접하면 앞에 있는 여자들부터 쏴라.”
율도의 전략은 적중했다. 그들의 후미에 있는 남자들의 목을 베니, 앞줄에 있는 여자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쏴라!”
퍽, 퍽, 퍽
여 촌장을 제외하고 나머지 여전사들은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졌다.
“백병전이다. 모두 칼을 들어라.”
말에서 내린 율도와 부대원들은 칼을 들고 돌진하였다. 그러니 끈 떨어진 자웅동체 마을 여전사들도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도 여 촌장은 정말 용감한 여전사였다. 그녀는 율도 부대원들이 휘두르는 칼에 몇 방을 맞고도 손에 잡히는 병사들을 어깨높이로 들어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저건 그냥, 괴물인데요?”
책사 김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율도에 말하자, 율도는 병사들을 물리쳤다.
“모두 비켜라. 내가 상대한다.”
부대원들이 길을 터주자 마침내 율도와 여 촌장의 일대일 대결이 시작되었다.
“샌님 같은 녀석이 용기가 가상하네.”
율도 역시 지지 않았다.
“죽기 전에 그냥 항복하시오. 개죽음당하지 말고.”
“푸하하, 어린놈의 새끼가. 별말을 다 하네.”
둘은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다 여 촌장이 옆으로 돌면서 먼저 칼을 휘둘렀다.
‘억!’
그 공격에 율도의 어깨가 맞았다. 몹시 아팠지만, 율도는 내색하지 않고 그녀의 빈틈을 노렸다. 그새 여 촌장이 칼을 이리저리 휘돌리며 공격하였지만, 율도는 잘도 피했다. 그러다 율도는 그녀의 허점을 발견했다. 그건 그녀가 칼을 휘돌릴 때마다 공간을 내어주는 머리 쪽이었다.
‘저거다.’
율도는 재빨리 허공을 날았다. 놀란 여 촌장이 자신의 칼을 머리 위쪽으로 돌릴 때, 율도는 빈틈 속에 보이는 얼굴을 발로 차버렸다.
퍽!, 헉!
여 촌장은 충격으로 비틀거리면서 칼을 놓치고 말았다. 율도는 안전하게 바닥에 착지한 후, 그녀에 칼을 겨눴다.
“졌소!”
율도 부대원들의 박수와 함성이 터졌을 때 여 촌장은 무릎을 꿇었다. 율도는 이 여자를 죽일 마음이 없었다. 마침내 싸움은 끝이 났다.
“와! 평화마을 만세! 백율도 만세!”
율도는 마을 지휘소가 있는 천막을 불로 태우고 싸움에 적극적이었던 촌장과 포로들을 바닥에 꿇어 앉혔다. 특이하게도 이곳 촌장은 백발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했다.
“내 부하들과 우리 마을 사람들만큼은 살려 주시오.”
그녀는 스스로 혀를 깨물고 죽었다.
“이분을 양지바른 곳에 고이 묻어주시오.”
이로써 지리산에서 자웅동체 정착촌은 사라졌고, 이 마을은 율도의 평화마을에 종속되었다. 율도는 이곳에 자신의 심복과 약간의 병사를 주둔하게 하고, 마을로 금의환향하였다.
“마지막이다.”
율도는 자신의 숙소에서 늦은 밤까지 책사 김과 있었다. 바깥엔 귀뚜라미가 울고, 바람이 스산했다. 이제 남은 마을은 좀비 마을이었다.
‘예사 놈들이 아니야.’
율도는 지금까지 전투는 그저 전쟁놀이로 치부하였다. 그만큼 좀비 마을은 이제까지 마을과 달리 강하기 때문이었다. 작년과 올봄, 놈들이 평화마을을 습격하였을 때, 율도는 아무리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놈들의 특이성을 보았다. 그래서 이번 전투는 책사, 김과 함께 치밀하게 작전을 짰다.
“지금까지 방법대로 우리가 쳐들어가는 것은 곤란합니다.”
책사, 김이 먼저 의견을 말했다.
“이유가 뭐죠?”
“세 번의 전투로 병사들의 사기는 높지만, 곧 한파가 닥칩니다. 우리 병사들은 추위에 약하죠.”
책사의 말에 율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면?”
“그들이 우리에게 오게 하는 겁니다.”
그건 일종의 유인책이었다. 책사는 율도가 직접 부대를 끌고 놈들의 마을을 향하지 않고 외려, 놈들을 부르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곧 가을 수확기였고 조금 지나면 겨울이 올 것이어서 배고픈 놈들이 제 발로 평화마을을 습격하도록 하는 유인책이었다.
“좋은 전략입니다. 그렇다면 세부적인 전술은요?”
율도의 말이 끝나자, 책사 김은 미리 준비한 지도를 펼쳤다.
“이건 마을 지도 아닙니까?”
“네, 이곳! 이곳을 보십시오.”
그곳은 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였다.
“아니, 이곳보다 해자가 있는 곳에서 방어하는 게 더 쉽지 않은가요?”
율도가 의아한 듯 그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이곳에 함정을 팔 겁니다. 그래서 놈들을 유인하여 일부를 빠뜨린 후, 전세를 우리가 유리하게 할 계획입니다.”
‘함정이라?’
“그렇다면 웅덩이를 판단 말입니까?”
“네, 그렇다 하더라도 단순하게 웅덩이만 파는 게 아닙니다.”
“그게?”
“아시다시피 놈들의 생명력은 끈질깁니다. 아무리 죽여도 살아나는 그놈들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선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해야 합니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율도는 책사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꾸미는지 아직 짐작이 가지 않았다.
“도대체 구덩이 안에 뭘 넣는다는 겁니까?”
율도가 궁금해하자 책사 김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야생동물입니다. 굶주린 늑대와 멧돼지 등이 적격이겠지요.”
그제야 율도는 책사의 뜻을 이해하고 빙그레 웃었다.
‘역시, 뛰어난 자야.’
다음 날, 율도는 사냥에 능한, 날랜 병사들에게 늑대와 멧돼지 등 야생동물을 잡아 오라고 명령했다.
“야생동물요?”
“네, 맞습니다. 단 그것들을 산 채로 잡아 오십시오.”
율도의 엉뚱한 명령에 병사들은 갸우뚱했지만, 즉시 야생동물을 포획하러 날랜 병사들이 산속으로 출발했다.
“나머지 병사들은 곡괭이나 삽 등을 들고 날 따라오세요.”
율도는 병사들에게 책사가 말한 대로 미리 마을 진입로에 구덩이를 파게 했다.
“도대체 촌장님이 무슨 꿍꿍이로 이런 일을 시킬까?”
땅을 파던 일부 병사들이 속으로 불만을 터뜨렸지만, 아무도 대놓고 불평하지 않았다.
“그래, 총명한 촌장님께서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야.”
그날 오후쯤, 구덩이가 완성되었고, 산으로 간 병사들이 늑대와 멧돼지를 잡아 왔다.
“이것들은 구덩이에 던져 넣으세요. 그리고 매일 죽지 않을 정도의 먹이만 주도록 하십시오.”
그런 후, 구덩이 위를 나뭇가지와 풀을 덮었다. 완벽한 함정이 탄생한 것이다.
좀비 마을 촌장 허구도는 율도가 부촌과 북쪽 거인 마을 그리고 자웅동체 마을을 접수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어린놈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세 마을이 당했다는 걸까?’
그는 믿을만한 수하를 불렀다.
“네, 촌장님. 부르셨습니까?”
“평화마을 백율도와 그의 병사들에 관해 자세히 알아보았나?”
“물론입니다. 누구 명령이신데.”
“너스레 떨지 말고 보고해 봐.”
허구도가 정색하자, 수하의 낯빛이 어두워지면서 몸을 떨었다.
“네, 백율도는 어릴 때 도인촌에서 자라 무술뿐만 아니라, 장풍, 순간 이동, 염력, 투시 등이 탁월하다고 합니다. 평화마을 촌장이 된 후로, 지리산 정착촌 통일을 목표로 세를 규합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병사들 또한 현재 사기가 높고, 결속력이 대단하다고 전해집니다.”
수하의 말에 허구도는 혀를 찼다.
“알았어.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단 말이야. 그것보다 이내 놈들이 우리 마을에도 쳐들어오겠지?”
“그야, 당근이지 않습니까.”
“새꺄! ‘네’, '아니오.'로 말하란 말이다!”
“네, 올 것 같습니다.”
“그러면 오늘부터 당장 습격에 대비해!”
“알겠습니다!”
허구도의 말이 떨어지자, 수하는 즉시 마을 장정들을 모아 준비를 시작했다.
“어이, 거기! 흐느적거리지 말고 똑바로 하란 말이야.”
수하는 몸을 비틀며 느릿느릿하게 작업하는 자들을 세차게 몰아세웠다. 그래서 율도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마을 입구에 구덩이 여러 개를 파고 풀로 잘 위장하였다. 그런 후, 수하는 마을 입구 양 가에 매복조를 심어 두었다.
“완벽하게 준비하였습니다.”
수하가 허구도에게 보고하였다.
“그래, 수고했어.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구먼.”
그런데 가을 수확기에 공격하리라고 예상했던 율도의 부대는 겨울 초입까지 오지 않았다.
‘뭐지? 무슨 꿍꿍이지?’
허구도는 초조하여 식사도 잘하지 못하였다. 그때 수하가 들어왔다.
“촌장님, 큰일 났습니다.”
“뭐야? 이제 쳐들어왔어?”
허구도는 율도의 부대가 기습공격을 한 줄 알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새꺄! 빨리 말해!”
허구도는 포악하고 성미가 급한 자였다.
“그게 …, 마을에 먹을 게 다 떨어졌습니다.”
“뭐? 비상식량도 없어?”
“네, 모두 굶다 보니, 일부에서 폭동 조짐도 있습니다.”
낭패였다. 그동안 전쟁 준비하느라 다른 마을 습격도 가지 않다 보니, 그동안 탈취한 식량도 바닥났고 잡아먹을 가축도 없었다. 허구도는 한참을 고민하다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먼저 공격한다.”
“네?”
“새꺄! 말 못 들었어? 모두 출정 준비시켜! 당장!”
할 수 없이 허구도는 부하들을 데리고 평화마을을 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가 지리산 동쪽에 첫눈이 오는 겨울이었다.
그날, 평화마을 척후병이 삼신봉에서 봉화가 피어오르는 것을 확인하였다.
“봉화가 피어올랐다!”
이 소식은 급히 율도에 전달되었다.
“어디입니까?”
“서쪽입니다.”
책사 김이 봉화 쪽을 쳐다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좀비 마을이군요.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만반의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명령만 내리시죠.”
“병사들에게 전투 준비하라고 하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율도는 별도로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책사 김이 주력부대원들을 소집할 동안 율도는 곧바로 마을 진입로로 향하였다. 미리 파 둔 웅덩이 안에 있는 야생동물에게 닭 몇 마리를 던져 피 맛을 보게 하였다. 그리곤 웅덩이를 피해 들이닥치는 놈들에게 치명상을 입히기 위해 길가 숲속에 병사들을 매복시켰다.
“경계 근무 잘하세요. 놈들이 곧 닥칠 겁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오면 바로 보고하겠습니다.”
그렇게 율도는 만반의 준비를 해두곤, 그들을 기다렸다.
“눈이 꽤 오는데요?”
율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진입로 쪽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러긴 해도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할 수도 있습니다.”
율도의 말에 책사는 도무지 미동이 없었다.
“폭설이 우리에게 과연 유리할까요?”
“그럼요. 잠시 후면 알게 될 거지만, 놈들이 오히려 우리보다 추위를 싫어합니다. 원체 사람이 아닌 괴물이다 보니, 폭설과 강풍에 취약할 겁니다.”
율도는 책사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놈들이 온다!”
과연 오후쯤, 폭설이 심할 때 놈들이 촌장 허구도를 앞세우고 마을 입구로 진입하였다. 이에 매복조가 공격하려 했으나, 율도는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하였다. 그건 그냥 두라는 말이었다. 이에 매복조는 만약을 위해 계속 수풀 안쪽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율도는 일부러 웅덩이 앞쪽으로 놈들을 마중 나가 허구도의 약을 올렸다.
“사람도 아닌 것들이 폭설에 여기까지 온다고 정말 수고했소.”
“뭐? 이 새끼가!”
허구도는 율도가 직접 나와 자신을 희롱한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그런데도 한편,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놈은 우리가 온다는 걸 알고 있었나?’
허구도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율도는 담대하게 그를 꾸짖었다.
“당장 돌아가지 않으면 당신들의 씨를 말리겠소. 어떡할래요? 돌아갈 겁니까, 아님 여기서 죽을래요?”
상황이 이쯤 되자, 허구도는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선발대에 명령했다.
“공격하라!”
크르릉, 크르릉, 캬악, 캬아아아아악!
그런데 선발대의 면모를 본 율도는 기가 찼다.
카악, 카아아아악, 칵! 칵!
하나 같이 괴상한 울음을 뱉으며 목이 뒤로 꺾이고 몸이 활처럼 구부러진 놈, 경련을 일으키며 눈알이 시뻘건 색으로 변한 놈, 어깨 한쪽이 뒤틀리고 목이 부러진 놈, 오른쪽 옆구리가 터져 장기가 보이는 놈, 하체가 끊어졌음에도 상반신으로 기어 다니는 놈 등등이었다.
놈들을 지켜보던 책사 김이 한마디 했다.
“저게 뭐야? 정말 사람이 아니라 숫제 짐승들이네.”
율도 뒤의 병사들도 놈들의 면모를 보자 기겁했다.
“세상에, 북쪽 거인 마을 종자보다 훨씬 상태가 나쁘다.”
“그러게. 저것들은 완전 괴물이다, 괴물이야.”
그때 평화마을 선발 대장이 율도에 물었다.
“촌장님! 어떡할까요? 맞설까요?”
그러자 율도가 재빨리 손을 들며 외쳤다.
“후퇴! 후퇴하라!”
작전상 후퇴인 줄도 모르는 허구도가 율도와 병사들이 도망가는 것을 보자, 신이 났다.
“저것들이 도망간다. 모조리 잡아서 족쳐라!”
크르렁, 크르렁, 카아아아악!
그런데 괴물들이 멋도 모르고 웅덩이 쪽으로 다가서다 그만 빠지고 말았다.
꺄아악! 꺅, 꺅, 꺄악!
으르릉, 으르르르릉!
그때부터 웅덩이 안에서 굶주린 야생동물의 울음소리와 괴물들의 비명이 섞이면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뭐야? 함정이었어? 내, 이것들을!”
화가 치민 허구도는 직접 놈들을 이끌고 웅덩이 옆쪽으로 진격했다. 그때였다. 도망가는 척하던 율도가 뒤로 돌아 손을 올리자, 놈들의 뒤 숲속에 매복해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화살을 쏟아부었다.
퍽, 퍽, 퍽!
꺄아악, 크렁, 꺅!
화살은 정확하게 놈들의 몸뚱어리가 아닌 대가리에 꽂혔다. 그와 동시에 책사 김이 주력 부대를 출정시켰다.
“모조리 베어라, 특히 놈들의 대가리를 잘라야 할 것이야.”
주력부대원들은 이미 들은 바가 있어, 칼 외에도 도끼, 창, 작두 등을 들고 용감하게 나아갔다. 이른바 백병전이었다. 얼마나 율도의 부대원들이 타격을 잘했는지 놈들의 뇌수가 터지면서 두 번 다시는 그때처럼 살아나지 못하였다.
크아앙아아아악!
촌장 허구도는 얼이 빠져 더는 항전을 못 할 지경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이 죽든지 말든지 뒤돌아서서 도망치다, 그만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아악! 사람 살려!”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한 좀비 마을 촌장 허구도는 그만 늑대 밥이 될 뻔하였다. 그가 구덩이에 빠지자 전쟁은 거의 끝이 나고 말았다. 평화마을 진입로엔 대가리가 떨어진 좀비 시체가 가득했다.
“지독한 냄새구먼.”
“그려, 이놈들은 애초 사람이 아니래도.”
퍽, 퍽, 퍽!
꺄아아아아악!
병사들이 땅을 헤집어 아직도 숨이 붙은 괴물을 창으로 찔렀다.
“이놈들을 어떻게 할까요?”
병사 한 명이 율도에게 묻자, 그는 바로 말했다.
“모두 구덩이에 처넣고, 불 질러라.”
그런데 그때 책사 김이 나섰다.
“촌장님, 허구도 촌장은 살려줍시다.”
책사의 말에 율도는 의아했다.
“왜요?”
“허구도는 지리산에서 유일한 무당입니다. 행여 통일된 지리산 공동체 마을에 흉한 일이 생기면 저자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율도는 책사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도시와는 달리 이곳은 아직도 민간신앙이 남아 있었고 특히 무당은 어르신들에게 필요한 존재였다.
“좋습니다. 그럽시다.”
가까스로 허구도는 살아남았고 나머지 놈들은 결국 모두 불에 태워졌다. 율도의 대범함과 책사의 기발한 작전계획으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날 밤, 평화마을엔 경사가 났다.
“지리산 정착촌에 평화가 왔다.”
“백율도 촌장 만세!”
“평화마을 만만세!”
마침내 평화가 왔다는 사실에 마을 사람들 모두 밤새도록 마시고 뛰놀았다. 이곳, 축하연 율도의 옆자리에 꽃비가 앉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그날 밤에 책사, 김이 율도에게 건의한 게 있었다. 그건 네 마을에 아직 남아 있는 잔당들의 처리 문제였다. 이를테면 부촌 마을에 여전히 반발하고 있는 전직 조폭을 비롯한 이른바 잠재적인 반란 세력 등이었다. 책사 김은 내일이라도 이들을 색출하여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율도에 충고했다. 하지만 율도는 그건 너무 잔인한 조치라고 그의 주장을 거절하였다. 이게 훗날 두고두고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할 거라곤 율도는 알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