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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시스 Dec 08. 2021

시간에 친절한 마음이 유머일까?

신년음악회와 플롯 연주자의 음악 여행

"엄마, 나도 악기 배우고 싶어."

그럴 줄 알았다. 큰 딸도 그랬으니 둘째 딸도 그랬을 거야.

"진짜? 바이올린 다시 할 거야?"

"난 플룻이 하고 싶은데. 바이올린을 다시 할까?"

"넌 힘이 약하니까 플룻보다는 손이 섬세한 바이올린이 어때?"

이래뵈도 학교 방과후 바이올린 선생님께 10년간 가르친 아이들 중에 가장 뛰어난 아이라고 칭찬받았던 딸이다.

"생각해 볼게."


아침에는 내장산 산책, 집에 와서 씻고 잠깐 쉰 다음 밥을 먹고 고창 00중으로 고고! 했다. 가는데 1시간, 오는데 1시간. 신입생 학부모 OT가 있었다. OT가 끝나자마자 4시부터 시작하는 음악회에 가야했다. 우수공연 추천작. 클래식으로 듣는 드라마 OST라는 공연이었다. 정읍시에서 후원하는 음악회에 온 가족이 다 예매를 했다. 부모님, 우리 식구네, 동생네 식구들까지. 먼저들 들어가고 난 공연이 시작한 뒤 10분 정도 지나서야 입장할 수 있었다.

 

2주 전에는 독일 뮌헨에서 공연했고 어제는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하고 왔다는 팀은 정읍에서는 보기 드문 연주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내게 와 닿았던 지점은 음악이 아니라 한 사람이다. 이 공연을 기획하고 추진했다는 플룻 연주자. 머리가 벗겨질듯 말듯 훤한 이마만큼이나 새하얀 피부의 외국인 남자. 연주자들 중 그 분만 외국인이다. 필립이라 했던가? 30명 정도 되는 최고 수준급인 단원들과 호흡을 맞춘 음악들은 이름만 들어도 안다는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그리고 플룻 연주자.


플룻 연주자는 아주 어색한 한국말로 간간이 다음곡을 소개했다. 그의 수준급인 음악 연주와 아기 초보 같은 한국말 솜씨. 극과 극으로 멀어져 가는 N극과 S극이라고 할까. 그 사이 영역은 유머가 불러 일으키는 웃음의 영토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꿋꿋하게 한국말을 다 외워서 제법 긴 분량의 대사들을 해 냈다. 태양의 후예 드라마 음악을 들려줄 때는 유대위 흉내를 내려고 군복에 건빵 모자를 쓰고 나와 연주를 하기도 했다. 그의 말투와 얼굴에서 음악회 내내 여유로움은 그를 아우라처럼 둘러싸고 있었고 유머는 은은한 조명처럼 빛을 발했다.


첫째딸이 1학년이었을 때 둘이서 갔던 동유럽 여행이 떠올랐다. 12월 31일과 1월 1일이 걸쳐 있는 새해맞이였다. 마침 우리는 모차르트의 고향, 음악하는 사람들의 로망 오스트리아 빈에 머물고 있었다. 빈에서는 늘 신년음악회를 연다는 걸 알게 되어 티켓을 끊었다. 드레스를 입고 가야한다고 했지만 그럴 처지도 아니어서 가볍게 입은 차림 그대로였다.


밤 12월 31일 밤 11시에 시작하는 음악회였다. 새해 1월 1일로 넘어가는 새벽 1시까지 계획되어진 신년음악회. 피곤한 몸만큼이나 무겁고 진지할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공연은 반전에 반전이었다! 경쾌한 왈츠와 발레, 깜짝 연기들로 이루어진 음악회는 듣고 보는 내내 클래식과 관련된 내 고정관념이 모래성처럼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손뼉을 치며 박수치고 유쾌하게 몸도 흔들며 내내 기분이 좋았다. 그들이 음악을 즐기는 태도가 낯설게 다가왔다. 음악가들은 장난스런 몸짓과 표정, 짤막한 연극으로 우리에게 유머를 선사했고 보는 내내 마음이 햇살로 달달하게 달궈진 것처럼 느껴져서인지 음악도 절로 좋아졌다. 여행을 다녀와서 큰 딸은 한동안 클래식을 찾아 들었다. 곧바로 플룻을 연주하고 싶다며 플룻을 배우기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학교 방과후지만, 일주일에 두 번씩 배우고 있다. 중학교에 가서도 플룻을 이어서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으니 신년음악회는 아주 막강한 동기를 부여해 준 셈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단원들은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리듬을 타며 연주하지만 플룻 연주자만 홀로 미소 짓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음악으로 승부를 겨뤄야하기 때문에 즐거움만은 될 수가 없는 걸까. 이어진 연주에 숨이 가빠와도 플룻 연주자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는다. 마지막 인사까지도 유머러스한 대사를 청중들에게 선사했다. 유머는 곧 웃음이라 플룻 연주자 덕분에 행복해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플룻 연주자를 보며 빈에서 봤던 신년음악회가 떠올랐고 유머라는 말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유머가 있는 사람은 얼마나 여유로운 사람일까, 얼마나 가벼우면서도 환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얼마나 느긋하게 만끽할 줄 알고 즐기며 사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돈은 벌면 되지만 유머는 어디 가서 구할 수 있나요? 갖고 싶다고 해도 갖을 수 없는 도도한 너, 유머! 


유머러스한 사람이 곁에 한 사람만 있어도 우리의 시간은 얼마나 밝아질까. 음악가라는 최고를 향한 직업세계에서도 유머를 품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음악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사람, 그러니 음악에 대한 열정은 자연스럽게 뿜어지기 마련이다. 선순환처럼 음악은 더욱더 사랑스러워지겠지? 그러니 무대에 서서도 최고의 음악과 함께 웃음을 선물해 줄 수 있는 거겠지! 고스란히 그 마음을 느낀 플룻의 소리를 3학년인 둘째딸도 알아챘고 악기를 배우고 싶어한다.


아, 유머를 갖고 싶다. 유머를 가지려면 욱하고 화내는 성질머리도 사라져야 하고 천천히 느긋한 마음으로 즐기는 마음으로 기본 베이스를 바꿔야 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여유로움뿐 아니라 여유로움을 지켜낼 수 있는 강인함도 지녀야 한다.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 매순간 매초에 친절한 마음. 시간에 친절한 마음이 유머일까? 하루 세 번, 밥 먹듯이 유머를 구사해 봐야겠다. 오늘은 유머가 있는 사람이 너무나 멋져 보인다. 얼굴에 보이는 여유로운 웃음. 나도 그 웃음을 지어봐야지.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유머로 기본 베이스를 깔 수 있을 때까지. 매 초에 친절해야지.


시간아, 네게 친절할게. 웃음지어줄게. 어느 순간이든, 그런 사람이 되어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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