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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시스 Jan 26. 2022

블랙홀 종량제

흘려보낼까나

"엄마, 00이가 참치캔 안 줘."

둘째딸이 동생의 소행을 이른다.

"엄마가 00이 몫으로 따로 사 줬잖아. 그거 빼고 나머지 참치는 씽크대 선반에 도로 갖다 놓을까."

참치캔을 1차로 2차로 두번에 걸쳐 샀다. 아들이 참치를 먹고 싶다고 해서 1차로 온라인 쇼핑을 했고 그 참치를 누나들도 먹으려고 하자 아들은 자기꺼라며 절대 줄 수 없다고 버티다가 몇 개를 강탈당하고 서럽게 울었다. 그래서 마트에 가서 묶어진 참치캔을 2차로 사주었다. 이건 온전히 네 몫이니 네가 먹고 1차로 사주었던 건 함께 먹으라고 했건만, 아들은 1차,2차 참치캔을 모조리 싹 쓸어다 집 안 어디에다 숨겨 두고 한 캔도 내놓지를 않는다.


"왔다, 왔어!"

아들은 자기꺼도 아닌데 택배가 오니 자기 선물처럼 좋아한다. 큰딸의 여드름 때문에 치료용으로 주문한 화장품이 도착한 것이다.

"엄마, 나도 하나 가져도 되지?"

"네가?"

"어, 나도 피부가 고와지고 싶단 말이야. 응? 응?"

그러더니 재빨리 박스 안에 있는 화장품 중 제일 좋아보이는 걸 하나 집었다. 수분크림, 클렌저, 오일이 2개씩 들어 있어 넉넉하기도 했다.

"나도 줘."

둘째딸도 끼어든다.

"너희 둘이 같이 발라. 하나도 엄청 오래 쓸거야."

"싫어, 절대 싫어."

아들은 자기 몫의 오일을 집어들더니 어딘가로 사라졌다. 또 숨기려는 속셈이지.


올해 열살이 되는 아들은 경제관념이 또렷해졌다. 내것도 내것, 좋은 것은 내것, 가질 수 있는 것은 내것, 그래서 모조리 어디다가 숨겨놓는다. 참치캔도 화장품도 자신의 지갑도 숨겨놓았다. 지갑은 큰 누나에게 빚진 천원을 갚지 않으려고 숨겨두고 있다.


아들이 블랙홀이 되어가고 있다. 뭐든지 빨아들인다. 조금이라도 좋아 보이면 여지 없다. 구멍 안쪽이 궁금하다. 도대체 싸이즈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가늠이나 좀 해보고 싶다. 쓰레기 봉투처럼 5L짜리? 10L짜리? 25L짜리? 저러다 말 건지, 자라는 내내 블랙홀의 구멍이 무한대로 늘어나는 건지 말이다. 참치캔, 화장품, 지갑을 넘어 그 다음 차례는?


누구나 블랙홀은 있다. 나도 당연히 블랙홀을 가지고 있다. 한번 들어가면 절대 나오지 않는 블랙홀. 돈이 되면 인색함이 되고 상처가 되면 과거 있는 여자가 된다. 그게 싫으면 뒤집어서 탈탈 털어버리면 된다. 그런데 블랙홀 바닥은 무슨 강력 본드의 접착성 물질로 되어있는지 닿는대로 붙어버려서 웬만큼 흔들어대도 떨어져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쉬운 일이 아니다. 블랙홀을 턴다는 일은 정말 만만치 않은 일이다. 시간이 오래 될수록 압착성은 커져서 마음 바닥과 한바닥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수술집도의 날카로운 매스로 살갗이 베일 각오를 하고 떼어내야만 한다. 그건 더 무시무시한 일이다. 누가 자신의 피를 보고 싶어하겠는가? 그러니 사건이 온다. 스스로 못 하니 사건이 와서 어쩔 수 없이 탈탈 털든지, 수술 집도의 날을 감당하든지 둘 중의 하나다.  


 방법은 있다. 작가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때다. 블랙홀을 흐르는 강물 이미지로, 한마디로 매트릭스의 시스템을 새로 바꾸기로 마음 먹는다. 블랙홀에 쟁여두지 말고 흐르는 강물에 띄워 보낸다. 하나하나 띄워 보낸다. 돈도 띄워 보내고 상처도 조각조각내서 떼어 보내고 과거도 두 손바닥으로 비벼서 가볍게 부서뜨린 다음 띄워 보낸다. 흘러 보내고 흘러 보낸다. 물도 흐르고 시간도 흐르고 사계절도 흐른다. 흐르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건 우주의 흐름에 반하는 일이다. 무거워서 가라앉아도 개의치 않는다. 언젠가는 물살에 닳아서 흘러가버리고 말테니 말이다. 10살적의 세포는 중년의 내게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터다. 그때의 난, 지금의 내가 아니다. 그러니 늘 새 존재로 새벽에 태어나 새 시간의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우주가 우리에게 주는 축복이다. 흐르는 물을 보며 마음이 편해지는 건 그때문이 아닐까. 연속된 존재지만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 존재로 창조 되었다니!


마음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는지 눈을 감아본다. 졸졸졸졸. 잘 흘러가고 있는지 묻는다. 커다란 바위를 휘감고 흘러가는지, 경사진 곳을 급하게 흘러가고 있는지, 잔잔하게 넓게 퍼지면서 흘러가고 있는지, 작은 돌자갈들이 깔린 곳을 거칠게 흘러가고 있는지, 각기 다른 소리들을 가늠하며 들어보려고 한다.


아들아, 참치캔이 흘러가는 소리는 어떨거 같니? 화장품이 흘러가는 소리는 어떨거 같니? 욕심이 흘러가는 소리는 어떻게 들릴까? 궁금하지 않니? 엄마랑 같이 들어볼래? 아들의 블랙홀에 대고 외치고 싶다. 영화 '러브레터'의 여주인공이 마지막 장면에서 거대한 앞 산에 대고 "오겡끼데스까"라고 외치는 폼으로 말이다. 거대한 아들의 블랙홀 앞에 대고 말이다. "흘려보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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