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년 후 -
지리산 동부 쪽, 22살 성년이 된 백율도는 저녁 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연장은 참나무로 만든 활과 화살 다섯 개 정도였다. 토끼 고기는 맛도 맛이려니와 기력이 쇠한 사람에겐 최고의 보약이었다.
율도가 이혼한 아버지를 따라 도시에서 지리산 도인촌 근처 청학동에 온 것은 그의 나이 6살 때였다. 처음 정착한 곳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허름한 움막이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매일 술만 마셨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율도를 데리고 도인촌에 자주 데려갔다.
“네 눈으로 똑똑히 보고 배우거라. 이게 이곳의 생존법이야.”
어린 그의 눈에 도인촌의 사람들은 보통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은 아버지와 창문도 없는 방에서 술을 마시면서도 밖에 비가 오는지, 바람이 얼마나 부는지를 알아맞혔고, 예리한 눈빛과 주술만으로도 불을 피웠다. 어떤 땐 손바닥 바람으로 문을 여는가 하면, 한밤중에 읍내에 가서 술을 사 온다며 바람같이 사라졌다, 이내 술을 들고 오기도 하였다. 나중엔 알았지만 이게 도인들이 사용한다던 염력과 장풍 그리고 순간 이동이었다.
그러다 아버지는 율도를 그곳에서 가장 영험하다던 장 도인에게 맡겼다. 겨우 2년이었지만, 영리한 율도는 장 도인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가 율도가 산골 마을 아이들처럼 초등학교에 갈 나이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율도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오전에는 자신이 직접 간단한 공부에 대해 가르쳤고, 오후엔 아무런 도구 없이 불 피우기, 활쏘기와 체력 훈련 등 생존에 필요한 기술을 연마하도록 했다. 그때부터 율도는 난리가 나기 전까지 산과 들을 쫓아다니며 사냥하거나, 마을 사람들의 농사일을 도우면서 지냈다.
그런 즈음 원전 붕괴가 있었다.
“때가 왔다.”
지리산뿐만 아니리 전국에 난리가 난 날, 아버지는 보란 듯이 마을에 대안학교를 세웠다. 읍내의 학교에 갈 수 없었던 아이들은 죄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과목이 보통 학교와는 달랐다. ‘가난하게 살기’, ‘유기농과 자연’, ‘자연의 생존전략’, ‘인문학 입문’ 등, 어린아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과목들이었다.
“아이들에게 뭔 그런 어려운 걸 가르친대?”
“글쎄다. 우리야 알 수가 있나? 그저 백 선생을 믿고 맡길 수밖에.”
아이를 둔 마을 사람들은 약간의 불평을 했지만, 궁극적으로 이 길만이 지리산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임을 애써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율도의 아버지인 백일도를 끝까지 존경한 것이다.
그렇던 율도의 아버지 백일도는 이듬해 그만 술병으로 세상을 떴다. 율도는 그때 아버지가 도시에서 뭘 했는지 비슷한 시기에 산골에 들어온 한기백 소장을 통해 들었다. 아버지는 대학에서 국문과 재학 시 신춘문예에 당선한 시인이었다. 졸업 후 한때 교편을 잡았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옮긴 곳이 환경을 취급하는 일간지 기자였다. 그때 아버지는 환경 오염과 지구 황폐화에 관하여 공부를 많이 했고, 그 시기에 한 소장과 죽이 맞은 모양이었다.
율도는 아버지가 술에 취하면 늘 하던, “다음 세상이 온다”, 하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인간들이 저질러 놓은 환경 오염으로 이 세상이 멸망하고 다른 세상이 올 것을 예언했다. 그래서 자신을 정규 학교에 보내지 않고 오롯이 생존에 필요한 교육만 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건 아버지의 일기장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 이제 인간은 고대의 신(神)에 버금가는 능력을 보유했다. 세상을 창조할 수도, 파괴할 수도 있다.
‘토끼 사냥하기엔 참 좋은 날씨야.’
율도는 얼마 전부터 건강이 악화한 ‘대체에너지 기술연구소’ 소장이자,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인 한기백 소장을 위해 손수 토끼탕을 마련하고자 삼신봉으로 올라갔다.
삼신봉 골짜기는 동그랗게 숲을 감싸 안고 물이 계곡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골짜기를 둘러싼 언덕들은 울창한 숲으로 뒤덮여 있었다. 여름이면 숲에 들꽃이 만발했다.
짙은 숲과 풍부한 수량의 계곡은 토끼 등 산짐승들이 거주하기 좋은 천혜의 땅이었다. 마침 계곡 근처에서 목을 축이려던 율도는 얕은 개울가 숲속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토끼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토끼라고 확신한 율도는 급하게 활에 화살을 장착했다. 그런데 그건 토끼가 아니라 어떤 여자의 다급한 움직임이었다.
“살려주세요!”
율도는 깜짝 놀라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가관이었다. 그곳엔 두 팔을 축 늘이고 흐느적거리는 좀비 같은 놈들 둘, 셋이 어떤 젊은 여성을 둘러싸고 있었다.
크르릉 크르릉 카아아아악!
놈들은 서부 쪽 정착촌에 기거하는 것들이었다. 가뜩이나 순박한 지리산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놈들이어서 율도는 이 기회에 놈들을 단단히 꾸짖기로 작정했다.
“뭐 하는 거야! 당장 여자에게 떨어져!”
율도는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그런데도 한 놈은 멀뚱히 율도를 쳐다보았고, 나머지 두 놈은 되려 여자 쪽에 더욱 근접하였다. 이에 율도는 화가 치밀어 순식간에 공중을 날았다.
퍽, 퍽퍽!
오른발로 한 놈을 가격하고 내려가면서 왼발로 나머지 놈들을 후려치니 셋은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크크크, 끄억.
얼마나 놀랐던지 여자의 옷매무시가 흩뜨려져 있었다.
“괜찮아요?”
“네, 감사합니다.”
율도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켰는데, 한눈에 봐도 굉장히 예뻤다. 율도는 살면서 이토록 첫눈에 가슴이 떨리기는 처음이었다. 아마 그녀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동부 쪽, 부촌 마을에 사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곳에 얼굴이 하얗고 팔다리가 긴 젊은 여성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부촌 마을에서 왔죠?”
율도의 물음에 그녀는 겨우 입을 열었다.
“계곡이 하도 좋다고 하여 더위를 씻으러 왔다가 봉변당하고 있었어요. 구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렇군요. 이런 곳은 혼자 오기엔 위험한 곳입니다. 혹시 이름이?”
율도는 어떻든 기회를 잡고 싶었다.
“꽃비.”
그녀가 수줍게 말하여 율도는 정확히 듣지 못했다.
“네? 꽃, 뭐요?”
“꽃비라고 부른답니다.”
그녀의 이름은 ‘꽃비’였다. 얼굴만큼 예쁜 이름이라고 율도는 생각했다.
“저는 율도라고 해요. 백율도.”
“네, 기억하겠어요.”
율도는 그때까지도 무서움에 떨고 있는 그녀를 위해 손수 집 근처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런 후 삼신봉으로 돌아와 겨우 토끼 한 마리를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시작된 바람은 몇몇 능선을 돌아 이곳, 지리산 대체 연구소에도 휘몰아쳤다. 마을을 두르고 있는 산은 때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며 탄성을 자아낼 만큼 아름다웠지만, 바람 때문에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마을은 해가 지고 어둑해지자 금세 조용해졌다. 이따금 개 짖는 소리와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마을을 돌아다닐 뿐, 마을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나이 탓인가, 왜 이리 오늘따라 쓸쓸하지?’
한기백 소장은 바람을 맞으며 마을을 응시하고 있었다. 칼바람에 겉옷이 날리면서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급격하게 쏠렸다. 불과 몇 시간 전에는 따가운 햇볕 때문에 마당에 서 있기조차 힘들었으나, 밤이 되자 기온은 급변했다. 주 능선에서 다소 떨어진 곳이었지만 역시 이곳도 지리산자락이었다. 바람이 다소 멎자 한 소장은 손전등을 켜고 집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얼마 전 비가 온 뒤에 풀을 벴지만, 집 주변은 그새 자란 잡풀로 발을 디디기가 힘들었다.
한 소장은 옆집 율도가 머무르는 방으로 전등을 비추었다. 율도의 방은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아직 잠이 들지 않은 것인가, 하고 그는 생각하다, 이 상황에서 벌써 잠이 들 수 없을 율도를 금방 이해했다.
‘어머니의 사랑도 받지 못하다 아버지까지 잃은 녀석의 심정은 어떠할꼬.’
13년 전 율도의 아버지 백일도와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온 한기백 소장은 연구실로 돌아와 그간의 기억을 회상하고 있었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더니, 옛말이 틀린 게 없어.’
그는 2022년 3월 초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를 기억해 내었다. 그날, 한 종편 방송사 외에 유력 TV 방송 3사는 근소한 차이로 야당 후보가 유력하다고 밝혔다. 본 투표일에 투표를 마치고 나온 유권자를 상대로 어느 후부를 선택하였는지를 묻는 이 출구조사의 위력과 정확도를 지난 몇 년간 경험하였기에, 이번 선거는 여당의 석패, 야당의 반쪽짜리 승리가 거의 확실했다.
하긴 이미 봄이 왔건만 아무도 봄을 느끼지 못한 나날들이었다. 대선판은 종편을 비롯한 보수언론 등 기득권에 의해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었고, 여당 후보는 자신의 당에서 비주류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면서 대선 기간 내내 주도권을 상실하였다. 거기에다 그가 지자체장으로 근무할 때 불거진 지역 개발 관련 의혹과 선거 막바지에 터진 그의 처의 부적절한 처신 등으로 여당 지지자들의 속마음을 태웠다.
결국, 그다음 날 새벽 1시경에 승부는 났다. 여당 후보는 그동안 온갖 개념적 혼란과 이데올로기적 수사를 헤치고,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한국 정치와 경제를 포함한, 이 시대 ‘RE100’과 같은 중요한 사안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직설적이면서도 합리적인 목소리를 냈다.
평소 명확한 입장과 주관, 뚜렷한 원칙과 가치, 강력한 실행력과 추진력 그리고 활발한 소통 능력이 강점이었던 그는 그런데도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였다. 고향이 경북 시골 마을이어서 TK의 지지도 다소 있었다. 실제 대구·경북 여론조사에서 진보 정치인치고는 꽤 높은 지지율을 보였고, 2030 여성층의 막판 지지도 대단했다. 그랬던 그가 고배를 들었다.
그런데 한 소장은 단순히 여당 후보가 낙선했다는 사실에 실망한 게 아니었다. 그때, 이전 정부 권력기관 수장이던 당선자가 ‘탄소 중립’을 비롯한 기후 문제에 너무 무지한 것에 가슴이 아팠다. 결국, 그는 취임 후에 지난 정부가 추진하던 ‘탈원전 정책’을 폐기하였다.
당선자가 결정된 새벽녘이었다. 한 소장이 답답한 마음에 밖에서 술이라도 한잔할 요량으로 밖에 나왔을 때, 밤하늘 별들이 무수하게 지고 있었다. 그중 북두칠성 옆자리에 있던 큰 별이 구름 속에 모습을 감추다가 낙차 크게 떨어졌을 때, 한 소장은 마치 이 세상이 요지경이라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지리산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
한 소장은 그때부터 날이 밝는 아침까지 줄곧 술만 마셨다. 이 또한 지리산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라니 울음소리와 밤새들의 지저귐, 멀리 천왕봉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있어 혼자라도 결코, 외롭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모닥불에 새까맣게 탄 참새처럼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술에 곯아떨어져 잠든 때에도 한 소장은 이 정부의 실책 때문에 원자력 발전소가 파괴된 것을 꿈으로 보고 있었다.
‘안돼, 그건 안 돼!’
사실, 지리산에 오기 전까지 대기업에서 환경연구원으로 근무하던 그는 도시에 있을 때 쓰레기가 기회가 되고 자연이 영감과 혁신의 원천이 되며, 디지털과 자연이 만나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래서 쓰레기 매립지를 발굴해 고형쓰레기의 에너지를 재활용하는 것과 웨이브 팜(파도의 운동에너지를 이용한 발전), 플라스틱 나무, 녹색 화학(화학 폐기물을 줄이고 에너지를 절약하며 유해 물질 사용과 배출을 최소화하는 새로운 화학제품 및 공정 개발을 위한 노력)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효율성과 경제성을 중시하는 기업의 생리에 맞지 않았다.
결국, 실망한 그는 백일도와 함께 지리산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기 시작했다. 대체에너지 생산의 한 방법으로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자전거 타기’로 필요한 전기를 얻고, 풍력을 이용하여 에너지를 얻는 방법을 시도했다. 최근엔 풍차 원리를 이용하여 높은 고도에서 빙빙 도는 풍력 발전용 ‘연 발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가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하였다.
‘연 발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것만은 성공해야 해.’
한기백이 그토록 성공하고 싶은 ‘연 발전’은 공기 중에 있는 물을 응결시키는 조롱박 모양의 물 수집기로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방법으로, 이것만 해결되면 지리산 사람들 전체가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한 소장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연구에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현재 자신이 맡은 촌장직을 다른 사람에 넘기고, 자신은 연구에만 몰두하고 싶었다.
그런 회상에 젖어 있을 때, 율도가 토끼탕을 끓여 들어왔다.
“뭐야 이건?”
“아저씨 드리라고 한 마리 잡아 왔어요.”
“기특하구나. 그래, 활로 잡았니?”
“네.”
한기백은 입맛이 없었지만, 율도의 성의를 봐서 국물을 한 모금 입으로 넘겼다.
“맛나는구나.”
“에이, 아저씨도 국물만 먹지 말고 토실토실한 고기 맛도 보셔야죠. 그래야 빨리 쾌차할 것 아닙니까.”
율도가 토끼 뒷다리를 손으로 찢어 그에게 주었으나, 한기백은 입맛만 다실뿐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율도야!”
“네, 아저씨, 아니 소장님,”
“넌 내가 지리산에 네 아버지와 들어와서 10년간 어떤 연구를 하는지 알지?”
“알다마다요. 우리 지리산 전체 주민을 위해 연 발전기를 연구하잖아요.”
“그래, 아니까 다행이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 난 우리 마을 촌장직을 수행하기엔 너무 병 들고 늙었단다.”
한기백이 입을 열자 율도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만 삼켰다.
“오늘부터 나는 오로지 이 연구에만 매진하고 싶으니 네가 촌장직을 맡아다오. 제발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제가요? 아직 어린 제가 촌장을 한다고요?”
“그래, 넌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 돌아가신 네 아버지가 하늘에서 도와주실 거야. 그리곤 넌 이제 결코, 어리지 않아. 이곳 지리산 마을 청년들처럼 곧 장가갈 나이잖아.”
“하지만.”
율도는 최근 들어 그가 이런 문제로 계속 부탁하였기에, 단번에 거절하진 않았지만 뭔가 내키지 않았다. 그런 율도에게 한기백은 대뜸 마을 촌장임을 증명하는 목도장을 냉큼 안겨주었다.
“내 말대로 해. 네가 허락해야 이 토끼탕을 맛있게 먹을 테야.”
그제야 율도는 겸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열흘 후 전체 마을 회의 때 율도는 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율도의 취임식 날은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백율도 만세! 평화 정착촌 촌장 만세!”
마을 사람들은 그동안 율도가 얼마나 마음 씀씀이가 곱고 용감한 줄 잘 알기에 진심으로 환영했다. 거기에 덧붙여 율도의 아버지 백일도 역시 마을의 진정한 교육자임을 되새기면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암, 백율도가 누구야? 존경하는 백 선생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잖아. 당연히 한기백 선생 뒤로는 율도가 맡아야지.”
“맞아. 백일도 선생이 살아계셨을 때 얼마나 마을 위해 헌신했나? 아마 율도 촌장 역시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잘할 거야.”
율도는 아버지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마을을 이끌어가야 하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최근 들어 북부 쪽 사람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과 동부 쪽 부촌 사람들의 배타적인 태도 그리고 심각한 위협을 주는 서부 쪽 좀비 같은 사람들의 퇴치와 방어가 관건이었다.
지난겨울, 실제로 굶주린 북부 사람들이 마을을 습격하여 그동안 농사지었던 농작물을 빼앗아서 갔고, 이 과정에서 다친 사람을 동부 쪽 마을로 치료차 데려갔으나, 의사가 있었음에도 그들은 나 몰라라 하였다. 또한, 이른 봄엔 남쪽 자웅동체 인간들에 의해 어린 소녀가 납치되었고, 서쪽 좀비 같은 자들이 마을을 습격하여 마을 사람 서넛이 물려 죽은 사건도 발생하였다. 난리가 난지 10년이 넘었어도 각 정착촌의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그만큼 먹고살기가 팍팍하다는 증거였다.
‘내가 반드시 지리산 정착촌의 통일을 이룰 거야.’
촌장으로 취임한 사흘 뒤, 율도는 마을 젊은이 몇을 데리고 마을 주변 순찰에 나섰다. 곧 가을이 되고 농작물을 수확하게 되면 귀신같이 알아내고 달려드는 북부와 남서부 쪽 사람들의 습격에 대비하는 게 급선무였다.
“저기가 너무 허술하지 않아?”
“어디?”
“입구 쪽 울타리 말이야. 서둘러 정비해야겠어.”
평화마을은 계곡을 등에 지고 만든 마을이어서 뒤편은 안전했다. 또한, 좌우 측면은 숲이 울창하고 덩굴과 가시나무가 촘촘히 박혀 있어 천혜의 방어막이었다. 문제는 마을 입구였다. 바깥세상과 통하려면 누구나 입구를 이용했기 때문에 이곳을 정비해야 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나무 울타리로 방어막으로 쳐두었지만, 이상하게도 번번이 뚫리는 게 이곳이었다.
율도는 이참에 입구 쪽 방어를 위해 성을 염두에 두었다. 성벽을 쌓을 순 없지만, 입구 둘레를 파서 해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시설)를 만들고 반대편에 다리를 설치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냈다.
“해자를 만들자고?”
마을 청년들은 율도가 말하는 해자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하긴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청년들이 중세 역사를 알 리가 만무했다.
“그래, 그 방법밖에 없어. 힘이 들어도 반드시 완성해야 해. 어떤 것인지 내가 설명해 줄게.”
사실, 해자 만드는 건 한기백 소장의 제안이었다. 6살 때 지리산에 들어와 바깥 문명에 문외한 율도는 그날 한 소장의 의견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니까 입구 쪽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물길을 내자는 말이네요. 그 위로 다리를 놓는다는 말씀이죠?”
비록 정규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율도의 머리 회전은 빨랐다. 이 모든 게 그의 아버지, 백일도의 생존 교육 덕분이었다.
“그렇지. 다리는 수동으로 제작하고 줄을 당겨서 들었다가 놓았다가 하면 될 거야. 그리고 물속엔 기름을 넣어두거나 아니면 뱀을 풀어두면 전쟁 시에 매우 유리하겠지?”
“알겠습니다. 소장님만 믿고 한번 만들어보겠습니다.”
율도의 제안에 청년들은 찬성했고, 이내 마을 사람들은 농사철임에도 대부분이 공사에 참여했다.
영차, 영차.
“서두르자! 그러지 않으면 북쪽, 남서쪽 놈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
“그래, 여름이 끝나기 전에 완성해야 해.”
청년들과 마을 사람들은 율도의 지휘하에 누구 하나 불평 없이 일하고 또 일했다. 얼마나 열심히 입구 둘레를 팠던지, 해자는 그해 가을이 되기 전에 거의 완성이 되었다.
해자가 완성되고 마을 입구 쪽 방어벽이 완성되자, 율도는 직접 사냥해 온 멧돼지와 노루를 잔치에 내어놓았다. 그러면서 이 작업에 동원된 젊은이들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에게 직접 술을 따르며 그들을 격려했다. 이로써 율도가 베푼 마을잔치는 흥겹게 끝났다.
율도는 차나 한잔할까, 하고 한기백 소장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지금 하고 계시는 연구가 잘 안되나 봐요. 그래도 오늘은 좀 쉬시지 않고요.”
율도는 늘 그의 건강이 걱정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상, 이제 한기백 소장은 그의 아버지나 진배없었다.
“어서 와. 아냐, 오늘은 쉬고 있었어. 그러지 않아도 적적해서 누군가와 이야기나 나누고 싶었어. 오늘 수고 많았지?”
“수고는요. 늘 하던 사냥인데요, 뭘.”
율도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오랜만에 나랑 술이나 한잔할까? 왜? 아까 많이 마셨냐?”
“아뇨. 그게 아니라, 소장님이 괜찮으신가 해서요.”
“나? 난 괜찮아. 그리고 이건 독주가 아니야. 얼마 전 마을 분이 내 건강을 생각해서 머루주를 한 병 줬거든.”
한기백 소장의 밝은 얼굴에 율도는 안심했다. 그러지 않아도 마을잔치에서 도를 넘지 않으려고 술을 자제한 참이었다.
“좋아요. 오랜만에 아저씨랑 한잔해요.”
술이 거나하게 오르자 율도가 평소 궁금한 점을 물었다.
“10년 전, 그 난리는 어떻게 해서 일어난 거죠?”
“원전이 폭발한 것 말이냐?”
“네, 그 때문에 우리가 지리산 밖으로도 나가지 못하고 밖에서도 일절 사람들이 오지 못하잖아요. 그것뿐인가요? 우리 지리산 마을은 네 곳으로 나누어져 서로 물고 뜯는 아비규환으로 변해가잖아요.”
율도의 말에 한 소장은 지난날을 떠올렸다.
“원전 폭발 이전에 지구온난화가 문제였어.”
“네?”
한 소장은 율도의 물음에 직접적인 대답 대신 지구온난화 문제를 떠올렸다. 대기업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그 역시 이에 다른 부분까지 확장하여 큰 문제를 일으키리라고 보았다.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한 세계 각국의 노력은 30여 년 전 시작됐다. 세계기상기구(WMO)와 유엔환경계획(UNEP)은 1988년 IPCC를 출범해 행동에 나섰다. 유엔(UN)은 1992년 온실가스 배출 규제를 위한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을 채택했다. 한 단계 더 나아가 2003년에는 유엔기후변화협약 이행 방안을 명시한 교토의정서가 발효됐고, 이는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정으로 다시금 의결됐다.
2021년 1월에는 선진국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까지 포함하는 범지구적 차원의 기후변화 문제 해결과 적응을 위한 파리기후협정이 발효됐다. 이를 기점으로 세계 각국은 지구의 평균온도를 18세기 산업혁명 이전 대비 2℃ 이내, 최소 1.5℃ 이내로 낮추고자 하는 공동의 목표를 설정하고 발맞춰 나가고 있었다.
그때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이전 정부 역시 파리기후협정 이행 의지를 다잡고 있었다. 2020년 12월 정부는 2050년 온실가스 순 배출제로(Net-Zero), 즉 탄소 중립을 향한 국가 비전을 선포했다. 2021년 8월에는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 중립·녹색성장 기본법’을 제정해 전 세계에서 14번째로 탄소 중립을 법제화했다. 그때만 해도 한 소장은 이전 정부를 믿으면서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2022년 3월에 집권한 새 정부는 이전 정부의 환경 정책을 프라이팬 뒤집듯 완전히 뒤집었다. 대표적인 것이 원전 재가동이었다. 그때 한 소장은 모든 게 물거품이 되리라는 충격에 사로잡혔다.
한 소장이 추억에 잠겨 있을 때 율도가 재차 물었다.
“지구온난화와 원전 폭발이 어떤 연관이 있죠?”
“응? 아, 그래.”
한 소장은 율도에게 너무 어려운 용어로 설명하면 지레 위축될까 봐 될 수 있는 대로 쉽게 설명하기로 했다.
“지구온난화는 오존층 파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오존층이 뭔데요?”
“지구 성층권에는 오존이란 물질이 존재하는데, 오존은 지구를 태양의 자외선으로부터 막아주는 방패 역할을 해.”
“그래서요?”
“그런데 지구온난화, 즉 지구가 뜨거워지면 극한과 폭염 현상이 심해져서 태풍, 홍수, 지진 이상 기온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난단 말이야. 즉 온실효과가 커지면서 대기 순환과 땅속의 열 흐름이 부자연스러워져 지진이 일어나면서 오존층도 파괴가 되는 원리야.”
한 소장의 말에 율도는 대충 그의 말을 이해하였다.
“그래서 소장님은 우리 마을 사람들이라도 화석연료를 쓰지 말하고 하셨군요.”
율도의 재치 있는 대답에 한 소장은 흐뭇했다.
“맞아. 탄소 중립 달성은 우리 지리산 마을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이뤄야 할 목표지만, 지금 당장 화석연료 사용을 중단하고 탈탄소화를 이루는 일은 쉽지 않단다. 무엇보다 ‘친환경’ ‘신재생’ 에너지를 화석연료 등 우리가 기존에 사용하는 에너지양만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어야 하는데, 여기 지리산은 땅이 협소하고 산이 많은 지형으로 태양열 에너지, 풍력 에너지 등 친환경 에너지를 충분히 확보하기에 한계가 있어.”
그제야 율도는 한 소장을 깊이 이해하였다.
“그래서 소장님이 연 발전기에 애착을 가지는 거군요.”
“그렇지. 바로 그거야. 연 발전기만 완성되면 우리 지리산 사람들은 땔감 등 화석연료를 쓰지 않고도 겨울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고 농사짓는 데도 매우 유용할 거야. 그러니 내가 반드시 완성할게.”
“그럼요, 제가 아는 소장님은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그제야 한 소장과 율도의 입가에는 웃음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한 소장이 율도에게 매우 중요한 말을 꺼냈다.
“율도 넌, 평화마을 촌장이 이룩해야 할 게 뭐라고 생각하니?”
“그야, 우리 마을 사람들을 적으로부터 지키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해자를 파고, 입구 방어벽을 완벽하게 정비한 거잖아요.”
율도의 말에 한 소장은 헛기침한 후, 또박또박 말했다.
“그건 기본이고. 더 중요한 것은 지리산 마을의 통일이야.”
“통일?”
“그래, 돌아가신 네 아버지의 꿈이기도 하지. 안 그러냐?”
“맞아요. 저도 그 부분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좋아,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순간, 율도는 현행 유지되는 마을 규찰대를 떠올렸다.
“규찰대?”
“그렇지. 하지만 이제부터는 규찰대를 넘어 강력한 군대가 필요할 때야.”
“군대?”
율도는 한 소장의 말에 전율이 일었다.
다음 날, 한 소장의 조언대로 율도가 서두른 것은 규찰대를 넘어 강력한 군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어느 정착촌 군대보다 강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 율도는 10대부터 50대까지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을 모두 규합했다. 그리곤 곧바로 강한 훈련에 들어갔다. 칼 쓰기부터 활쏘기, 백병전에 이르기까지 율도는 예전 도인들에게 배운 무예 실력을 규찰대 앞에서 선보였고, 그들은 이내 율도를 능가할 정도로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좋아. 이 정도면 지리산 정착촌 어떤 군대보다 강력해.’
율도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