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짜 변했다. 아버님 생신을 잊어버렸다. 내 일정이 바빠서 깜빡했다. 정말 이런 일은 처음이다.
"엄마, 우리가 할아버지 깜짝 파티 해 줄까?"
"진짜? 할 수 있겠어?"
내가 큰 딸에게 물었다. 나머지 두 녀석들도 하고 싶다며 빨리 다이소에 가자고 했다. 우리는 부르릉 차를 타고 다이소에 가서 파티 물품을 구매했다. 그리고 케이크를 사서 아파트에 가니 저녁 7시.
"난 거실창에 파티벽을 만들고 생일 축하합니다 글씨를 달게."
큰 딸이 말한다.
"난 편지를 쓰고 꽃을 접을게."
둘째딸이 말한다.
"난 편지를 쓰고 풍선을 불게."
막둥이 아들이 말한다.
"자, 이제 시작!"
내가 시작 신호로 박수를 치자 세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오시기 전에 파티 준비를 끝내려고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시아버지의 생신이란 걸 오늘 낮에서야 알고 말았다. 아, 이런 적은 정말 처음이다. 생신을 잊다니. 아버님이 아이들 밥을 사 주고 싶다고 하셔서 우리 아이들과 조카들까지 샤브샤브 집에 가서 걸판치게 먹었다. 그런데 아버님은 자꾸 이상한 뉘앙스의 말들을 하셨다.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캘린더를 확인해 보니 음력으로 오늘 날짜가 생신이 맞았다. 오, 마이 갓!!!
난 사실대로 날짜를 착각하고 있었다고 말씀드렸다. 죄송하다고. 아버님은 네 마음을 다 안다면서 괜찮다고 넘어가셨다. 그래도 영~ 찝찝하다. 일년에 한 번 있는 날인데. 작년에는 최고로 힘들었지만 30만원을 모아 만원짜리, 5만원권으로 바꾸어서 필름 시트지에 하나하나 넣고 아버님이 편지인 줄 알고 엽서를 집어 올리면 줄줄이 딸려나오는 돈 선물을 받는 기쁨도 드렸었다.
아버님은 올해 내 생일날 옆집에 솜씨 좋은 가게에다 어머니 몰래 음식을 맡기셔서 소고기가 들어간 커다란 산적 한 통과 소갈비를 두통으로 재어오시고, 통닭을 두 마리 튀겨 오시고, 과일 한박스까지 싣고 저녁에 달려오셨다. 용돈도 봉투에 두둑히 담아 오셨다. 우리 둘의 훈훈한 오고감이 있는데 이번 생신은 내가 그만 깜박하고 말았다. 10월은 정신이 없다. 자격증 과제가 계속 나를 괴롭히고 큰 딸 중학교 문제로 정신이 팔려 있고... 아, 모르겠다. 내가 기분이 방방 떠 있는 동안 아버님 생신을 잊었다. 너무 서운하셨을 거라는 마음이 들었다. 외로운 분이니까.
저녁에는 시어머니가 우리를 부르셨다. 저녁을 사 주시겠다고. 내가 생신을 기억하지 못 했다고 하니, 생일이 뭐 별거냐고 하셨다. 어머니는 친구분이랑 천변을 운동하신다면서 밥만 먹고는 각자 갈 길을 가자고 하셨다. 아이들도 좀 그랬나 보다. 저녁 후 할머니와 헤어지고 난 뒤 할아버지를 위해 이벤트를 하자고 자기들끼리 의견을 모았다.
난 개인적으로 니체가 말한 인간 단계가 참 좋다. 낙타의 단계, 사자의 단계, 어린 아이의 단계. 창조성은 낙타와 사자를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어린 아이의 단계에서 나타난단다. 나의 창조성은 이제 막 열리기 시작했다. 절로절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질문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런가보다 했다. 정말 깝깝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질문이 떠오르지 않으면 자연스레 다른 사람의 말을 듣게 된다. 내가 어찌해야 할지 갈팡질팡이라 다른 사람의 의견대로 좇아가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아이 단계에 이르면 저절로 초자아에서 벗어나게 된다. 아이의 발랄하고 천진난만하면서도 낙타와 사자를 거친 성숙함을 강요자가 획일적인 잣대로 들이대며 재단할 수가 없다. 어린 아이의 승이다!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들어오는 거실 바닥에 레드카펫의 빨간 길을 만들어 놓고 반짝반짝 거리는 파티봉을 들고 기다렸다. 아버님께 전화가 걸려왔다. 아이들은 할아버지에게 집에서 쉬고 있다고 얼버무리며 할아버지를 속였다. 할머니에게는 전화를 걸어보니 할머니는 친구들과 놀다 온다며 늦게 아파트에 오신다고 하셨다. 아이들은 그래도 할아버지를 위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할아버지를 깜짝 놀래켜 주려는 마음으로 들떠 있었다.
드디어 문을 여는 번호키 소리. 띠띠띠띠 삐리릭~ 아이들은 부랴부랴 불을 끄고 파티봉을 들었다. 그런데 웬걸. 할머니가 먼저 들어오셨다. 우릴 보더니 깜짝 놀라며 아직도 안 갔냐면서 아버님은 밖에 앉아계시더라고 하셨다. 시간이 9시가 훌쩍 넘고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어, 다시 번호키 소리. 띠띠띠띠 삐리릭~~ 아이들은 다시 전등 스위치를 끄고 파티봉을 들었다. 아버님은 우리가 있는 줄도 모르시고 왜 불도 안 켜고 있냐고 들어오시다 막내 아들이 파티봉을 들고 춤을 추며 아버님께로 다가가니 그제서야 눈치를 채시고 놀라며 활짝 웃으셨다. 둘째딸은 할아버지에게 살포시 안기고, 할아버지가 레드카펫을 다 밟을 무렵 큰 딸이 나타나 할아버지를 팔벌려 안았다. 그리고 불을 켜고 벽에 장식된 축하 이벤트를 보고 케잌에 초를 꽂고 불을 붙였다. 아버님은 우리가 부르는 생일 축하 노래 소리에 맞추어 박수를 치시며 좋아하셨다.
자식이래야 한다면서, 너무너무 흐뭇해 하셨다. 자식 없는 사람은 이런 기쁨도 모른다면서. 마침 딸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딸들과 긴 통화를 끝내고 우리는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돈 봉투를 드리고 편지를 읽고 사진을 찍고 아파트를 나왔다. 아버님은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 앞까지 우리를 배웅 나오셨다.
하지 않았으면 큰 일 날 뻔 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별로 없었겠지. 하지만 이벤트를 해 주자는 아이들의 창조적인 생각이 없었다면 오늘 하루는 얼마나 더 쓸쓸했을까. 내 창조성이 막힌 대신 아이들의 자발적인 창조성이 할아버지를 기쁘게 했다. 아버님은 곧바로 아파트로 들어오지 않으시고 아파트 놀이터에서 한참을 앉아있다 들어오셨다고 한다. 종종 그러시는 것처럼.
오랜만에, 생신이니까 오늘밤은 아버님이 웃고 주무시겠지. 흐뭇하게 주무시겠지. 때에 맞는 창조적인 생각들은 우리의 삶을 참 풍성하게 한다.
창조적인 어린 아이가 되면 내 삶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순간순간도 풍성하게 해 줄 수 있는 친절이 생기게 되는 것 같다. 더 어린 아이다워진다면 더 창조적인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더 놀라워질까.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자라나기를, 내 말이 아이들에게 강요자의 엄격한 벽이 되지 않기를 삼가며 조심스럽게 나를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