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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시스 Dec 03. 2021

실컷! 실컷! 실컷!

혜원로

"엄마, 어디 가?"

"응, 혜원로에 갈 거야."

"거기가 어딘데?'

"내가 찜 해놓은 오솔길 알지?"

"걸으러 간다는 거지?"

"참, 너희도 학교 빼먹고 엄마랑 가자. 내장산 단풍은 학교를 빠지고서라도 봐야해. 너희도 알지?"

"아니야, 그냥 학교 갈래. 걷기 싫어요. 친구랑 노느게 훨씬 더 재밌어."

"그래, 바이바이!"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 정읍, 정읍이 좋았던 적이 없다. 정읍을 누려본 일이 없었기에 나에게 정읍은 아름다운 시골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어정쩡한 곳. 공부는 전국에서 늘 꼴찌를 하는 지역이라 공부도 못 한다고 했고 기업체 공장도 없어서 잘 먹고 잘 살지도 못 하는 지역이다. 지금은 노인들을 위한 지역으로 탈바꿈하려하는지 도심 한 가운데 실버 아파트를 떡하니 짓고 있다. 그래서일까. 난 대학만이라도 서울로 꼭 올라가고 싶었다.


서울이 나빴다는 기억은 하나도 없다. 신기하고 좋기만 했다. 서울에는 별의별 가게들이 많았고 신기한 공간들도 많아 갈 곳이 천지였다. 다만 서울에서는 걷는 곳마다 돈이기에 돈이 꼭 필요한 곳이기는 했다. 그러나 새로운 문화를 접해볼 수 있는 곳은 당연 서울, 서울을 좋아했었다. 20대에 서울에서 살아보기를 참 잘했다. 결혼해서 정읍으로 내려오니 서울서 누렸던 문화들이 늦게는 7년, 또는 10년쯤이 지난 다음에도 신문물처럼 생겨나곤 했다. 대도시와 시골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실감했다. 도시의 문화 수준을 결코 따라갈 수는 없는 법.


반전은 코로나로 모든 일상이 멈추면서 일어났다. 코로나로 아이들이 학교에 못 가게 되면서 친구와 이른 아침 6시에 만나 내장산을 올랐다. 올라갔다 내려오는 적당한 경사가 있는 한 시간 코스. 친구 덕에 40일 정도 매일 내장산에 올랐다. 때는 바야흐로 봄이라 날마다 돋아나서 넓어지고 진해지는 나뭇잎들을 목격했다. (목격자처럼 낯설게, 가까이)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시작날부터 안개가 자욱히 낀 날과 새들이 유난히 아름답게 지저귀던 날, 옹달샘처럼 맑은 물 아래로 자유로이 헤엄치는 물고기떼까지. 그리고 절에서 만나 우리를 주차장까지 따라 내려오곤 했던 새끼 강아지 짱이까지. 한번은 멧돼지를 본 적도 있었다. 꼼짝 못 하고 정지 상태로 숨 죽이던 몇 초의 그 시간, 잊을 수 없다. 내장산이 얼마나 좋은지, 좋은 정도가 아니라 내장산에 반해버렸다.


내장산은 내장산만 독불장군처럼 서 있지 않았다. 내장산은 내장산 호수공원, 수목원, 내장산 분수대, 분수대에서 이어지는 한적한 산책로, 분수대에서 시내로 자전거만을 타고 달릴 수 있는 천변길, 내장산 캠핑장, 더 깊숙한 곳에 자리한 내장산 야영장까지 품고 있었다. 이 모든 장소들을 누리기 시작했다. 내장산 하나로 멋진 공간들이 줄기줄기 뻗어나가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내장산 골프장까지 생겨 골프장 주변으로 수변 데크길과 공원이 조성 중이고 정읍에서 볼 수 없는 커피숍까지 생겨나 세련미까지 가세했다.


 이 모든 곳이 우리집과 가까이 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정촌가요특구도 있다. 우리집에서 갈 수 있는 곳들, 내가 좋아하는 장소들이 지척에 있다.  시골이라 집값 변동에는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 깊은 곳이기도 하지만 난 이곳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대형 스트레스가 날아간 날이니 내가 좋아하는 산책길을 걸어볼 생각이다. 호수공원에서 시작해서 내장산까지 이어지는 오솔길. 그 길을 모르는 사람이 많고 내장산에서 이어지는 물줄기를 따라 걷기 때문에 물소리를 들으며 고요히 걸어갈 수 있는 길. 오늘은 큰 맘도 먹었다. 1시간 코스가 아니라 내장산 안으로 들어가고 말리라. 단풍을 봐야지. 날씨까지 화창한 완벽한 가을날.


혼자 걸어야지. 혼자 걸어야 새로운 생각도 떠오르고 느긋하게 사진도 찍을 수 있다. 나랑 데이트 하는 기분은 말로는 다 담지 못 한다. 데이트는 남자랑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나와의 데이트가 제일 좋다. 아이들을 등교시키며 난 곧장 산책로로 가서 걸을 셈이다. 서진로를 걷는 스승님처럼 나도 그 길을 혜원로라고 지어볼까. 나만의 오솔길? 재밌다. 실컷 걸어봐야지. 실컷이란 말이 내 가슴에 콕 박힌다. 실컷 단풍을 봐야지. 실컷 물소리를 들어야지. 실컷 땡땡이 쳐야지. 실컷 읽어야지. 실컷 여행해야지. 아, 마지막에서야 나오는구나. 실컷 써 봐야지. 하나 더 추가하면 실컷 사랑해봐야지. 내 인생, 이리만 살면, 실컷 하고 나면 원도 없이 죽을 수 있겠다. 오늘은 실컷 걷고, 실컷 읽어야지. 존버거의 책이 날 기다리고 있다. 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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