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유토피아로 가는 여정

by 이인규

그로부터 사흘 뒤, 자웅동체 마을엔 복면을 쓴 남자 여럿이 숨어들었다. 그들은 밤이 깊어지길 기다렸다가, 율도가 갇혀있는 곳을 귀신같이 찾아 들이닥쳤다. 간수들이 근무를 서고 있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을 발견한 간수 몇이 호각을 불려 할 때 단번에 제압한 것이다. 그들 중 한 명은 책사, 김이었다.

“촌장님! 오셨군요. 얼마나 고초가 크십니까?”

그는 공동체 마을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율도 앞에서 눈물을 쏟아냈다.

“와주신 것만 해도 고맙습니다. 그런데 함께 데리고 가야 할 사람이 또 있습니다.”

율도는 꽃비의 어머니를 소개했다.

“알겠습니다. 어서 나오십시오. 하지만 이 분 외에 더 데려갈 순 없습니다.”

책사 김은 옆방을 가리키며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율도는 나오자마자, 옆방에 갇힌 A 촌장에게 인사했다.

“기다리십시오. 곧 데리러 오겠습니다.”

“네, 촌장님의 귀환이 제일 중요합니다. 거사 전에 연락해주십시오. 저희도 이곳에서 항거하겠습니다.”

마침 그날 밤은 그믐이었다. 책사 김 일행은 율도와 일행을 호위하며 조심스럽게 마을을 나왔다. 율도는 서울에서 타고 온 지프를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렸으나, 그건 다음에 찾으면 될 거로 생각했다.

컴컴한 밤에 회남재를 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율도는 차지하더라도 꽃비와 어머니의 발걸음이 늦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들은 무시무시한 감옥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율도 일행이 공동체 마을에 도착한 건 어렴풋이 먼동이 틀 때였다. 그때 율도는 지진이 일어난 것과 화산이 폭발한 것에 대한 실감이 났다. 해가 점점 산 위로 떠 오르자 매캐한 냄새와 함께 화산재가 날아다녔다.

마침 마을 입구에 한 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장님!”

율도는 무엇보다 한 소장이 죽지 않고 살아있음에 눈물이 나왔다.

“그래, 정말 미안하구나. 네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져 널 볼 면목이 없다.”

그새 한 소장은 십 년이나 늙어 보였다. 목소리도 다리에도 힘이 없어 바람이 불면 금방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마을은 제가 복원하겠습니다. 그리고 반역자들 또한 제가 반드시 소탕할 것입니다.”

율도는 꽃비와 어머니를 쉬게 한 후, 자신의 집무실에서 곧바로 긴급회의를 열었다. 책사 김이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였고 이어 현재 남아 있는 병력과 무기 등의 재고를 알렸다. 과연 병사들은 율도가 떠나기 전 1/5수준이었고, 무기라고 해봐야 칼과 창 등 원시적인 것밖에 없었다. 이에 율도가 심각한 표정으로 책사를 바라보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일단 내일 제사부터 모셔야겠습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마을 주민들의 영령부터 달래는 게 순서일 것 같습니다.”

책사가 눈을 크게 떴다.

“네? 굿을 하겠다는 말씀입니까?”

“네.”

“저기, 우리 마을엔 무당이 없잖습니까? 더군다나 마을 제사라면 제법 큰 규모로 해야 할 터인데. 지금 우리 마을 형편으론.”

책사의 말에 율도는 고개를 저었다.

“제사(굿)는 조촐하게 하면 될 것이고 무당은 그때 좀비 마을에서 살려준 허구도 씨가 있지 않습니까? 그가 주관하면 되니까요. 이래 봬도 저 역시 어릴 때 도인촌 장 도인에게 배운 게 있습니다. 또 저를 도와 꽃비 씨 어머니가 일정 부분 힘을 보탤 겁니다.”

책사는 고민 끝에 율도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였다.

다음 날, 율도의 지시로 다음 날 폐가로 변한 마을 회관 앞에 굿이 시작되었다.

마침내 꽃비의 어머니가 제단 앞에 앉아 북을 들어 한 차례 두드리자, 허구도가 주관하는 가운데 율도가 지화를 들고 춤을 추며 노래를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이며 그의 춤과 노래에 빠져들었다.

“아니, 촌장님은 언제 저런 것도 배웠대?”

“하여간 난 분이야. 무당보다 더 나은 것 같아.”

이날 이때까지 마을 사람들은 한 번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던 춤과 노래였다. 율도의 춤사위는 한 마리 학과 같았으며, 목소리는 꾀꼬리 같았다. 북소리가 강렬해지면서 율도의 춤과 노래도 보는 사람이 숨을 못 쉴 만큼 빨라지면서 황홀했다.

‘두둥.’

춤을 추던 율도가 갑자기 멈추더니 하늘을 향해 큰절했다. 그때였다. 믿지 못할 광경이 눈앞에서 일어났다. 맑았던 하늘이 시커먼 구름으로 덮이나 싶더니 공중에서 강한 회오리가 일어났다. 회오리는 시커먼 하늘로 말려 올라가면서 한 가닥마다 사람의 얼굴 형체가 나타났다, 금방 사라지는 기이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찡그린 얼굴, 고통에 찬 얼굴, 눈이 없는 얼굴, 코와 귀가 없는 얼굴, 슬픈 얼굴……. 그때 마을 사람 몇이 정신이 나간 것처럼 무리를 박차고 제단 앞으로 나와 자지러졌다.

“어무이요!”

“아부지!”

이 광경을 본 책사 김은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봤기에 이런 헛소리를 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곧이어 마을 주민 중 반 이상이 고함을 지르면서 울고 있었으므로, 책사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혹 이런 게 집단 환시인가 생각했다. 삽시간에 마을 회관 앞은 주민들의 울음바다가 되었다. 앉아서 부르짖는 사람, 땅을 치며 통곡을 하는 사람, 하늘을 향해 멍한 표정을 짓는 사람 등 각자의 모습은 달랐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의 마음 깊숙이 박혀 있던 한(恨)이 동시에 풀리는 것 같았다.

“난 봤어. 분명히 우리 아버지야. 날 향해 눈물을 흘렸어. 아! 불쌍한 아버지.”

“이제야 좋은 곳으로 가다니, 지금까지 우리는 뭘 했단 말이야! 아아,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네.”

마을 사람들은 그동안 말도 못 하고 안으로 곪아 터지는 사정을 밖으로 풀어내는 데에 거침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자 마을 사람들의 분노와 탄식은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공동체 마을에 드리워진 짙은 안개가 걷혔다. 사람들의 마음에 작은 빛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서로 원망하던 사람들 앞에 섰다. 그들은 난리 때와 한 달 전 놈들의 반란으로 억울하게 죽은 가족의 설움과 아픔에 무심했던 자신들을 책망하려는 듯 안아 주었다. 그러니 서로의 눈에 굵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사람들은 서로 “지켜주지 못하여 미안하다”, 하고 말을 했다. 그 한마디에 율도가 서울로 간 뒤, 지금까지 마을 사람들 간의 견고한 벽이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그 한마디가 불씨가 되어 서로 자책하며 갈라진 마을 사람들의 이편, 저편의 담이 무너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율도에 진심으로 “고맙다”라고 했다. 그때마다 사람들의 표정이 선하게 바뀌었다.

율도는 평화공동체 마을이 한순간의 실수로 더는 분열과 대립 그리고 고통으로 점철된 장소가 아닌 용서와 화해의 땅이 될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기 고향은 아니지만, 앞으로 그와 자손 대대로 살게 될 마을이므로 율도는 오늘 굿을 잘하였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도 이렇게 하셨을 거야.’

잠시 뒤 마을 사람들은 다시 한번 평화마을이 통일을 이룰 거로 기대하였다.

“놈들의 본거지가 부촌 마을 이랬습니까?”

분노한 율도가 책사에게 물었다.

“네, 부촌 마을에 통일 전, 네 마을 반란군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곳 수장은요?”

“죽은 마충기의 행동대장입니다.”

율도는 통일 전에 일대일로 겨뤘던 그자의 기억이 났다. 그때 분명하게 놈의 명줄을 끊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사흘 뒤, 공격합시다.”

율도의 말에 책사와 부하들이 몸을 움찔했다. 그건 소수의 병력으로 놈들의 본거지에 들어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로 치부하는 거였다.

“촌장님, 현재 우리 병력으론 곤란합니다. 오늘부터라도 우리와 뜻을 같이할 사람들을 모은 후 공격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율도는 완강했다.

“그 사람들을 언제 모으고 또 언제 훈련한단 말입니까? 그냥 제 말대로 합시다. 우리가 숫자가 적으면 게릴라전을 펼치면 됩니다. 그 훈련은 예전에도 많이 해보았으니 분명히 승산 있습니다.”

율도는 책사의 말을 무시하고 지도를 펼쳤다.

“여기 부촌 마을 뒤편으로 공격합니다. 이쪽은 경비가 허술하거든요.”

그곳은 일전에 율도가 꽃비와 함께 도망쳐오던 마을 뒤편 숲이었다. 그 길로 몰래 잠입하면 마을 중심부에 도달할 수 있고 그러면 삽시간에 놈들을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불화살과 긴 창 그리고 허리에 찰 칼을 준비하십시오.”

그리곤 일사천리로 기습공격 작전을 짰다. 그런 후 율도는 사흘 동안 직접 모의 전투를 지휘했다. 그리고 D-day에 맞추어 부촌 마을에 돼지고기와 술을 넉넉하게 상납하라고 지시했다.

사흘 뒤, 율도는 폐허가 된 공동체 마을, 회관 앞에 간단한 출정식을 마련했다. 여기서 살아남은 주민들을 뒤로하고 전의를 불태웠다. 이미 일부는 부촌 마을 반란군들이 충분히 먹고 마실만큼의 술과 고기를 가지고 출발했다. 율도는 그들이 흥청망청 술과 고기를 먹기를 기다리며 부촌 마을 숲에서 시간을 벌었다. 마침내 때가 왔다.

“공격하라!”

율도의 명령에 따라 1조가 옛 마충기의 집과 마당을 향해 불화살을 쏘았다. 율도가 예상한 대로 그들은 마당에서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뭐야? 불? 불이다. 아니, 적이다!”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다급함과는 달리 그들은 배불리 먹은 고기와 흥청망청 마신 술 때문에 몸을 가누지 못하였다.

“이런! 움직이지 못하겠어.”

이어 율도의 명령이 또 떨어졌다. 이번엔 2조가 즉각 침투하여 긴 창으로 그들의 배를 찔렀고, 반항하는 자들에겐 허리에 찬 칼을 휘둘렀다. 옛 마충기의 저택 마당에는 이내 비명과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이어 외곽 경비를 서거나 숙소에서 쉬는 놈들을 색출하여 모조리 죽이고 말았다. 그리하여 전투는 두어 시간 안에 끝이 나고 말았다. 율도 앞에 행동대장이 끌려왔다.

“할 말이 있나?”

“어린놈에게 두 번이나 패하여 억울할 따름이다.”

율도는 지난번 실수를 두 번 반복하고 싶지 않아 직접 그의 목을 벴다. 그리곤 칼을 높이 들었다.

“지금 즉시 북쪽 거인마을 서쪽 좀비 마을 그리고 남쪽 자웅동체 마을로 진격한다. 그래서 우리 공동체 마을 사람들을 죽인 놈들을 응징하자!”

“와아!”

승기를 잡은 율도의 병사들은 부촌 마을의 말을 훔쳐 타고 북쪽부터 치기 시작했다. 거리가 있어 이동하는 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율도의 부대는 용감하게 싸워 북쪽과 서쪽의 잔당들은 모조리 처치할 수 있었다.

맨 마지막 자웅동체 마을을 찾았을 때였다. 율도의 부대가 승전 끝에 이곳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감옥 안의 A 촌장과 병사들은 필사의 탈옥을 감행했다. 이건 그때 율도와 약속했던 바였다.

한밤중, 배탈이 났다고 속인 병사 때문에 간수가 문을 열자, A 촌장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를 제압했다. 그리곤 바로 감옥 밖으로 나가 나머지 간수들을 죽이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저길 보십시오. 멀리 횃불이 보입니다. 우리 쪽으로 오고 있어요.”

A 촌장은 율도 부대가 오고 있다고 확신하고 자신을 가둔 자웅동체 마을 촌장 집을 급습했다. 여 촌장은 아직 보고받지 못했는지 자신의 방에서 자고 있었고 밖엔 경비 두어 명이 졸고 있었다.

“베어라.”

경비를 죽이고 들어가 보니 과연 여 촌장은 자고 있었다.

“일어나라.”

A 촌장은 그녀에게 명령한 뒤, 부하들을 시켜 그녀를 꽁꽁 묶었다. 잠시 뒤 북 치는 소리가 들리는 거로 봐서, 이제야 자웅동체 마을 병사들이 사태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과연, 율도의 부대가 입구를 지키던 마을 병사들을 간단히 제압하고 마을회관으로 당당히 들어왔다. 회관 앞에는 일단의 병사들이 창을 겨누고 있었지만, 이미 기울어진 형국에 싸울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때 A 촌장이 여 촌장을 끌고 왔다.

“너희 우두머리를 잡았으니 모두 무기를 버려라.”

그렇게 말하곤 A 촌장도 율도 앞에 꿇었다.

“약속대로 오셨군요. 하여, 저도 약속을 지켰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촌장님.”

율도는 승기를 확신하고 자웅동체 병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모두 꿇어라!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율도의 추상같은 목소리에 자웅동체 병사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율도 앞에 꿇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벌벌 떨고 있던 여 촌장 역시 시키지도 않았는데 율도에 머리를 조아렸다.

“자비를 베풀면 안 됩니다. 살려두면 언제 또 화근이 될지 모릅니다.”

율도는 책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명령은 달랐다.

“여 촌장을 풀어줘라.”

이에 병사들이 의아해하며 여 촌장의 밧줄을 풀어주자, 율도는 그녀 앞에 칼을 던졌다.

“자결하라!”

그녀가 죽자, 율도는 A 촌장을 원래대로 이 마을의 지도자도 세웠다. 그리곤 자신의 지프를 되찾아 공동체 마을로 돌아왔다.

“지리산 평화공동체 마을 만세!”

“백율도 촌장 만세!”

주민들의 기쁜 함성이 온 마을에 울려 퍼졌다.

재차 통일을 이룬 지리산 정착촌은 힘을 합쳐 재건을 시작하였다. 먼저 화산재를 깔끔하게 치우고 지진으로 무너진 집과 건물을 세웠다. 논과 밭 역시 농사짓기에 적절하도록 정비하였고 도로와 하천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꽃비와 그녀의 어머니는 마을 여자들과 함께 마을 재건에 참여한 남자들을 위해 밥을 짓고 음식을 나르는 등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였다. 힘들고 배고픈 노동이었지만, 꽃비도 그녀의 어머니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힘들지 않으세요?”

가끔 율도가 그녀의 어머니께 이렇게 물었으나, 그녀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사람 사는 세상 같으니 너무 좋으이. 서울보다 백배 나으니 걱정하지 마소.”

이들의 대화에 꽃비도 웃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이렇게 몇 개월간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마을을 재건하니 서서히 공동체 마을의 형태가 예전처럼 갖추어지고 있었다. 여기에다 한기백 소장은 ‘연 발전기’뿐만 아니라 태양광, 풍력, 차세대 바이오매스 연료, 지열발전 등을 개발하였다. 율도는 이상기후와 원전 사고의 폐해를 직접 눈으로 봤기에, 재생가능 에너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이에 그는 지리산 정착촌 사람들에게 한 소장이 개발한 에너지를 사용하게 하고, 겨울철 난방용으로 나무 때는 것도 아예 금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소장이 몸져누웠다. 율도가 촌장으로 부임할 때 이미 몸이 상할 대로 상했지만, 오로지 그는 대체에너지 개발을 위해 생명을 연장한 터였다. 율도가 그의 곁을 지켰다.

“율도야, 요즘 들어 네 아버지가 꿈에 자주 나타난단다. 그 양반이 세상 떠날 때 널 내게 부탁했었지. 내가 너의 아버지 뜻대로 잘 거두어주었는지 모르겠구나.”

율도는 한 소장의 기력이 점점 떨어지는 것에 안타까움이 밀려들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소장님은 저의 아버지 같은 분이었습니다. 제게 최고의 어른이었다니까요.”

“그랬으면 다행이다. 쿨럭! 그건 그렇고. 이제 우리 공동체 마을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 잘 생각해보렴.”

율도는 그의 말에서 아버지의 유언을 떠올렸다.

‘이상 사회.’

“네,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꿈꾸던 그런 사회를 반드시 이루고 말 겁니다.”

“그래, 네 아버지가 짧은 평생을 꿈꾸어오던 그런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어야지, 넌 할 수 있을 거다.”

그 말만 하고 한 소장은 아버지 곁으로 떠났다. 율도를 비롯한 공동체 마을 사람들은 그가 자신들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후하게 장례를 쳐주었다.

한 소장의 장례가 끝난 후, 율도는 공동체 마을 중심부에 병원과 학교 그리고 간단하게 행정사무를 볼 수 있는 공공기관을 세웠고, 지리산 사람들이 언제든 잉여 농산물을 물물교환할 수 있는 대규모 장터를 세웠다. 자급자족을 바탕으로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사회, 율도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이곳에 ‘이상 사회’를 건설한 것이다.

이제 지리산 공동체 마을 사람들은 소박한 생활에 만족했다. 더는 개발이니, 혁신이니 하는 말을 입에도 담지 않았다.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며, 남는 것은 이웃에게 주었다. 친환경적인 생활 습성이 배인 그들에겐 오염, 폐수, 방사능 같은 단어가 무색했다. 이제 반구형 막도 완전히 사라졌다. 사람들은 예전과 같이 두 눈으로 푸른 하늘을 볼 수도 있었고, 태양과 달빛도 직접 받을 수 있었다.

얼마 후 율도에게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서울의 깨어 있는 시민들이 나서서 무능하고 부패한 군부 정권을 퇴진시켰다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무력 대신 아주 예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벌인 촛불 시위로 새 정부를 탄생시켰고, 그 정부는 공약 1호로 동해 쪽에 남아 있는 원자력 발전소를 영구적으로 폐기했다고 했다.

다음 해, 율도는 꽃비와 결혼했다. 그때부터 율도는 약속한 대로, 서울과 수도권에서 이주하고자 하는 수많은 시민을 지리산으로 불러들이기 시작했고, 새 정부는 지리산 정착촌을 ‘특별자치구’로 지정했다.

율도를 비롯한 소수 사람의 노력이었지만, 이제 지리산은 더는 디스토피아가 아닌, 유토피아가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