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야단을 쳐도 꿈쩍도 안 하는 아이. 큰 딸과 아들은 내가 좀 큰 소리만 내도 아들은 할머니 방으로 내빼고 큰 딸은 이어폰을 끼고 책을 든다. 무언가 자신들에게 불똥이 튀지 않게 하려는 방어막을 치는데 둘째딸은 늘 한가운데 여유있게 서 있으며 내 벼락을 다 맞아내고도 웃는다. 그리고 한 마디 한다.
“엄마, 왜 이렇게 예민해? 왜 이렇게 화를 내?”
그 말에 난 내가 또 화를 냈구나. 별 일도 아닌데 내 화가 부르르 끓었구나 싶다.
나는 내가 일 마치고 돌아오면 아이들이 책을 읽거나 수학 문제집도 풀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놀고 있기를 바라고 있나보다. 아주 이상적인 상황을 가정해서 설정해 놓고 그 이미지에서 이탈하면 나도 모르게 화가 올라오곤 하나보다. 세 아이들은 늘 이탈이다. 지켜지는 날은 일주일에 한번쯤. 그래서 수학 문제집도 일주일에 한 장.
나는 그토록 창의적인 존재가 되려고 애를 쓰면서 우리 아이들에게는 여전히 “책 읽어, 핸드폰 꺼, 라면 먹지 마, 너 이거 밖에 못 맞니, 내 사전에 70점은 용납할 수 없어. 80점이 데드라인이야.” 이정도의 말을 날린다. 안 좋은 말은 없는 것 같지만 내 억양은 이미 강요와 억압투다.
“이 정도 밖에 못 해? 이래서 되겠어? 더 해야지? 최고가 아니면 무슨 의미야? 넌 왜 이 모양이니?” 등등은 내내 나를 괴롭혔던 말이기 때문에 이런 류의 말들은 아이들에게 날리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 차오를 때가 있다.
“성실해야지, 끈기가 없구나. 이게 뭐야, 고작 이게?”
있는 그대로 봐 줄 수가 도저히 없는 거다. 교육이 왜 필요하니? 가르쳐야 되니까 필요한 거야. 인간은 가르쳐야 해. 무얼? 정말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 거지? 갑자기 혼동이 온다. 진짜 가르쳐야 할 건 무엇일까.
둘째딸이 내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엄마는 공부도 안 가르치면서 왜 우리가 공부 잘 하기를 바래?”
우리 아들은 한 수 더 뜬다.
“작가 아들이라 너무 괴로워. 책을 읽으라고 하잖아.”
한권도 안 읽는 아들은 책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나보다. 책이 좋기는 세상에서 제일이지만 가르쳐야 하는 걸까, 놔둬야 하는 걸, 기다려야 하는 걸까.
말이 없는 큰딸은 단 둘이 산책을 나가면 나를 위로한다.
“내가 표현은 못 하지만 엄마에게 너무 고마워. 내 친구들도 선생님도 다 엄마 같은 엄마 둬서 좋겠다고 해. 엄마는 좋은 엄마야.”
어렵구나. 무얼 가르쳐야 할 지 무얼 기다려야 할 지 온통 수수께끼다. 나도 초등학교 때 책 한 권 안 읽었고서 이런다. 노는데 무슨 책이야? 읽을 책도 없었다. 그런데 어릴수록 책을 많이 읽는 습관 만큼 좋은 경험이 없다는 생각에 노느라 책을 안 읽은 내 과거가 후회가 되는데, 어서 읽혀보려는데 어찌할 것인지.
"많이 하라는 것도 아니고 딱 그것만 하라는 건데 우리 아이들이 못 해내네."
아, 이 생각도 잘 못 됐다. 내가 엄마에게 품었던 불만, '도대체 어디까지 해내야 만족할거야?'를 내가 대물림하고 있나보다. 나도 모르게. 어디까지 해야 나는 아이들에게 만족할까, 그 만족이란 선은 있는 걸까. 아이들이 행복하면, 어린 시절 웃던 기억을 많이많이 주고 싶은 엄마일 뿐이라고 했지만 속마음은 이런 강요자가 들어앉아 있었다.
네가 건강하니 충분하구나. 네가 그렇다면 그런거지. 네 모습이 그대로 참 좋구나!를 연발하는 엄마가 되어주고 싶은데, 그렇게 키웠을 뿐인데 “우리 아이 잘 컸어요.” 라고 귀결되야 하는데 참 어려운 일이다. 세 아이의 엄마의 일은.
내 자신은 내적 강요자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다. 나를 옭아매지 않는다. 내가 이래야 한다는 법도 집어치운지 오래다. 내 맘에 끌리는대로, 훌훌 털고 유영 중이다. 아이는 내 사랑만 받아먹고 자란다고 생각해야지. 우리 아이를 가르치는 건 우주의 몫이고 자신들의 몫이야. 내가 잘 가고 있으면 우리 아이들도 제 방식대로 날 따라오겠지. 난 그저 이쁘게 봐 주어야지. 들꽃들처럼. 그냥 한들거리도록. 놔두어야지. 다시 마음을 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