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우 Mar 19. 2019

오지랖 넓은 어른이 되고 싶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뒀을 때쯤, 여름 생활복 제작의 찬반을 묻는 설문조사가 실시됐다. 왜 하필이면 우리가 졸업하니까 생활복이 생기는 거야. 억울했다. 1학년 때 산 하복은 팔을 올릴 때마다 배꼽이 보일 정도로 작았고, 겨드랑이는 땀 흡수를 못 해서 답답했다. 불편한 하복 대신, 체육복을 입고 다녀서 선생님한테 많이 혼나기도 했다. 설문조사는 결과는, 1학년과 2학년은 90% 이상 찬성. 3학년은 90% 반대. 물론 나도 반대에 체크했다.


내가 못 누릴 바엔 너희도 누리지 않는 게 공평하다는 꼰대 같은 생각은, 19살 미성년자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꼭 나이가 많은 사람만 꼰대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1, 2학년 친구들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우리가 생활복을 입지 못하는 게 그들의 잘못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어찌 되었든 3학년 꼰대 졸업생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졸업한 후 생활복은 만들어졌다.


시간이 흘러, 또다시 젊은 꼰대가 될 수 있는 갈림길에 놓였던 순간이 있었다. 나를 포함한 10명 남짓한 신입사원들은 매일 아침 출근 후 사무실 모든 자리의 쓰레기통을 비워야만 했다. 왜 이 일을 우리만 해야 하는 건지 불만이 생겨 상사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상사는 자기가 신입이었을 때는 재떨이 통도 비웠다면서, “원래 다 그런 거야~”라고 웃으며 말했다. 순간 그가 제대로 숙성된 꼰대 같아 보였다. 저런 꼰대는 되지 말아야지. 속으로 다짐했다.


쓰레기통을 1년 동안 비우길 반복한 후, 드디어 새로운 신입사원이 입사했다. 후배들에게 쓰레기통 청소를 인수인계해주며, 이 짓거리를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우리는 흥분했다. 이젠 느긋하게 여유로운 모닝커피를 마실 수 있겠지! 하지만 아침마다 종종걸음으로 분주히 쓰레기통을 비우는 후배들이 자꾸 눈에 걸려 커피가 사약처럼 느껴졌다. 며칠 전까지 내가 하던 일인데.. 미안한 마음이 들어 결국 같이 쓰레기통을 비웠다. 몇몇 후배들은 나를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 보이긴 했지만.


회사를 퇴사할 때, 나는 인사팀에 쓰레기통을 비우는 문화에 대한 불만을 강하게 이야기했다. 이후 쓰레기통은 각자 비우라는 사내 인트라넷 공지가 떴다는 소식을 들었다. 동기들 중 몇 명은 이제 신입은 쓰레기통 비우는 일을 안 하겠다며 부러워했다. 우리는 1년 동안 열심히 쓰레기통 비웠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원래 그렇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딱 내 앞사람까지만 버스를 탄다면, 제일 억울한 법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탔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에 몸서리친다. 그래서 “나도 못 탔으니까, 너도 타지마!” 같은 이상한 생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버스가 더 자주 오도록 목소리를 높이는 방법도 있고, 버스 기다리는 것을 쿨하게 포기하고 택시를 타는 방법도 있다. 이 방법들이 귀찮고, 성가시고, 두려우니까 제일 쉬운 ‘버스 탄 사람에게 화풀이하기’ 방법을 선택하는 게 아닐까. 나이 많은 꼰대를 욕했으면서, 나도 모르게 꼰대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나 다음 누군가가 조금 편안하게 삶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을 축하해주는 것. 자신의 경험을 굳이 비교하여, “나 때는 말이야~”로 말로 시작해 “원래 그런 거야”로 마무리하지 않는 것. 거기까지가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방법이다. 원래 다 그런 거니까 참고 살라는 말 대신,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무책임한 어른으로 살고 싶다. 다른 방법을 함께 고민해보자고 말하는, 오지랖 넓은 어른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결혼은 제 취향이 아니라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