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평화마을 군대 재건 소식을 듣고 어느 날, 동부 쪽 부촌에서 사람이 왔다.
“촌장을 만나러 왔습니다.”
사신으로 온 그들은 의외로 도도했다. 하긴 그들은 정착촌 네 곳 중에서 가장 돈과 물자 그리고 인원이 많은 막강한 마을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율도는 기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 허리를 세웠다.
“그대가 평화마을 촌장이오?”
이리 말할 정도로 그들은 예의범절이 없었지만, 율도는 개의치 않았다.
“그렇소.”
그러자 그중 한 명이 나서 문서를 하나 건넸다.
“이건?”
“우리 부촌 촌장께서 직접 작성하신 제안서입니다.”
문서를 펼쳐 보니 일부는 비뚤비뚤, 그중에는 아예 맞춤법에도 맞지 않는 문장들이 가득했다.
푸핫.
율도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그러시오!”
그러자 그들은 자신의 촌장이 내민 제안서가 우스워서 그런 줄 알고 눈알을 부라렸다.
“아니요, 아니요. 가만있자.”
율도는 손으로 그들을 제지하고 문서를 마저 읽었다. 내용은 이랬다. 부촌 역시 이번 기회에 마을 군대를 조직하고 있으니 앞으로 적이 출현하면 공동으로 대처하자는 내용이었다.
“공동으로 대처한다?”
문서에 따르면 그들에겐 공동훈련과 전쟁 시 소요경비 공동 부담, 전쟁에서 이길 경우, 전리품 분배 등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율도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후 그들을 잠시 물린 뒤, 마을 청년들과 의논하였다.
“어차피 우리 평화마을의 유력한 적은 북쪽의 거인들과 남쪽의 자웅동체 형 인간 그리고 서쪽의 좀비 같은 자들이니, 부촌과 협력해도 나쁘진 않겠습니다.”
젊은이 중 율도의 오른팔 격인 자가 은근히 부촌의 제안을 환영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율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저는 익히 그자들의 행태를 잘 압니다. 이리 달콤하게 제안해놓고선, 막상 전쟁이 시작되면 그들은 생각을 달리 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자 다른 젊은이가 손을 들었다.
“그래도 그들의 막강한 무기와 돈 그리고 인원은 탐이 납니다. 현재로선 우리 군대가 출중하다 하나, 북쪽과 남서쪽 많은 인원과 홀로 붙기엔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율도는 좌중을 둘러보며 마지막 의견을 구했다. 그때 처음 의견을 낸 젊은이가 제안했다.
“일단 부촌 마을에 한 번 다녀오시죠. 그래서 그쪽 촌장의 제안에 진심이 담겨있는지부터 파악하는 게 급선무 같습니다만.”
‘부촌 마을에 직접 방문한다? 하긴, 그 마을에 꽃비가 있잖아.’
율도는 그의 말에 마음이 갔다. 그리하여 그길로 부촌 마을 사신들을 불러들인 후, 문서에 서명했다.
“언제쯤 오시렵니까?”
“일주일 후.”
“좋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그제야 부촌 마을 사신들은 율도에게 예를 갖춘 후 공손하게 물러갔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간 후 밤에, 율도는 꽃비에 관한 이상한 꿈을 꾸었다.
율도는 꿈에서 마을 근처 폭포 아래에서 못을 바라보며 쉬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자꾸 그의 귀에 노래가 들려왔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이상한 노래였다. 아리랑은 아리랑인데 율도가 평소에 듣던 아리랑은 아니었다. 그 노래는 구슬픈 것 같으면서 경쾌하고, 애절하면서도 발랄함이 느껴지는 가락이었다. 잠결이었지만, 율도는 어떤 소녀가 자신과 가까운 곳에서 노래하는 것 같았다. 고수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귓가에 북소리도 들렸다.
‘둥 두두둥, 둥.’
몽롱한 상태에서 소녀의 노래를 듣고 있던 율도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기이하게도 그 소녀의 한과 울음이 자신의 영으로 들어오는 착각이 들었다.
“아! …….”
그런데 눈을 떠보니 멀리 기암절벽에 소녀가 있었다. 폭포 주변의 아련한 안개 때문에 율도의 눈에는 소녀가 금방 보였다가, 이내 사라지는 광경이 반복되었다. 소녀는 율도가 아까 잠결에 들었던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멀리 있지만 가까이 있는 것 같았다.
“이봐요!”
율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나발로 그녀를 불렀지만, 소녀는 아무 대답 없이 부채를 들고 노래하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율도는 소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갈 요량으로 폭포와 연결된 바위를 타기 시작했다. 안개가 얼굴을 타고 흘렀다. 땀과 눈물이 범벅된 율도는 오직 소녀를 직접 만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마침내 바위 하나만 넘으면 소녀가 있는 곳이었다. 노래는 환청이 되어 그의 귓불을 때렸다. 율도가 마지막 바위를 넘자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소녀의 눈에는 눈동자가 없었다.
‘아! 아!…….’
율도는 그만 뒷걸음을 치다 바위에서 미끄러져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헉!
율도는 눈을 떴는데, 이상하게도 이불이 축축했다.
‘행여 꽃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어쨌든 일주일 후, 율도는 협상을 위해 동부 쪽 부촌으로 떠났다. 올봄, 북쪽 정착촌 마을로부터 습격당한 끝에 평화마을 부상자를 데리고 부촌 마을로 방문한 후 처음이었다.
‘난공불락의 성.’
율도는 그 마을 입구에서 이렇게 생각하였다.
부촌은 10년 전 난리가 날 때, 이미 이 사태를 어느 정도 예견하고 들어 온 부자들과 돈 많은 귀촌자가 만든 마을이었다. 그들은 지진으로 원자력 발전소가 파괴되어 방사성을 띤 반구형 막이 생기기 시작할 때부터 그들의 힘인 돈을 이용해 마을 둘레에 성벽을 세웠다. 따라서 지리산에서 가장 안전한 마을인 셈이었다. 그런데도 1년에 몇 차례 북쪽과 남서쪽 사람들의 습격을 받았으니, 그들이 율도와 공동 전선을 희망하는 이유는 이제부터라도 그들이 가진 것을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기득권 심보였다.
그들의 마을 안에는 화가를 비롯한 예술가, 전직 검사 등 법조인 그리고 의사, 약사 등이 살고 있었고 실제로 조그만 약국과 병원도 있었다. 그들의 지도자는 막강한 정보로 난리가 나기 전 들어 온 전직 조폭 마충기였는데, 마약, 무자료 술 도매, 살인 청부, 보이스피싱 등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말 그대로 ‘죽어 마땅한 자’였다.
올해 초 평화마을에 부상자가 생겨 그를 데리고 부촌 병원에 갔을 때, 그곳 의사의 수용 의사에도 불구하고 끝내 거부한 자가 마충기였다. 율도는 그 때문에 기분이 몹시 상해 있었지만, 오늘은 서로 협력하고자 하는 마당에 애써 무시하였다.
부촌 마을 입구에는 어떻게 만들었는지 사제 총을 든 인상 더러운 놈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어떻게 왔소?”
그중 어깨 문신이 유난히 징그러운 자가 나섰다.
“이곳, 촌장이신 마충기 어르신을 만나러 왔소.”
그러자 그는 가소롭다는 듯이 율도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보아하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청춘인 것 같은데, 어디, 약속이나 했어?”
놈은 율도를 지리산에서 먹고 살기 힘든 부랑배로 취급하여 아예 반말로 상대하였다.
“평화마을 촌장, 백율도라고 전해주시오.”
그제야 놈을 비롯한 경비들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너같이 어린놈이 촌장?”
“불행히도 내가 평화마을 촌장이오.”
“우하하. 요즘 지리산에선 개나 소나 촌장인 모양이지? 그냥 꺼져! 여긴 너 같은 놈이 있을 곳이 아니야.”
그렇게 그들과 옥신각신하며 기분을 잡치고 있을 때, 멀리 누군가 걸어오면서 경비들에게 소리쳤다.
“귀한 손님에게 이 무슨 실례야! 비켜 서!”
아래위로 하얀 한복을 입은, 풍채 좋은 자였다. 직감에 그가 마충기인 것 같았다.
“평화마을에서 오셨소?”
“네, 백율도입니다.”
율도는 그에게 깍듯이 머리를 숙였다. 그러자 아까 율도에 어린놈이라 운운하던 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가만, 우리 예전에 한번 보지 않았소?”
율도는 그가 그래도 양심이 남아 있어 그때 일을 기억하는 줄 알았다.
“네, 올봄에 우리 마을 부상자를 데리고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뵈었죠.”
“그렇죠? 그래, 그때 우리 마을 의사에게 치료 잘 받고 갔지요?”
그런데 아니었다. 그는 그때 사정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 것이다.
“당시 촌장님께서 거부하여 치료받지 못했습니다만.”
율도의 대답에 그의 기세가 약간 꺾이는듯했다.
“내가요? 이리 온화하고 포용적인 내가?”
율도는 더는 말하기 싫어 턱으로 집 안쪽을 가리켰다.
“아! 그때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것 같소. 자! 일단 들어갑시다. 내가 안내하리다!”
“그러시죠.”
“비켜! 이놈들아!”
그의 호통에 경비들이 혼비백산하여 바리케이트를 열어주었다.
율도의 등장으로 경비들은 한 발자국 물러나고 그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는데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푸른 잔디가 깔린 정원은 너무도 화려했고 정원 안쪽엔 각양각색의 꽃들도 치장한 꽃밭과 수려한 연못이 있었다.
‘지리산 안에서 이런 화려한 집이 가능한 일인가?’
율도는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데 그때 율도는 또 한번 놀라고 말았다.
‘이 사람들은?’
놀랍게도 정원과 연못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곳의 원주민들이었다. 하나같이 남루한 옷을 입고 제대로 먹지 못하였는지 표정이 칙칙하였다. 율도는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난리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분들은 자신의 땅에서 직접 농사지으며 소박하게 살 사람들이었다. 언제인가 한 소장에게 들은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부촌 인근에 사는 원주민 마을 사람들은 마치 부촌 사람들의 노예처럼 그들의 뒤치다꺼리로 삶을 근근이 이어간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이런 개차반 마을도 있구먼.’
율도는 이를 악물려 언제가 되었듯, 그들을 꼭 해방해주겠다고 마음먹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오?”
앞서가던 마충기의 말에 율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아닙니다. 정원이 너무 아름다워서요.”
“하하. 그렇죠? 내가 서울에 살 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싸다던 강남 아파트보다 여기가 훨씬 좋기는 하오.”
율도는 그의 말에 속에서 욱, 하는 욕지기가 나올뻔했다. 아까 노예처럼 일하던 원주민을 보고 나니, 이 정원과 저택이 어떻게 지어졌는지 눈에 선했다. 거대한 자본을 이용한 원주민의 착취와 억압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깁니다.”
마충기의 저택이었다. 현관을 들어서자 마치 중세 시대 시녀 복장을 한 젊은 여자들이 좌우로 서 있었다. 바닥은 대리석이었고 거실 벽장엔 고급 그림이 붙어 있었다. 거실 한복판에 크고 웅장한 소파와 탁자가 있었다.
“이쪽에 앉으시죠.”
마충기는 율도를 앉게 하고 하인을 향해 손뼉을 두 번 쳤다. 그러자 일사천리로 양주와 먹음직한 과일 안주가 나왔다.
“우리 부촌과 평화마을의 연대를 위해!”
마충기는 스스로 흡족한 듯 잔을 높이 들었다.
“위하여!”
율도는 첫 잔을 입에 대자마자, 입안이 짜릿하면서 얼얼했다. 말로만 듣던 고급 양주였다.
“어떻소? 마실만 하죠?”
“네, 입이 얼얼합니다만.”
“하긴, 이곳 사람들에겐 어울리지 않는 술이죠. 이게 난리 나기 전에 영국 소더비 경매장에서 산 ‘1926년 맥켈란 파인 앤드레어’입니다. 60년 숙성된 거고, 미화 19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23억이죠.”
율도는 무슨 놈의 술이 그리 비싸지, 하며 속으로 놀랬지만, 태연한 척 연기했다.
“우리 마을에서 생산한 술도 그 정도는 아니지만, 굳이 맛을 매기자면 그 정도는 합니다.”
율도의 말에 마충기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요? 그게 무슨 술인데?”
“지리산 산삼주입니다.”
“하하. 당연히 그럴 겁니다. 산삼은 매우 귀하니까요. 그건 그렇고 이제 준비되었습니까?”
이윽고 술이 한 순배 돌자, 마충기의 제안으로 비로소 두 개 마을 간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마충기는 두 개 마을 군대(규찰대)의 공동훈련과 전쟁이 일어날 경우, 소요경비 공동 부담, 전쟁에서 이길 경우, 전리품 분배 등을 속사포처럼 의견을 개진하였고, 율도는 양보하는 마음으로 그 대부분을 수용하였다.
“역시 젊은 친구라 말귀가 밝군요.”
“우리 마을 역시 귀 마을의 협조가 필요한 까닭입니다.”
그렇게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합의하지 못한 게 있었는데, 그건 공동 군대의 지휘관 선정 문제였다.
마충기는 자신들의 막강한 금력과 사제 총 등의 현대식 무기를 앞세워 자신의 마을에서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는 의견이었고, 율도는 협상 과정에서 많은 것을 양보했으므로 공동 규찰대의 지휘관은 평화마을의 촌장인, 자신이 되어야 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북부와 남서부 놈들과 전쟁은 전투 경험이 많은 자가 지휘관이 되어야 하오. 그런데 과연 그대가 그 조건에 맞는지 모르겠군요.”
그제야 마충기는 서서히 자신의 마수를 드러내었다.
“아직 젊은 게 문제라면 문제이겠지만, 나름대로 저는 사냥과 전투에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리 말하는 부촌엔 어떤 적합한 인물이 있지요?”
율도도 더는 지지 않았다. 그러자 마충기는 또 손뼉을 쳤다. 그러더니 이내 비밀 문에서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눈매가 매서운, 만만치 않은 싸움꾼 한 명이 나타났다. 아마 그는 그 안에서 마충기와 율도의 대화를 속속들이 들은 모양이었다.
“소개하지요. 난리가 나기 전 전국구 조폭들을 모조리 궤멸시킨 우리 조직의 행동대장이자, 나의 오른팔이요.”
“도끼라고 합니다. 평화마을에 새 촌장이 탄생했다더니, 이리 젊은 친구인 줄 몰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는 허리춤에서 작은 도끼를 꺼내더니 쏜살같이 율도 앞에 찍어버렸다.
퍽!
율도는 이게 그의 명백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마충기 역시 협상은 뒷전이고 이미 자신의 행동대장을 지휘관으로 내세울 모양이었다. 양측의 주장이 맞서자, 마충기는 결투를 제안했다. 이에 율도 역시 이 협상은 대화와 타협으론 해결되지 않다고 보고 기꺼이 응했다. 율도는 누가 나오더라도 싸움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마충기는 율도가 제법 당차게 나온다고 생각하면서도 코웃음이 나왔고 율도는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설마 도끼를 사용하진 않겠지요?”
“하하. 그대 같은 애송이에게 그깟 무기가 뭐 필요하겠소? 맨몸으로 합시다. 까짓것!”
“좋습니다. 싸움에서 이기는 자가 공동 군대의 지휘관이 될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편편한 운동장이 있는 저택 뒷마당이었다. 마당에는 마충기의 부하들과 원주민들이 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 율도는 여기 있는 원주민들을 생각해서라도 이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대는 예상한 대로 마충기의 오른팔, 행동대장이었다. 마충기의 말대로 전국구 조폭들을 물리친, 결코, 만만치 않은 싸움꾼이었다.
마침내 마충기의 손이 올라갔다.
율도와 놈은 손에 각목을 쥔 채로 공격할 기회를 노리며 서로 반 바퀴를 돌았다. 그리곤 다시 한 바퀴를 돌았다. 태양이 아득하게 내리쬐나 싶더니 이내 구름이 하늘을 가렸다. 율도가 기합 소리와 함께 각목을 휘두르며 놈을 공격했다.
합!
율도가 놈의 어깨를 후려쳤으나, 빗맞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놈이 율도의 어깨를 타격했다.
악!
이에 율도가 비명을 지르며 한발 물러섰다. 그 모습은 본 마충기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고, 원주민들은 안타까운 신음을 쏟아냈다. 여기에 힘을 입어 율도가 온 힘을 다해 다시 공격했다. 놈의 각목이 부러지면서 율도는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놈을 뒤로 물러서는 척하다, 율도를 향해 잽싸게 돌진하여 오른손으로 턱을 후려쳤다.
퍽!, 헉!
휘청하던 율도가 각목을 놓치지 않고 뒷걸음쳤다. 그러자 놈은 오른쪽 다리로 율도의 다리를 걸었다. 조폭 생활하며 오랜 싸움을 경험한 달인다운 기술이었다. 그리곤 스프링이 튀듯 유연하게 율도의 공격 거리 밖으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율도는 그 틈을 이용해 각목을 놈에게 던지면서 몸을 날렸다. 공중에 붕 뜬 몸의 무게를 이용하여 그대로 놈의 면상에 머리를 박은 것이다. ‘퍽’, 하는 육중한 소리와 함께 놈이 뒤로 자빠졌다.
‘이때다!’
율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어 두 손으로 놈의 목을 졸랐다. 얼핏 보니 마충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죽여라!”
원주민들이 함성을 질렀다. 그동안 이놈에게 얼마나 학대받고 고통받았으면 이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놈도 싸움의 고수였다.
벌떡!
놈은 순간적으로 엉덩이 반동을 이용하여 율도의 손에서 벗어났다.
다시 싸움은 원위치였다. 율도와 놈은 서로 공격할 기회를 노리며 반 바퀴를 돌았다. 그리곤 다시 한 바퀴를 돌았다. 율도가 주먹과 발로 공격했지만, 놈은 슬쩍슬쩍 비키며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거기에다 율도의 공격 리듬이 흐트러지는 순간 놈은 정확한 발차기로 율도의 복부를 가르기도 했다. 이에 율도는 마지막 승부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도인촌에서 배운 순간 이동과 장력이었다. 그동안 별로 써먹지 못한 기술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가능할 것 같았다. 율도는 긴 호흡 끝에 뒷발로 땅을 차며 날아오를 준비를 마쳤다.
순식간이었다. 하늘로 날아오른 율도가 놈의 뒤에 서 있었다. 너무도 순간적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이를 괴이하게 여겼다. 그리곤 장력을 이용하여 놈의 등을 쳤다.
퍽!
그러자 놈은 마치 트럭에 부딪힌 듯 마충기가 앉아 있는 의자 쪽으로 날아갔고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게 결정적인 한 방이었다. 이제 놈은 피를 토하며 건물 벽 쪽에 널브러져 있었다.
완벽한 율도의 승리였다. 마충기도 그의 부하들도, 심지어 당한 놈도 몰랐지만, 원주민 중 일부는 율도가 어떤 도술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율도를 보고 “저 이가 끊긴 도인촌의 명맥을 이어 갔구나.” 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 소리에 격분한 마충기는 비겁하게도 부하들을 선동했다.
“죽여라!”
핏덩어리 같은 어린 율도가 자신의 오른팔이던 행동대장을 한 방에 보낸 것에 관한 치사한 노여움이었다. 부하들은 마충기의 한마디에 회칼을 뽑아 들었다.
‘이런!’
당황한 율도는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이럴 땐 삼십육계가 최고라는 장 도인의 말이 떠올라 바로 숲속으로 튀었다.
“잡아라! 죽여도 좋다!”
뒤에서 마충기의 서슬 퍼런 고함이 들렸다. 곧이어 부하들이 맹렬하게 뒤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릴 때부터 달리기엔 천재였던 율도였지만, 마충기의 부하들도 만만찮았다. 그러기에 율도는 전속력으로 숲속을 뛰고 또 뛰었다. 어릴 때부터 산으로 숲으로 뜀박질한 게 여간 도움이 되지 않다고 율도는 생각했다.
‘헉헉, 이제 따돌렸나?’
율도는 숨을 몰아쉬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율도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앞과 좌우는 모두 넝쿨이 우거진 숲속이었다. 그 가운데 사람 하나 다니는 좁은 길이 있었다.
‘그래, 이리로 가보자.’
율도가 그 길로 한참을 걷다 보니, 숲속에 어떤 외딴집이 하나 나왔다. 마침 집 앞에 우물이 하나 있었다. 율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라 생각하고 물 한 잔만 마시고 다가섰다. 그런데 그때 창가에서 여린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데려가 주세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뭐지? 이 깊은 산속에 여자 목소리? 그것도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
율도는 소리가 들리는 외딴집 창문을 바라보았다.
‘헉!’
놀랍게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때 삼신봉에서 만났던 꽃비였다.
“꽃비?”
여자도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그때 삼신봉에서 본 율, 율 …”
“그렇소, 나, 율도요. 백율도!”
너무 놀란 율도는 잠시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반가움과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날 그녀와 헤어진 후로 밤마다 그녀 생각을 안 할 때가 없을 만큼 율도는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여긴 어떻게?”
율도가 겨우 입을 떼 그녀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반가운 표정보다 두렵고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상세한 이야긴 조금 있다가 해요. 평화마을로 가는 지름길을 알고 있어요. 그러니 제발, 날 구해주세요.”
그녀의 말에 율도는 바로 창문을 가로막던 창살을 손으로 떼어내 그녀를 끄집어냈다. 그리곤 그녀가 가리키는 길로 무작정 뛰고 또 뛰었다.
지름길은 산세가 매우 험했다. 칡넝쿨이 우거져 있어 한 걸음 떼기도 버거웠고 특히 바위가 많아 애를 먹었다. 그런데도 율도는 이런 상황에서 그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가슴이 벅찼다. 삼신봉에 다다를 즈음에 그녀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둘은 바위에 앉아 어색한 표정으로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멀리 천왕봉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때쯤, 율도가 먼저 물었다.
“외딴집엔 무슨 일로 갇혀있었죠?”
율도는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아카시아 향이 난다고 느꼈다. 곱고 아슴한 냄새였다. 마치 어릴 때 어머니 몸에서 맡은 향 같았다.
“그때 말없이 삼신봉에 갔다고 벌 받는 거예요.”
“나랑 처음 만난 날 말이죠? 그런데 누가, 누가 벌을 준다는 겁니까?”
율도의 질문에 꽃비는 아련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요. 우리 마을 촌장.”
“마충기?”
“네.”
“그자가 꽃비 씨와 무슨 관계인데 멋대로 그런 벌을 내리죠?”
그러자 그녀의 사슴 같은 눈망울에서 비가 내렸다. 율도는 자신이 괜한 질문을 해서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건 아닌지 불안했다. 잠시 뒤, 눈물을 멈춘 꽃비가 담담하게 자신의 사연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자는 저의 주인입니다.”
“네? 주인요? 그게 무슨 …….”
“난리가 나기 전에 엄마와 전 서울에 살았어요. 너무 어려서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엄마가 그자에게 큰 빚을 진 것 같아요. 그런데 돈을 갚지 못하자 그자가 날 억지로 이곳으로 데려왔답니다. 그때가 아마 난리가 나기 얼마 전인 것 같아요.”
그녀의 표정과 말투로 봐선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벌써 10년이 넘었네요.”
“네.”
“그래서 그자가 어머니 빚 대신에 꽃비 씨를 볼모로 잡고 있다는 말이네요.”
“그런 셈이에요.”
“그동안 어머니와 떨어져 정말 마음고생, 몸 고생이 많았겠어요.”
율도는 진심으로 그녀에게 위로를 해주고 싶었다.
“그랬었죠. 하지만 그런 건 참을 수가 있어요. 제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건.”
“뭐죠?”
“내년에 제가 성인이 되면 그자와 강제 결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에요.”
“네? 그렇다면 꽃비 씨는 이제 열아홉이란 말입니까?”
꽃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년이 되면 그놈의 무지막지한 놈과 강제 결혼을 해야 한다? 이런 썩을 놈 봤나. 배 나온 중년 조폭 주제에 이리 아리따운 꽃비 씨에 눈독을 들여? 그건 안 되지, 그래, 안 되고말고”
예상 밖 율도의 말에 꽃비는 쿡, 하고 웃음이 터졌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율도에게 물었다.
“날 그자로부터 지켜줄 수 있나요?”
꽃비의 간절한 눈빛에 율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요? 그리만 된다면 전 율도 씨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발 저를 그 지긋지긋한 감옥에 보내지 마세요.”
“물론입니다.”
“그래도 만약 마을 사람들이 절 반대한다면요?”
“아니, 우리 마을 사람들이 꽃비 씨를 반대할 이유가 뭐 있습니까? 설령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저는 꽃비 씨를 반드시 지켜낼 겁니다.”
그러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율도의 품에 안겼다. 그날 처음으로 자신의 품에서 여자의 향을 맡은 율도는 정신이 아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