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좀 부드럽게 돌려서 해줄래?”핏대를 세우며 따져 묻는 나의 말을 끊고 그가 말했다. 그는 공모전을 진행하면서 알게 된 나보다 두세 살 많은 팀장이었지만, 맡은 일은 완벽하게 엉망진창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와 말다툼이 여러 번 오갔고, 일도 자꾸 꼬여만 갔다.
반면 공모전을 함께했던 친구 A는 쿠션 멘트의 달인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쿠션 멘트를 잘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쿠션 멘트가 뭔지도 몰랐던 나는 다짜고짜 팀장에게 “일을 왜 이렇게 한 거야?” 물었지만, A는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전에 충분히 그를 칭찬했다. “오빠도 열심히 노력하고, 우리를 위해서 배려하고 있는 거 잘 알고 있다.”라고 덧붙이면서. 전날에 같이 팀장 욕을 신나게 해 놓고, 다음날 쿠션 멘트를 능숙하게 날리는 A가 명연기를 펼치는 배우처럼 보였다.
간신히 공모전은 마무리했지만 자꾸 그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날카롭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내 화법에 정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쿠션 멘트를 배우지 않으면 여기저기 싸움만 일으키는 파이터가 될 것 같아 걱정이 앞섰다. 감정을 숨긴 채 부드럽게 말하는 A 같은 사람이 어른스럽고, 성숙해 보였다. “말 예쁘게 하는 방법”따위를 검색하며 다이어리에 메모했다. 싫어하는 상대방도 부드럽게 잘 설득하는 프로페셔널한 나를 상상하며.
하지만 감정을 숨기고 상대방을 대하는 것은 나에게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좋고 싫은 게 바로 얼굴에 티가 나고, 진심이 아닌 말은 죽어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거짓말을 할 때는 로봇처럼 뚝딱거렸다. 우연히 만난 친구의 조언을 듣기 전까지,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나의 이성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너한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네가 여자라서 그래. 나도 말 직설적으로 하는데 나는 그런 말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어” 강한 충격으로 뒷골이 확 당겼다. 남자한테 이런 말을 듣다니. 쟤는 여자도 아닌데 어떻게 알지? 그 친구는 조금 특이했고,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볼수록 친구의 말이 맞는 말 같았다. 남자가 직설적으로 말하면 쿨한 거고, 여자가 직설적으로 말하면 싸가지 없다고 욕먹는 이상한 세상 아니었던가. 언제나 상대방 듣기 좋게, 상처 받지 않게, 애교 있게 돌려서 말하기를 강요받는 건 여자였다.
내가 만약 남자였다면, 팀장은 나의 화법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논점을 흐리진 않았을 것이다. 친구 A도 남자로 태어났다면, 쿠션 멘트의 달인이 될 필요도 없었겠지. 여자가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을 듣기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내 마음은 오히려 편안해졌다. 싫어하는 사람에게 나의 에너지를 쏟아가면서 억지로 듣기 좋은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냥 직설적인 나로, 거짓말 못 하는 나로, 날카롭게 따져 묻는 뾰족한 나로 계속 말하련다. “예쁘게 돌려서 말하기 싫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